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미국 제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 (Jimmy Carter; 제임스 얼 카터 James Earl Carter Jr.) 평가

올드코난 2017. 2. 2.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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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얼 "지미" 카터 주니어(James Earl "Jimmy" Carter, Jr., 1924년 10월 1일 ~ )는 39대 대통령 (1977년 ~ 1981년)으로 재선에는 실패했지만 퇴임후 더 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사례로 꼽힌다.


1. 초기 생애

지미 카터는 1924년 10월 1일 조지아 주 섬터 카운티 플레인스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지아 주는 인종차별이 심한 지역이고 어려서 흑인들이랑 같이 지내면서 인종차별을 반대하게 된다. 조지아 공과대학교를 중퇴하고 1943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 1946년 졸업후 잠수함에서 근무하다 아버지가 죽은 후 1953년 미국 해군 대위로 예편 땅콩·면화 등을 가꿔 많은 돈을 벌어 "땅콩 농부" (Peanut Farmer)라는 별명을 얻는다.


2. 정치

1962년 조지아 주 상원 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는데 그 선거가 부정선거였음을 입증해 당선되고 1966년 조지아 주 지사 선거에 낙선하 1970년에는 당선되어 1975년까지 조지아 지사로 근무했다. 조지아 주지사로 지내면서 등용법을 내세웠다.


3. 대통령

1976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도덕주의 정책으로 내세워, 포드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 갈등 조정, 중동 평화를 위한 캠프데이비드 협정 체결, 소련과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 조인, 대한민국 등 인권 후진국 국민들의 인권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서 인질 구출 실패를 이유로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패해 재선에 실패했다. 임기 말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건이 발생했다.


4. 퇴임후

퇴임 이후 민간 자원을 적극 활용한 비영리 기구인 카터 재단을 설립한 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제 3세계의 선거 감시 활동 및 기니 벌레에 의한 드라쿤쿠르스 질병 방재를 위해 힘썼다. 미국의 빈곤층 지원 활동, 사랑의 집짓기 운동, 국제 분쟁 중재 등의 활동도 했다.


5. 평가

경제문제와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 대해 비판을 받고 있다. 그의 도덕정치가 현실성이 부족했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는데 원래 개혁의 성과는 당장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의 4년동안은 실패했다기 보다는 미국이 개혁을 받아들이지 못한 점도 있을 것이다. 재임시에 인권 향상에 큰 공헌을 했고 퇴임후 사랑의 집짓기 운동 등을 하는 하는 등 퇴임 후 더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고 200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6. 뒷이야기

카터는 유능한 해군 장교였다 카터가 복무하던 시기 원자력 잠수함이 처음 건조되던 때로 카터는 많은 해군 장교들 중에서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만약 아버지 가업인 땅콩농장을 물려 받지 않았다면 해군 제독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지미 카터에 대해서 독재자 킬러라는 여담이 많이 나오는게 그가 만난 독재자는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처음은 1977년 만난 파나마의 독재자 오마르 토리호스로 1981년 비행기 추락사로 4년만에 사망했고 1978년 만나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는 1981년 총격으로 사망했 1978년 만난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이란 국왕도 망명지에서 1980년 사망했다. 1978년 만난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1989년 동유럽 민주화 혁명 와중에 총살되었고 1979년 만난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은 1982년 사망했다. 그리고 1979년 방한해 박정희를 만났는데 4개월 후 10월 총맞아 죽었다. (우연이 일치지만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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