역사/중국

중국 고대 문명 - 중국의 선사 시대 (中國 先史 時代)

올드코난 2014. 12. 15.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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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선사 시대는 선사조 시대 (先史期 時代)부터를 기준으로 약 1만년 전에 시작되었고 본다. 중국에 존재했던 선사시대 고대 문명에 대해 알아 본다. (글 출처:위키백과, 중국 고대사)

 

1. 펑터우산 문화(彭頭山文化)

기원전 7500년 ~ 6100년까지의 문명으로 현재의 후난성 동서부의 양쯔강 중류 부근의 문명이다. 북쪽의 황허 유역에 번창한 페이리강 문화(裴李崗文化)와 거의 같은 시기의 문화로 중국의 신석기시대 초기에 해당한다. 벼를 재배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표식 유적은 후난 성 창더 시 리 현의 리양 평원에서 발견된 펑터우산 유적이며, 같은 현에서 발견된 80 여개의 유적이다.

펑터우산 유적은 1988년에 발굴되어 현재로서는 중국 유적 중 가장 초기의 취락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연대를 확정하는 것이 곤란하고, 기원 전 9000년부터 기원 전 5500년경까지 모호하게 연대를 추측해볼 수 있다. 부장품으로는 새끼줄 모양이라고 하여 이름 붙여진 색문토기(索文土器)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기원 전 7000년경의 쌀의 왕겨 등이 발견되었다. 이 쌀의 크기는 야생종의 쌀보다 크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재배종 벼가 실재했던 증거가 되고 있다. 다만 논을 경작하기 위한 도구 등이 펑터우산 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펑터우산 문화의 후기의 유적에서는 발견되었다.

80여개의 유적에서는 취락을 굴로 둘러싼 자취가 발견되어, 가장 오래된 둘레군락이라고 추측된다. 또한 취락 중앙에는 제사를 목적으로 한 듯한 큰 건물이 발견되었다.

 

2. 페이리강 문화 (裴李崗文化)

페이리강 문화(중국어 간체: 裴李岗文化, 정체: 裴李崗文化, 병음: Péilǐgāng Wénhuà Peiligang culture)는 기원전 7000년전부터 5000년전까지 허난성의 황하 유역에 존재하던 신석기 시대의 문화로 70개를 넘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1977년에 허난성 정저우 시 페이리강(裴李崗)에서 발견된 유적을 기념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고고학자들은 페이리강 문화가 평등주의이며, 정치 조직은 거의 없었다고 믿고 있다. 이 문화는 조를 경작 하는 농업이나 돼지를 사육하는 축산을 하고 있었으며, 이 문화는 토기를 만든 고대 중국 최고의 문화이기도 하다. 자후 유적(賈湖遺跡)은 이 문화에 관련된 가장 오래된 유적의 하나이며, 고대의 피리나 미해독의 가호계각 문자 등이 발견되고 있다.

 

3.허우리 문화(後李文化)

허우리 문화(중국어 간체: 后李文化, 정체: 後李文化, 병음: hòulǐ wénhu Houli culture[*], 기원 전 6500년경 ~ 기원 전 5500년경)는 중국 화북의 황하 하류 지역에 있던 신석기 시대 초기의 문화이다. 산둥 성을 중심으로 발견되었고, 허우리 문화의 사람들은 방형의 수혈식 주거에 살면서, 개나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 홍갈도의 도기나 각종 석기, 지하의 저장고, 무덤 등도 많이 발견되었다. 표식 유적은 산둥성 린쯔의 치링가도(斉陵街道) 후리관촌에서 발견된 허우리 유적이며, 고속도로 건설에 앞서 1989년부터 1990년에 걸쳐 발굴되었다. 허우리 문화에 속하는 유적은 산둥 성의 평야에서 발견되어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베이신 문화와 연계되었다.

 

4. 싱룽와 문화 (興隆洼文化)

싱롱와 문화(중국어 간체: 兴隆洼文化, 정체: 흥륭와문화[1](興隆窪文化), 병음: xīnglóngwā wénhuà Xinglongwa culture)는 기원전 6200년경에서 기원전 5400년경 중국 만리장성 북방에 존재했던 신석기 시대의 문화로 그 출토 범위는 현재 내몽고 자치구 부근에서 랴오닝성 부근에까지 걸쳐 있어 홍산 문화에 선행하는 랴오허 유역의 문명의 하나로 추측된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중국이 실시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입각한 공정 연구의 일환으로, 2003년 6월부터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을 통해 중국은 황하문명(黃河文明)보다 빠른 요하문명(遼河文明)을 중화문명의 뿌리로 규정하고 있다. 이제까지 야만인인 동이족의 땅으로 보던 요하문명을 중국문명의 시발점으로 보기 시작했으며, 이를 중화민족과 중국사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싱룽와 문화(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 훙산 문화(중국어 간체: 红山文化, 정체: 紅山文化, 병음: hóngshān wénhuà), 자오바오거우 문화(중국어 정체: 趙寶溝文化, 병음: Zhàobǎogōu wénhuà), 신러 문화(중국어 간체: 新乐遗址, 정체: 新樂遺跡, 병음: Xīnlè Yízhǐ Xinle culture)등의 요하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문화의 단계를 넘어 세계의 새로운 문명으로 보아 '요하문명'(遼河文明)으로 명명(命名)하여 부르고 있다.

싱롱와 문화는 비취 등의 구슬 제품이 출토된 문화로서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용이 출현하는 문화 중에서도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한 싱롱와 문화 유적에서는 평저원통형의 비교적 낮은 온도로 구운 토기가 출토되었다. 황하 문명 외에 선사시대 중국의 신석기 시대 문화가 남쪽의 장강 유역 및 북쪽의 랴오허에서 발견되어 싱롱와 문화는 랴오허 문화의 하나로서 중요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싱롱와 문화 유적에서는 계획적으로 취락을 쌓아 올린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주거가 열을 이루고 있는 상태의 취락 흔적이 세 개의 유적에서 발견되었고, 또 몇 개의 유적에서는 한 층 더 큰 건물이 발견되었고, 굴에 둘러싸인 환호 집단 취락지도 발견되었다.

싱롱와 문화의 표식유적인 싱롱와 유적은 내몽고 자치구의 츠펑 시 아오한 기의 구릉 남서쪽 기슭에 있다. 이 유적은 남동쪽 1.3km 위치에 있는 싱롱와 군락 유적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유적에서는 수혈식 주거가 120개소가 발견되었고, 각 주거의 중앙에는 부뚜막이 있었다. 싱롱와 유적의 중앙에는 큰 건물이 있었던 흔적 외에도, 중국에서도 초기 시대에 발견되는 환호(굴을 파서 만든 집)라는 큰 취락이 존재하였다. 매장 풍습이 독푼한데 몇 개의 유골은 주거 아래에 매장되어 있었다. 싱롱와 문화의 다른 유적 같이, 싱롱와 유적의 분묘 등에서도 비취로 만든 구슬이 발견된 분묘에서는 구슬 제품 외에도 돼지 한 쌍과 함께 매장된 유골도 있었다. 최근 발견된 싱롱구 유적(興隆溝遺跡)에서는 잡곡이 있던 증거가 발견되었고, 신롱와 문화에 있어서 유일한 농업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5. 츠산 문화 (磁山文化)

츠산 문화(중국어 정체: 磁山文化, 병음: císhān wénhuà Cishan culture, 기원 전 6000년경 - 기원 전 5500년경)은 중국 화북의 황하 하류 지역에 있었던 신석기 시대의 문화로 허베이성 남부를 중심으로 발견되었다. 츠산 문화는 잡곡 재배를 중심으로 한 농업을 하였으며, 마석이나 돌도끼 등의 석기, 삼족의 도기가 많이 발견되었다. 바로 남쪽의 허난성 일대에서 발견되고 있는 페이리강 문화와 공통점이 많아, 츠산-페이리강 문화, 또는 페이리강-츠산 문화라고도 한다. 또 동쪽의 산둥성에서 발견된 베이신 문화와도 공통점을 가진다.

표식 유적은 허베이성 한단 시에 속하는 우안 시의 츠산에서 발견된 츠산 유적이다. 츠산 유적은 8만 ㎡의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고, 그 주거는 원형의 수혈식 주거였다. 유적에서는 돼지, 개, 닭을 기른 흔적이 남아있고, 돼지를 주된 식용육으로 하고 있었다. 또 어로도 생계의 수단이며, 물고기를 잡아는 먹은 흔적도 남아 있다. 츠산 유적에서는 지하에 만든 저장용 구멍(교혈)이 500개 이상 발견되어 잡곡을 저장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알 수 있다. 가장 큰 교혈은 깊이 5m로 1,000kg 정도의 잡곡을 저장할 수 있었다.

 

6. 라오관타이 문화(다디완 문화, 老官台文化, 大地灣文化)

라오관타이 문화(중국어 정체: 老官台文化, 병음: lǎoguāntái wénhuà Laoguantai culture, 기원 전 6000년경 - 기원 전 3000년경)는 중국 화북의 황하 중류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문화로 섬서성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문화 중 현재로서는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 문화이다. 표식 유적은 1950년대 후반에 조사된 섬서성 화현 현성의 남서(중국 황화강의 지류의 하나로 서사군도강의 연안)에 있는 라오관타이 유적이다. 라오관타이 유적은 이 문화의 유형 유적 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유적이었지만, 출토한 문물은 비교적 적었다. 그러나 감숙성 친안 현의 다디완 유적에서 대량의 유물이 발견된 후, 이 문화를 다디완 문화(Dadiwan culture)라고 부르려는 움직임이 학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그러나 다디완 유적에서는 복수의 시대에 문화의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이유로, 이 문화 유형의 유물만 출토된 서안시 림동구의 백가촌 유적을 따서 백가촌 문화(白家村文化)라고 명명하려는 주장도 있었다. 명명 논쟁은 현재까지 계속 되고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라오관타이 문화는 두 개의 단계로 추측된다. 전기는 다디완기(大地湾期로) 대표되는 약 7300년 전 경이고, 후기는 섬서성 바오지 시에서 출토한 북수령하층(北首嶺下層)으로 대표되는 약 7300년부터 7000년 전의 사이의 시기이다. 라오관타이 문화의 발견은 그 후 이 땅에서 만들어진 채도 등을 특징으로 하는 신석기 시대 문화와 양사오 문화의 기원을 찾는 의의를 가진다. 당시의 사람들은 조 등의 잡곡류를 재배하고 있었고, 돼지나 개 등의 가축을 길렀으며, 정주하고 취락을 쌓아 만드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공구는 마제 석기가 주를 이루지만, 타제석기나 세석기 등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또 도기의 제작도 시작되어 수는 적은 비교적 저온으로 구운 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채도(채색 토기)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7. 신러 문화 (新樂文化)

신러 문화(중국어 간체: 新乐遗址, 정체: 新樂遺跡, 병음: Xīnlè Yízhǐ Xinle culture)은 중국 랴오닝성 선양 시의 시가지의 북부에 있는 기원전 5300년에서 4800년 경의 신석기 시대 모계씨족의 정주 취락 유적이다. 중국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싱룽와 문화(중국어 간체: 兴隆洼文化, 정체: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 병음: xīnglóngwā wénhuà Xinglongwa culture[*]), 훙산 문화(중국어 간체: 红山文化, 정체: 紅山文化, 병음: hóngshān wénhuà), 자오바오거우 문화(중국어 정체: 趙寶溝文化, 병음: Zhàobǎogōu wénhuà), 신러 문화(중국어 간체: 新乐遗址, 정체: 新樂遺跡, 병음: Xīnlè Yízhǐ Xinle culture[*])등의 요하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문화의 단계를 넘어 세계의 새로운 문명으로 보아 '요하문명'(遼河文明)으로 명명(命名)하여 부르고 있다. 1973년 발굴 유적에서 40여 채의 신석기 주거를 발견하였다. 부장품으로는 석기와 도기, 옥, 골각기, 나무 조각품, 정제된 석탄 등을 발굴하였다. 1978년에 또 다른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는데, 토템 숭배의 도구로 보이는 7200년 전의 나무 조각품을 발굴해냈다. 이것은 선양 지역에서 발굴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목조 조각품 중의 하나였다.

이 발굴 조사에서 키탄국(契丹國)으로 불리던 요왕조의 1000년 전의 무덤도 발굴되었다. 이 발굴지는 원래 신러 기숙사((新樂宿舍)라는 오래된 건물이 있는 곳이었는데, 그것을 따서 신러 문화라고 불렀다.

1984년에 신러유적 박물관(新樂遺址博物館)이 개관하였다. 현재는 유적 공원으로서 복원 주거를 세우는 등 정비가 되어 있고 박물관도 있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나무조각 《圖騰鳥》(새의 토템)은 선양 시의 심볼이 되었으며, 이것을 본뜬 기념탑이 선양 시내의 시 광장에 우뚝 솟아 있다. 또 유적 공원 내에는 요나라 대의 고분 두기도 있다. 200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8. 자오바오거우 문화(趙寶溝文化)

자오바오거우 문화(중국어 정체: 趙寶溝文化, 병음: Zhàobǎogōu wénhuà)는 기원전 54000년 경에서 기원전 4500년 경 중국의 북방에서 번창한 신석기 시대의 문화이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로 내몽고 자치구에서 허베이성 북부의 하류 지역 및 롼허와 자모론 강 지역(요하 상류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표식 유적인 자오바오거우 유적은 내몽고 자치구 츠펑 시 아오한 기에서 1986년에 발굴되었다. 면적은 대략 9만 평방 미터이다.

이 문화는 싱롱와문화와 신러문화라고 하는 중국 동북부의 요하 유역 문화에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수렵, 채집, 어로 외에도 농경도 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이 문화의 말기에 큰 제사 유적을 쌓아 올린 훙산 문화가 출현했다. 이 문화의 유적에서는 돌호미나 석포정 등과 같은 마제 석기와 타제석기 이외에 기하학 모양이나 사슴, 멧돼지 같은 동물의 문양이 새겨진 도기가 출토되었다. 또 돌이나 흙으로 만든 인형도 발견되었다.

 

9. 베이신 문화 (北辛文化)

베이신 문화(중국어 정체: 北辛文化, 병음: bĕixīn wénhuà Beixin culture, 기원 전 5,300년경 - 기원 전 4,100년경)은 중국 화북 산둥성의 황하 하류 지역에 있었던 신석기 시대의 문화로 표식 유적은 1964년에 산둥성 남부, 텅저우 시(당시는 등현)의 베이신 가도에서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에 의해 발견된 베이신 유적이다. 이 유적은 다웬커우 문화(기원 전 4100년경 - 기원 전 2600년경)의 유적아래에서 발견되었다. 그 일부가 1978년부터 1979년에 걸쳐 발굴되었다. 이 문화의 유적에서는 황갈도(모래가 섞인 흙을 낮은 온도로 구운 도기)나 홍도(치밀한 진흙을 높은 온도로 구운 도기)로 완성된 솥 등의 조리기구가 발견되었고, 일부에서는 보다 더 높은 온도로 구운 회도나 흑도도 출토되었다. 돌도끼나 돌낫 등을 이용한 마제석기나 타제석기, 골각기 등도 발견되었다. 연구 결과 당시는 채집이나 수렵 외에, 잡곡을 재배하는 원시적인 농업이나, 돼지나 소 등의 사육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0. 허무두 문화 (河姆渡文化)

허무두 문화(河姆渡文化, Hemudu culture, 기원 전 5000년경-기원 전 4500년경)은 중국 항저우만 남안에서 저우산 군도에 걸친 지역(현재의 저장성 동부, 닝보 시에서 저우산 시)에 펼쳐져 있다. 위야오 시의 하모도촌의 하모도 유적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하모도 문화라고 불린다. 허무두 문화는 마자방 문화와 공존하였으며, 이 두 문화는 두 개로 분리되어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적 교류를 하였다.

하모도 유적은 1973년에 발견되어 1973년부터 1974년 그리고 1977년부터 1978년의 두 번에 걸친 발굴 작업을 했다. 수도의 볍씨가 대량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대규모의 벼를 재배한 것이 밝혀졌는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 재배의 예라고 한다. 벼 이외에도 호리병박, 마름, 대추, 연, 도토리, 콩 등의 식물이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양, 사슴, 호랑이, 곰, 원숭이 등의 야생 동물이나 물고기 등의 수생생물, 돼지, 개, 소 등의 가축도 발견되었다.

유적에서는 고상식 주거(高床式住居, 지상보다 마루를 높게 한 건물)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유물들 중 석기는 비교적 적고, 돌도끼 등 공구로서 사용된 마제 석기나 장식품으로서 사용된 것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목기나 뼈로 만든 도구도 많이 발견되었다. 그 중 목조어(木雕魚)는 중국 최고의 목제 장식물이다. 또한 나무로 완성된 모양이 붙은 견갑골제의 사(논을 경작하는 도구)나 도, 섬, 활과 화살, 방추나 바늘 등 대량의 방직용의 도구, 뼈로 완성된 피리나 나무북도 발견되었다. 하모도에서는 중국 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칠기도 발견되었다. 도기는 흑도, 홍도, 홍회도 등 1000도 전후의 비교적 높은 온도로 구운 것을 볼 수 있어 일정한 기술 수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하학모양이나 식물문양, 노끈 무늬 등이 새겨져 있고, 안에는 사람의 머리를 본뜬 것이나 배를 본뜬 토기도 있다.

하모도 문화는 태호 주변에서 항저우만 북부에 분포한 마자방 문화(馬家浜文化)와 거의 같은 시기에 해당해, 다른 문화가 서로 서로 영향을 주면서 공존하고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하모도 유적에는 근처를 흐르는 요강이 두 번 큰 홍수를 일으켜 유로를 바꾼 자취나, 홍수로 소금물이 논을 침식한 흔적 등이 남아있어, 이러한 재해로부터 유적이 버려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미생물이나 꽃가루 등의 분석으로 하모도 문화는 *홀로세의 기후 최온난기의 한중간에 성립되었다고 추측된다. 항저우만 부근의 해면 수위의 연구 결과에서는 7000년 전부터 5000년 전까지는 해면이 낮은 위치에서 안정되어 있었지만, 5000년 전부터 3900년 전에는 빈번히 범람하고 있었다. 고마루식의 주거도 잦은 비 등 고온 다습한 기후의 특징에 속하는 산물이다.

[참고] *홀로세(Holocene)는 약 1만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지질 시대를 말한다. 충적세(沖積世) 또는 현세(現世)라고도 부른다. 지질 시대의 마지막 시대 구분이다. 플라이스토세 빙하가 물러나기 시작하면서부터로 신생대 제4기의 2번째 시기이다.

마지막 빙기가 끝나는 약 1만년 전부터 가까운 미래도 포함하여 현재까지이다. 그 경계는 유럽의 대륙빙상의 소멸을 가지고 정의되었다. 이시기가 시작되면서 시작된 인류의 발전과 전파로 인한 홀로세의 멸종이 일어난 시기이다. 홀로세 동안 기후는 꽤 안정적이었다. 빙상핵의 기록은 홀로세 이전에 한랭한 시기였던 최종 빙기 말기 이후에 전지구적인 온난화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거 드라이아스기에 접어들면서 기후 변화는 지역적으로 바뀌었다.

 

11. 다시 문화 (大溪文化)

다시 문화(중국어 정체: 大溪文化, 병음: dàxī wénhuà Daxi culture, 기원 전 5000년경-기원 전 3000년경)는 중국의 장강 중류에 있었던 신석기 시대의 문화로 주된 분포지는 장강삼협 주변(샤장지구) 및 양후 평원(후베이성에서 후난성에 걸친 평야)에서 표식 유적인 충칭시 우산 현의 구당협에 있는 다시 유적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다시문화는 장강 유역에 있던 청베이시 문화(城背溪文化)로부터 서서히 발전했다고 보이며, 취자링 문화(屈家嶺文化)로 연결되었다. 다시 유적은 1920년대에 미국의 고고학자 넬스·C·넬슨(Nels C. Nelson)가 토기 조각 등을 발견하였고, 1959년 이후 몇 차례에 걸쳐서 대규모 발굴이 이루어져 1970년대 이후 독자적인 신석기 문화로서 《다시 문화》라고 부르게 되었다. 다시 유적을 포함한 다시 문화의 주요 유적은 싼샤 댐 건설로 인한 수몰 등으로 없어졌다.

다시 유적에서는 소성온도의 비교적 낮은 도기인 홍도가 많이 출토되었고, 그 외에도 접시나 원통형의 단지 등도 발견되었다. 또 벼의 재배도 대규모로 이루어져 죽편과 진흙 벽이 있는 가옥이나 환호군락(環濠集落) 등도 발견되었다. 다시 문화는 장강 하류의 델타 지역과 문화 교류가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흰 접시 등의 유물은 태호 주변의 마자방 문화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반대로 다시 문화의 유적으로부터 발견된 비취 구슬 등의 유물은 마자방 문화의 영향을 받은 가능성이 있다.

 

12. 마자방 문화 (馬家浜文化)

마자방 문화(馬家浜文化, Majiabang culture, 기원 전 5000년경~기원 전 3000년경)는 중국 장강 하구 부근의 태호에서 항저우만 북안에 걸친 지역(현재의 장쑤성 남부에서 저장성 북부)에 퍼져 있다. 1959년 저장성 자싱 시의 마자방(馬家浜)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적(마자방 유적)이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1951년에 장쑤 성 북부 화이안 시의 칭롄강(青蓮崗)에서 발견되어 1958년에 명명된 칭롄강 문화(青蓮崗文化, Qingliangang culture, 황하 하류의 양사오 문화나 다원커우 문화에 영향을 받음)의 일부라고 생각되었지만, 후에 장쑤성 북부의 칭롄강 문화의 유적과는 다른 문화인 것이 밝혀져, 1977년에 마자방 유적의 이름을 따서 정식으로 ‘마자방 문화’로 이름 붙여졌다.

마자방 문화는 같은 장강 하구에 있으면서 항저우만의 남안에서 저우산 군도에 걸쳐 존재한 허무두 문화와 거의 같은 시기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1,000년 이상 다른 문화로서 공존하면서 교류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마자방 문화 다음에 등장한 송저 문화나 그 후의 량주 문화와 같이, 마자방 문화도 태호 일대에 분포하고 있었다. 마자방 문화의 발견은 장강 유역이 하류 지역과 같이 문명의 요람지였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자방 문화의 사람들은 쌀을 재배하고 있었다. 차오쎄산 유적(草鞋山遺跡)에서는 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유적에서는 돼지의 사육하고 있었던 흔적이나, 노루 등도 발견되고 있어 그 시대의 사람들이 동물의 수렵이나 사육도 실시하고 있었고, 농업에는 전면적으로 의존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비취 등으로 만든 장신구나 비교적 높은 온도로 구운 홍도, 의복 섬유 등도 발견되었다.

 

13. 양사오 문화 (仰韶文化)

양사오 문화(중국어: 仰韶文化, 병음: Yǎngsháo wénhuà)는 황하 중류의 채도를 동반한 신석기의 농경문화이다. 채도가 특색으로 채도문화(彩陶文化)라고도 한다.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3000년 사이에 존재했다. 유적의 대부분은 강기슭의 대지(臺地)에 있고, 거주지와 공동묘지가 있다. 정주생활을 했고 조·수수 등을 재배하고 가축 사육과 사냥, 고기잡이도 병행했다. 간석기·뗀석기·돌식칼 등으로 수확하고, 흙을 구워서 만들거나 돌을 갈아 만든 팔찌도 애용했다.

토기로는 붉은 간토기와 바탕흙에 모래알이 함유된 회도(灰陶)가 있었는데, 특히 일부 붉은간토기에 기하학무늬와 사람 얼굴 등을 그린 채도는 제사라든지 묘장공헌(墓葬供獻)에 쓰였다. 성인(成人)은 공공묘지 안의 구덩이에 매장되었으며, 어린 아이는 옹관장(甕棺葬)으로 집 근처나 마루 밑에 묻혔다. 유적은 허난 성(河南省) 서부, 산시 성(山西省) 남부, 산시 성(陝西省) 중부 등지에 분포되어 있으며, 대표적 유적으로는 산시 성 시안 시(西安市) 반포(半坡)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반포 유적과 허난 성 산현(陝縣)의 먀오디거우(廟底溝)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먀오디거우 유적이 있다. 시간적으로는 반포 유적쪽이 더 오래되었다.

양사오 문화는 황하 상류에 전파되어 간쑤양사오(甘肅仰韶)문화의 탄생과 산둥(山東)의 농경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중원에서는 이 문화에 뒤이어 룽산 문화(龍山文化)가 성립했다. 최근의 새로운 조사를 통해 허난 성 신정 현(新鄭縣)의 배리강(裵李崗)과 허베이 성 무안 현(武安縣)의 자상(磁上) 등에서 양사오 문화보다 앞서 있었던 초기 농경문화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14. 훙산 문화 (紅山文化)

훙산 문화 (홍산문화, 중국어 간체: 红山文化, 정체: 紅山文化, 병음: hóngshān wénhuà)는 중국 만리장성 북동부에 존재했던 신석기 시대의 문화로 요하문명의 대표 문화로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 츠펑 시와 랴오닝 성 조양 시 일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홍산문화는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고 연대는 기원전 4700년 ~ 기원전 2900년경으로 지금까지 츠펑(赤峰, 발견 당시엔 열하성), 링위안(凌源), 젠핑(建平), 차오양(朝陽) 등 500여 곳의 유적을 찾아냈다. 발견 지역은 옌산 산맥의 북쪽 랴오허 지류의 서 랴오허 상류 부근에 널리 퍼져 있다. 중국에 의해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고 중극축이 주장하는 요하문명(遼河文明)의 하나이다.

 

15. 다원커우 문화 (大汶口文化)

다원커우 문화(大汶口文化, 기원 전 4100년경~기원 전 2600년경)는 중국 북부(화북)에 있었던 신석기 시대 후기의 문화로 황하 하류의 산둥성 타이안 시 부근에서 많이 발견되었지만, 황해 연안과 보하이만 남안에서 루시 평원(魯西平原)의 동부, 회하 북안 일대에까지 넓게 퍼져 있고, 인접하는 안후이성, 허난성, 장쑤성에서도 일부가 발견되고 있다. 다원커우 문화라는 이름은 1959년에 산둥성 타이안 시 다이웨 구의 다원커우진(大汶口)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 유래한다. 1962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1964년에 다원커우 문화라고 이름 붙여졌지만, 이후 출토품에서 이 문화가 양사오 문화와 같은 시기거나 그보다 더 오래된 것이 확인되었다.

발굴은 1974년과 1978년에도 진행되었지만, 다원커우 문화와 관계된 것은 유적의 층 안에서도 중간 부분에서만, 깊은 층은 베이신 문화(기원 전 5300년 - 기원 전 4100년)에 새로운 층은 룽산 문화(기원 전 3000년 - 기원 전 2000년)와 관계된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다. 다원커우 문화의 유적에서는 터키석, 비취, 상아 등으로 만든 가공품, 및 도기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다원커우 문화는 초기(기원 전 4100년 - 기원 전 3500년), 중기(기원 전 3500년 - 기원 전 3000년), 후기(기원 전 3000년 - 기원 전 2600년)로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초기는 발굴품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출토된 인골의 성별 등에서 계급차이는 크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당시 사회는 모계 씨족 공동체였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 시기는 삼족의 도기(도기로 만든 세 개 다리의 조리기로 다리가 길다)나 홍도로 완성된 솥(3개의 다리가 달린 그릇) 등 다양한 형태를 한 도기가 특징적이다. 또 초기도 후기에는 흙으로 만든 분묘도 많아진다.

중기에 들어가면 출토되는 도기가 홍도에서 회도, 흑도가 증가하며, 크기나 문양, 형태의 다양함이 나타난다. 또 사회가 부계 씨족 공동체로 바뀌어 부계 사회가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후기에 들어가면 분묘 안에 목제 관이 나타난다. 다원커우 문화도 부계 씨족 공동체의 말기에 들어가면 계층화가 진행되어, 부장품이 없는 분묘가 있고, 대량의 부장품이 발견되는 분묘도 있다. 토기는 회도, 흑도가 주류가 이루게 되어, 그릇의 두께는 얇고 정교하게 변해가며, 흑도나 란각도(卵殻陶, 알 껍질과 같이 얇은 도기)를 특징으로 하는 룽산 문화로 연결된다.

 

16. 량주 문화 (良渚文化)

량주 문화(중국어 간체: 良渚文化, 정체: 良渚文化, 병음: liángzhǔ wénhuà Liangzhu culture, 기원 전 3400년경~기원 전 2250년경)는 중국의 장강 문명 중의 하나로, 저장성 항저우 량주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문화이다. 1936년 저장성의 항저우 시 량주에서 발굴되었다. 송저 문화(崧沢文化) 등을 계승하고 있어, 황하 문명의 산둥 룽산 문화(龍山文化)와의 관련도 지적되고 있다. 기둥형(柱形), 송솟형(錐形), 삼차형(三叉形) 등 다양한 옥기의 외, 비단 등도 출토되었다. 분업이나 계층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 순장을 시킨 무덤 등에서 알 수 있다.

최근의 장강 문명에 대한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량주 문화는 하나라나 은나라 왕조에 비교 되고 있다. 또, 황제의 삼묘정복(三苗征服) 전설을 황하 유역의 중원 부계 집단의 룽산 문화에 의한 삼묘(먀오족) 정복의 흔적으로 간주하며, 황하 문명과 장강 문명의 세력 다툼을 그린 것으로 하는 견해도 있다.

량주 문화는 벼농사를 하며, 도시 문명을 형성하고 있었다. 1000년 정도의 번영을 거치고, 홍수로 인해 이 문화는 붕괴되었다. 량주 문화 집단의 일부는 북쪽으로 올라가서, 황하 중류 지역에서 하 왕조를 일으켰다. 이윽고 하 왕조는 지배하에 있던 동이족의 후취(后翠) 부족에 의해 전복된다. 하 왕조의 유족의 일부는 북서쪽으로 피해, 쓰촨 분지로 이주하여, 삼성퇴 문화를 이룩하였다고 한다.

 

17. 마자야오 문화 (馬家窯文化)

마자야오 문화(중국어 간체: 马家窑文化, 정체: 馬家窯文, 병음: mǎjiāyáo wénhuà Majiayao culture, 기원 전 3100년경-기원 전 2700년경)는 중국 서북의 내륙부인 황하 최상류부의 간쑤성이나 칭하이성에 존재한 신석기 시대 후기의 문화이다. 감숙채도 문화(甘粛彩陶文化)라고도 한다. 도기 표면에 다양한 문양이 그려진 채도가 대표적이며, 외에도 청동으로 완성된 물품도 등장해 청동기 시대의 개막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23년에 간쑤성 린타오 현의 마자야오촌에서 유적이 발견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자야오 문화에서는 도기를 굽기 전의 항아리나 조리기에 붓으로 산화철 등에서 검정이나 빨간 색으로 문양을 그려, 1000도 전후의 온도로 구운 채도(채문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고, 그 문양이나 스타일은 현재에도 세계의 연구자들이나 수집가들은 매료시키고 있다. 마자야오 문화는 양사오 문화의 유적 위의 지층에서 발견된다. 그 때문에, 황하 중류의 중원에 출발한 양사오 문화가 서쪽으로 전파되었다고 추측되며, 5700년 전의 신석기 시대 후기에 출현하고 있다.

마자야오 문화는 출토물의 유형에 따라 스링샤(石嶺下), 마자야오(馬家窯), 반산(半山), 마창(馬廠)의 네 개의 유형기로 나뉘어 있다. 이러한 출토 지층의 관계(층서학)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으로 스링샤 유형기는 기원전 3800년에서 기원전 3100년 사이에, 마자야오 유형기는 기원전 3100년에서 기원전 2700년 사이, 반산 유형기는 기원전 2600년에서 기원전 2300년까지, 마창 유형기는 기원전 2200년에서 기원전 2000년 사이에 각각 번창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8. 취자링 문화 (屈家嶺文化)

취자링 문화(중국어 간체: 屈家岭文化, 정체: 屈家嶺文化, 병음: qūjiālǐng wénhuà Qujialing culture, 기원 전 3000년경~2600년경)는 중국의 장강 중류,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후베이성에서 후난성에 걸쳐 있는 신석기 시대의 문화이다. 싼샤에서 후베이성, 후난성 주변에서 번창한 다시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황하 중류의 산시성 남부나 허난성 서남부, 장강 하류의 장시성 북부로 확대되었다.

표식 유적인 취자링 유적은 후베이성 징먼 시 징산 현의 취자링에서 발견되었다. 취자링 유적은 1955년부터 1957년에 걸쳐 발굴 조사되었지만, 이후 후베이성 각지에서도 취자링과 공통점을 보이는 유적이 발견되어 그 중 많은 유적(예를 들면 지장시의 관묘산 유적)에서는 전후의 문화와의 관계도 판명되었다. 장강 중류의 다시 문화를 계승해, 그 후기는 칭룽촨 문화(青龍泉文化, 후베이 룽산 문화)로 연결되어 간 것을 알았다.

취자링 유적에서는 벼를 재배한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또 동물로는 닭이나 개, 돼지, 염소 등의 유류물이 발견되었다. 또 10여 곳 정도의 저장용의 굴에는 물고기를 비축했던 흔적이 있다. 황하 유역의 룽산 문화와는 출토된 도기에 공통점이 많고, 분묘의 부장품에서는 흑도, 특히 그릇의 두께가 매우 얇은 란각도(卵殻陶)가 많이 출토되었다. 도기의 형상은 다시 문화에서 발견되는 권족기(圏足器, 크고 높은 다리를 가진 그릇)를 많이 볼 수 있지만, 솥도 그것보다 많이 발견되었다. 또 건축재로는 구운 흙의 덩어리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 이후 벽돌의 발달을 엿보게 한다.

취자링 문화의 독특한 유물로는 도기로 완성된 주발이나 채색한 방추차(紡錘車, spindle-whorls)가 있다. 채색 방추차는 방직의 발달을 나타내는 것이며, 스자허 문화에도 방추차가 전승되었다.

 

19. 룽산 문화 (龍山文化)

룽산 문화(중국어 간체: 龙山文化, 정체: 龍山文化, 병음: Lóngshān wénhuà Longshan culture, 기원 전 3000년경~2000년경)는 중국 북부(화북)의 황하 중류에서 하류에 걸쳐 퍼져 있는 신석기 시대 후기의 문화를 말한다. 흑도가 발달하여 흑도 문화라고도 한다. 룽산 문화는 중원 룽산문화(허난 룽산문화와 샨시 룽산문화) 및 산둥 룽산문화로 나뉘어 있다. 산둥 룽산문화는 황하 하류를 중심으로 존재한 다원커우 문화에 이어 나타나며, 허난 룽산문화는 황하 중류에 존재한 양사오 문화에 이어 등장하고 있다. 룽산 문화는 황하 유역의 다른 문화가 발전했던 지역에까지 널리 퍼졌을 뿐만 아니라, 장강 유역 등, 이후 한족의 문화가 발달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룽산’이라는 이름은 1928년 산둥 성 룽산에서 처음으로 유적이 발굴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룽산 문화는 중원 룽산문화(허난 룽산문화와 샨시 룽산문화) 및 산둥 룽산문화로 나뉘어 있다. 산둥 룽산문화는 황하 하류를 중심으로 존재한 다원커우 문화에 이어 나타나며, 허난 룽산문화는 황하 중류에 존재한 양사오 문화에 이어 등장하고 있다. 룽산 문화는 황하 유역의 다른 문화가 발전했던 지역에까지 널리 퍼졌을 뿐만 아니라, 장강 유역 등, 이후 한족의 문화가 발달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룽산 문화는 산둥성 동부의 장추 시 룽산진에 있는 청즈아이(城子崖)에서 1928년에 유적이 출토되어 1930년 이후 본격적으로 발굴되었다. 룽산 문화의 특징은 고온으로 구운 회도, 흑도를 중심으로 한 높은 도기 기술에 있으며, 그릇이 얇고 균일하여 녹로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란각도(卵殻陶)로 불리는 것은 그릇을 알의 껍질처럼 얇게(0.5 - 1 mm) 만든 흑도의 도기로, 한층 더 연마해 검은 윤기를 내고 세밀한 문양을 조각한 것이다. 이것은 황하 유역뿐만 아니라 장강 유역이나 중국의 남부 해안 부근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룽산 문화의 확산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으로 장강 중류 지역의 취자링 문화도 회도, 흑도를 특징으로 하는 문화로 허난성 부근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어 룽산 문화가 장강 부근의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도기 생산 효율의 상승은 출토하는 도기의 수나 종류가 전대 문화에 비해 대폭 증대되었던 것에서도 볼 수 있어 솥이나 격(鬲, 삼족 솥), 규(鬹, 세발달린 가마솥), 높은 자루 잔(高柄杯) 등, 조리기나 식기로서 사용된 다양한 흑도, 회도의 도기가 출토되었다. 도기뿐 아니라 돌칼(石包丁) 등 석기나 골기 등의 무기나 도구, 비취 등의 구슬도 출토되었다. 룽산 문화 후기에는 청동기도 출현하였고, 은대, 주대(또눈 은나라 이전의 하나라)의 청동기 시대로 가는 과도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룽산 문화의 사회에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도시의 출현이다. 초기의 주거 형태는 수혈식 주거였지만, 곧 기둥이나 벽을 세운 가옥이 출현했다. 또 흙을 다져 만든 성벽이나 굴이 출토되고 있어, 특히 샨시성 샹펀 현 타오스 향(陶寺郷)의 남쪽에서 발견된 샨시 룽산문화의 유적, 타오시 유적(陶寺遺跡, 기원 전 2500년 - 기원 전 1900년)은 룽산 문화의 도시 유적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다.

농업이나 수공업의 발달도 특징이다. 샨시성의 웨이허 주변에서는 농업과 목축업이 양사오 문화의 시기에 비해 크게 발전하였다. 쌀의 재배도 시작되었고, 누에를 기르는 양잠업의 존재와 소규모의 견직물 생산도 확인되고 있다.

동물의 견갑골을 사용한 점술이나 무술(巫術)의 흔적도 엿볼 수 있어 종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업 등의 발달로 인한 잉여 생산이 생기고, 사유재산이 출현하여 사회의 계층화가 진행되었고, 부권제 사회나 계급 사회가 탄생했다.

중국의 신석기 시대의 인구는 룽산 문화에서 절정을 이루었지만, 룽산 문화의 말기에는 인구가 격감했다. 동시에 분묘의 부장품에서 고품질의 란각도, 흑도 등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룽산 문화의 전기는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2600년경으로, 기원 전 2600년경에서 기원 전 2000년경이 후기에 속한다. 또 룽산 문화는 황하 유역의 지형에 맞추어, 중원의 허난 룽산 문화, 웨이허 연안의 샨시 룽산 문화, 황하 최하류의 산둥 룽산 문화 등 지역 마다 여러 가지로 분화되고 있어, 특히 후기가 되면 분화가 명확해 진다. 웨이허 연안은 그 뒤로 실크로드로 불리는 서역 교역로의 기점으로서 중국 역사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20. 바오둔 문화 (寶墩文化)

바오둔 문화(중국어 간체: 宝墩文化, 정체: 寶墩文化, 병음: Bǎodūn wénhuà Baodun culture, 기원 전 2500년경~1750년경)는 중국 장강 상류의 쓰촨성 청두 평원에서 번창한 신석기 시대의 문화이다. 쓰촨성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문화 중의 하나이며, 같은 쓰촨성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잉판산 문화(営盤山文化, 기원 전 3100년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 청동기 시대의 삼성퇴 유적에 영향을 미쳤다고 추측된다. 삼성퇴 유적의 제1기는 아마 바오둔 문화와 같은 시기인 것으로 보인다. 20 세기 전반기에 발견된 황하 유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이나 장강 중하류 지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과 비교하여 1990년대에 뒤늦게 발견된 이 문화에 의해 쓰촨 분지에도 신석기 시대 문화가 있었던 것이 간신히 밝혀졌다.

이 문화의 표식 유적이며 면적 60만㎡의 최대의 유적이기도 한 바오둔 유적(용마고성, 龍馬古城)은 청두 시 신진 현 룽마향(龍馬郷) 바오둔촌에서 발견되었다. 그 외의 유적으로는 두장옌 시의 망청 유적(芒城遺跡), 충저우 시의 솽허 유적(双河遺跡)과 지주 유적(紫竹遺跡), 피 현의 고성 유적(古城遺跡), 원장 구의 유푸 유적(魚鳧遺跡)이라고 하는 대규모 위벽취락 유적이 있으며, 민강 선상지, 청두 평원(충두 시역)에 집중되어 있다. 취락의 주위에는 작은 돌로 둘러싼 성벽 등이 있는 것이 이 문화의 특징 중 하나가 되고 있다. 또 줄무늬가 있는 화변도기(花辺陶), 존(尊), 항아리 등의 도기도 발견되고 있어 삼성퇴 유적에서 나오는 도기와 공통점이 보인다.

 

21. 스자허 문화 (石家河文化)

스자허 문화(중국어 간체: 石家河文化, 정체: 石家河文化, 병음: shíjiāhé wénhuà Shijiahe culture, 기원 전 2500년경~2000년경)는 중국 장강 중류, 후베이성 부근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후기의 문화로 장강 유역에서 최초의 도시 유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취자링 문화와 구별되고 있다. 취자링 문화의 특징적인 유물인 채색 방추차(spindle-whorls)도 계승하고 있다. 회도 등의 도기나 도제의 인물상(토우), 비취 구슬 제품도 보다 발달한 제조법으로 전승되었다. 또 동광석이나 구리 제품도 스자허 문화의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표식 유적인 스자허 유적은 후베이성의 성 직할시 톈먼 시의 스자허에서 발견되었다. 유적의 상층부는 취자링 문화에 속하한다. 스자허 유적은 120만 ㎡의 넓이를 가지는 성곽도시에서 주위는 굴과 판축으로 완성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거의 정사각형의 형상을 이루며 남북 1.3km, 동서로 1.1km 정도로 만들어져 있어, 이 지역의 중심 도시였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또 취락도 타원형이나 사각형의 환호집락으로 확장되었던 시대임을 알 수 있다.

 

22.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 Erlitou culture, 기원 전 2100년경 ~ 기원 전 1800년경 또는 기원 전 1500년경)는 중국의 황하 중류에서 하류를 중심으로 번창한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 초기에 걸친 문화이며, 중국 초기 왕조 시대의 도시나 궁전을 쌓은 문화이다. 허난성 옌스 시의 얼리터우 유적에서 이름을 따왔다. 현재까지 100여 개의 얼리터우 문화 유적이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것에는 뤄양 시의 둥치엔궈 유적(東乾溝), 초리(矬李) 유적, 둥마궈(東馬溝) 유적, 산 현의 치리푸(七里鋪) 유적, 린루 현(현재의 루저우 시)의 메이산(煤山) 유적, 정저우 시의 뤄다먀오(洛達廟) 유적 등이 있다. 대체로의 지리적 범위는 허난성 중서부의 정저우 시 부근의 이허(伊河), 뤄허(洛河), 잉허(潁河), 루허(汝河) 등의 유역에서부터, 산서성 남부의 펀허(汾河) 하류 일대에 걸쳐있지만, 그 영향은 상류의 섬서성 남부나, 남쪽의 장강 중류 지역에도 미쳤다고 추측된다.

얼리터우 유적은 지금부터 3800년부터 3500년 전의 유적으로, 유적의 시기는 4기로 나눌 수 있다. 1, 2기는 신석기 시대로, 도기를 제조하는 농경 문명이었고, 3기·4기는 청동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도시 국가가 형성하고 있었다.

1기: 삼문협, 관중평원 동부, 허난성 남부로 확대

2기: 펀수이(汾水) 유역으로 확대해, 그 지역에 얼리터우 문화 동하빙(東下馮) 유형을 형성.

3기에는 친수이(沁水) 이서 지구, 허난성 동쪽, 동남부로 확대.

2, 3기 경에는 허베이의 휘훼이 문화(輝衛文化), 샤치유안 문화(下七垣文化), 산둥의 웨이시 문화(岳石文化) 등과의 충돌의 흔적이 보인다.

3, 4기가 되면 청동기나 궁전의 자취가 출토되었고, 도시 국가가 형성되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연구를 통해 예북 지방의 장허형 선상문화(漳河型先商文化)와 얼리터우 문화의 인접 지대인 것이 나타나 얼리터우 문화기에는 장허형 선상문화, 예시 문화(岳石文化), 얼리터우 문화의 세 개 세력이 황하 중류 유역에서 정립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또 얼리강 하층기에는 장허형 선상 문화가 남하하여, 서쪽의 얼리터우 문화를 받아들였고, 얼리강 하층기에는 동쪽의 예시 문화에 받아들였다.

이러한 추이 상황은 사서에서의 하나라와 은나라에 관한 기술과 맞추어 추정되곤 한다. 베이징 대학의 류서와 서천진은 얼리강 문화(二里岡文化)가 조상문화이며, 얼리터우 문화(二里岡文化)가 하나라 문화라고 추정한다.  

중국 고고학회는 1기부터 3기까지는 확대기에, 4기는 쇠퇴기로 정의하여, 1기부터 2기까지가 하 왕조, 3기 이후에는 은나라로 접어든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제왕세기>에 따르면 요가 도성을 둔 평양은 허난성이 아닌 산시성이며, 또한 우의 구주 설치 때 기주가 설치된 곳도 산시성으로 허난성 얼리터우 문화 유적지와 일치하지 않는다. 하나라 창시자 우임금의 묘는 허난성이 아닌 중국 동남부 저장성 사오싱 시에 있어 얼리터우 유적지 허난성과 지역적 거리가 멀다. 주나라 시대에는 하나라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마천 사기을 제외하면 하나라에 대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고 있어 하나라 관련설은 불확실하다.


이상 중국의 선사시대 문명에 대해 정리해 봤습니다. 이 내용은 위키백과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고, 오류가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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