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미국 제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Ronald Wilson Reagan) 평가

올드코난 2017. 2. 2.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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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윌슨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1911년 2월 6일 ~ 2004년 6월 5일)은 미국의 40대 대통령(1981년 ~ 1989년)으로 배우출신이며, 강경 보수 주의자로 패권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미국인들 사이에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 순위에 1위 혹은 3위 안에 드는 인물이다.


1.초기생애

1911년, 일리노이 주 탬피코에서 가난한 구두 판매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2년 유레카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아나운서로 일했다. 1937년 아이오와 주방위군 육군 제332기병연대 예비역 이병으로 시작 같은 해에 예비역 육군 기병소위가 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때 육군 항공대로 전속되어 1945년 12월 9일에 전역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소령이다. 1937년 할리우드에 서 1964년까지 약 50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47년 미국노동총연맹 산하 영화배우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49년에는 제인 와이먼과 이혼했고 3년뒤인 1952년에 낸시 데이비스와 재혼했다.


2. 정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군 기지의 부관으로 종군했고, 처음에는 민주당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지지하다 1950년대 초부터 보수적 변해 1962년 공화당에 가입했고 강경한 보수주의자로 목소리를 냈고 사회복지제도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1966년 캘리포니아 주의 주지사로 당선되어 조세감면, 복지제도의 축소, 고등교육정책에 힘을 쏟았고 캘리포니아 주의 재정을 적자에서 흑자로 바꿨다. 196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며 1976년 공화당 대통령후보지명대회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에게 패했다.


3. 대통령

1980년에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경제불황으로 인기가 추락했던 민주당 대통령 지미 카터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제4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취임 첫해 1981년 3월 정신질환자 존 힝클리(John Hinckley)에게 저격을 당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테쿰세의 저주를 피해간 대통령이 되었다.

재임 시 보수적이고 강경한 국내외정책을 펼쳐 미국인들에게 호응을 얻어 1984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월터 먼데일에게 압승을 거두면서 재선에 성공하지만 조세감면과 사회복지지출을 억제한 ‘레이거노믹스’의 결과 재정/무역 적자를 초래했고 대외정책에서 레바논 파병과 리비아 폭격, 그레나다 침공, 니카라과 반군지원 등으로 제3세계 국가들에게 위협을 주었고 포클랜드 전쟁에서는 영국을 옹호하는 등 군사외교 분야는 힘의 논리를 펼쳤다. 1986년 '이란 - 콘트라 사건'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해 1987년 12월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중거리핵전력폐기조약'(INF Treaty)을 맺어 냉전을 종식시켰고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부통령이었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를 도와 공화당 재집권에 성공 1989년 퇴임했다.


4. 말년

퇴임 후 고향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조용히 생활했다. 1993년 퇴임을 앞둔 조지 H. W. 부시는 로널드 레이건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다. 1994년 8월, 알츠하이머병 초기 진단을 받고 10년간 투병하다는 2004년 6월 5일 캘리포니아의 자택에서 93세로 사망했다.


5.평가

공화당을 강경한 보수당으로 만들었다. 2011년 갤럽(Gallup)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인이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레이건이 19%를 득표하며 1위를 기록했다. 2위는 14%를 기록한 링컨이었다. 재임중 레이거 노믹스와 감세 정책을 펼쳤는데, 이로 인해 정부의 적자가 늘어나게 되었고 양극화의 후유증의 원인이 되었다. 흔히 미국의 쌍둥이 적자(무역 수지와 재정 수지 동시 적자)를 레이거인 야기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분명 비판을 받아야겠지만 레이건이 미국인들에게 사랑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유머가 있었고 국민들과 소통하려는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오랫동안 배우와 아나운서로 활동한 이력이 큰 도움이 되었는데, TV시대 가장 적합한 정치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지나친 군비 확장과 사회보장제도의 축소 등에 대해서도 비판을 많이 받는 편이지만,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반 국민들이 이에 대해서 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은 조금은 아이러니다. 이는 레이건이라는 이미지에 현혹되어 그의 정책의 문제를 제대로 모르거나 알기 귀찮아하기때문이 아닐까.


6.뒷이야기

재임중인 1985년 4월 2차대전 유럽 전선 종결 40주년 행사로 서독을 순방하던 중 나치의 친위대 전사자들이 묻혀 있던 비트부르크의 묘지를 방문해 조의를 표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레이건은 최초로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 대통령이다. 얼마전까지 레이건은 취임식 기준 만 69세 349일로 미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고령의 나이에 당선되었지만 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기록을 깼다. 배우시절 보잘 것 없었고 영화 배우 협회 회장을 지내며 영화계 반공 운동을 벌였고 배우들의 사상을 FBI에게 일일이 보고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민주당 당원이었다 탈당해 공화당에 입당했는데 아내 낸시를 만난 후 보수 성향이 더 뚜렷해졌다. 레이건은 훗날 '나는 민주당을 떠나지 않았다. 민주당이 날 떠났다'라고 변명했다. 청년시절 딕슨의 로웰 파크에서 인명구조대로 일해 6년간 총 77명의 사람을 구했는데 말년에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을때 사람들을 구조한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다고. 레이건은 공화당 내 신보수주의자들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이 훗날 네오콘이라 불리는 자들이다. 레이건 재임시 약 13000명의 항공 교통 관제사들이 파업하자 이를 불법 파업으로 간주해 모두 해고시켜버렸는데 이후 많은 기업들이 파업하거나 노조에 협조한 이유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게된 나쁜 선례가 된다.

낸시 레이건은 조앤 퀴클리라는 점술가와 친했는데, 로날드 레이건 암살미수사건 이후 레이건 부부는 퀴클리의 말에 의존하게 되고 퀴클리가 비선실세로 국정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레이건 참 이상해) 2016년 3월 6일 낸시 레이건이 94세를 일기로 울혈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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