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기원
술은 인류 역사와 함께 탄생했다. 인류가 목축과 농경을 영위하기 이전인 수렵, 채취
시대에는 과실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실이나 벌꿀과 같은 당분을 함유하는
액체에 공기 중의 효모가 들어가면 자연적으로 발효하여 알코올을 함유하는 액체가 된
다. 원시시대의 술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모두 그러한 형태의 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최초로 술을 빚은 생명체는 사람이 아닌 원숭이로 알려져 있다. 원숭이가
나뭇가지의 갈라진 틈이나 바위의 움푹 패인 곳에 저장해둔 과실이 우연히 발효된 것
을 인간이 먹어보고 맛이 좋아 계속 만들어 먹었다. 이 술을 일명 원주(猿酒)라고 한다.
시대별로 주종의 변천을 살펴보면, 수렵, 채취시대의 술은 과실주였고, 유목시대에는
가축의 젖으로 젖술〔乳酒〕이 만들어졌다. 곡물을 원료로 하는 곡주는 농경시대에 들
어와서야 탄생했다. 청주나 맥주와 같은 곡류 양조주는 정착농경이 시작되어 녹말을
당화시키는 기법이 개발된 후에야 가능했다. 소주나 위스키와 같은 증류주는 가장 후
대에 와서 제조된 술이다.
술의 원료는 그 나라의 주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술로 만들 수 없는 어패
류나 해수(海獸)를 주식으로 하는 에스키모족들은 술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원료가
있다고 하더라도 종교상 금주를 하는 나라의 양조술은 매우 뒤떨어져 있다.
음주의 관습도 종교와 밀접한 관련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종교에서는 술을 빚어 마시
는 것이 의식(儀式)의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도의 베다 시대에는 소마
(soma)주를 빚어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 있었고, 가톨릭에서는 포도주가 예수피의 상징
이라 하여 세례에 쓰이고 주교가 미사 중에 마신다.
원시인들은 발효를 증식(增殖)의 상징으로 받아들여 풍요와 연결시켰고, 여성의 생식
작용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중동지역의 원시종교는 술에다 물을 섞어 신에게 바치는
것을 의식의 중심으로 거행했다. 여기에서 물을 남성으로 상징하여 음양화합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농경시대에 들어와 곡물로 만든 술이 탄생하면서 동서양에서 술은 농경신과 깊은 관계
를 가지게 된다. 술의 원료가 되는 곡물은 그 땅의 주식이며 농경에 의해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디오니소스라고 불리는 로마 신화의 주신(酒神) 바커스는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 신앙은 트라키아 지방에서 그리스로 들어온 것으로 보
인다. 바커스는 대지의 풍작을 관장하는 신으로 아시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여행하
며 각지에 포도재배와 양조법을 전파했다고 한다.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는 누이인 이시스와 결혼을 하고 이집트를 통치한 왕이었으나
동생에게 살해되어 사자(死者) 나라의 왕이 된다. 이 신은 농경의례와 결부되어 신앙
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보리로 술을 빚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구약성서」의 ‘노아의 방주’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하느님이 노아에게 포도의 재배
방법과 포도주의 제조방법을 전수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하(夏)나라의 시조 우왕 때 의적(儀狄)이 처음 곡류로 술을 빚어 왕에게
헌상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후 의적은 주신(酒神)으로 숭배되고 그의 이름은 술의 다
른 명칭이 되었다. 또한 진(晉)나라의 강통(江統)은 「주고(酒誥)」라는 책에서 “술
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상황(上皇 : 천지개벽과 함께 태어난 사람) 때부터이고
제녀(帝女) 때 성숙되었다”라고 적어 인류가 탄생하면서부터 술이 만들어졌음을 시사
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중국에서 처음 술을 빚기 시작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
인 황하문명 때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시기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주기(酒器
: 술을 발효시킬 때 사용하거나 술을 담아두던 용기)가 당시 필요한 용기의 26%나 되
었을 정도로 술은 이 시기에 일상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신화속의 술
이집트 신화에 의하면, 이시스 여신의 남편인 오시리스가 보리로 맥주를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디오니소스가 술의 시조라고 한다. 술을 가리켜 '박카스'라고
도 하는데, 이것은 나중에 디오니소스가 붙여진 이름이다. 디오니소스는 생후 6개월만
에 어머니 세멜레가 죽자 요정들의 정성으로 양육되었고, 트라키아 지방의 뉘사 산에
서 성장했다. 디오니소스는 이 산에서 숲속을 뛰어다니다가 포도를 발견하고 포도주를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고 한다.
뉘사산에서의 수업을 마치고 그리스로 돌아왔을 때, 아티카에 사는 이카리오스란 사람
이 그를 환대하였으므로 그에게 선물로 포도나무를 주고 포도주 담그는 법을 일러주었
다고 한다. 이카리오스는 기뻐하면서 그 신기한 포도주를 근처의 목동들에게 한잔씩
권했다. 맛이 좋아 많이 마신 목동들은 술에 취해 눈앞이 아찔아찔해지자 독약을 타
먹인 줄 알고 이카리오스를 죽이고 말았다. 최초로 술의 순교자가 된 셈이다. 지금도
그리스의 아티카에서는 '디오니소스제'라는 포도주제가 12월에 거행되고 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아담의 10대손 노아 시대에 큰 홍수가 있어 온 세계가 물에 잠겼
다고 한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 그 일족과 농작물을 싣고 아라랏산에 도착하여 생물
은 재출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속에는 포도의 씨도 들어 있어 하나님이 노아에게 포도의 재배법과 포도주 제조법
을 일러주었다고 한다.
예수도 가나안의 혼례에 스스로 술을 빚었으며, 최후의 만찬에선 제자와 함께 포도주
를 마셨다고 한다.
로마신화에 의하면 박카스가 처음으로 술을 빚었다고 해서 박카스를 술의 신이라고 한다.
인도신화에서는 소마신(蘇麻神)이 감로주를 처음 빚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마시면 고뇌
를 잊고 장수하며 또 죽은 사람을 부활시킨다고 한다.
우리의 단군신화에 의하면 단군께서 백성들에게 농사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가을에 햇곡이 나면 높은 산에 올라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햇곡으로 만든
술과 떡, 그리고 소를 잡아서 제물로 썼다고 한다.
이 제사를 신이 가르쳐 준 농사법에 의해서 지은 것이란 뜻에서 신농제(神農祭)라 했
으며, 소는 양념을 넣지 않고 국으로 끓여 참배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먹게 했다고 한
다. 먹을 때 소금만으로 간을 맞추어 먹게 했으며, 이국을 신농탕(神農湯)(설렁탕의
기원이란 설도 있음)이라고 했고, 햇곡으로 빚은 술을 신농주(神農酒)라 일컬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술인 막걸리라고 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2. 문헌상의 술
중국의 고서 전국책(戰國策:주나라 안왕에서부터 진시황 때까지 2백40여 년 간의 역사
를 기록한 책)에는 술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옛날 황제의 딸 의적이 술을 맛있게 만들어 우왕(하(夏)나라의 왕)에게 올렸더니
우왕이 이를 맛보고는 후세에 반드시 이 술로 나라를 망치는 자가있을 것이라고 말하
고는 술을 끊고 의적을 멀리 하였다."
이 글에서 보면 중국에는 하나라 때인 기원전 약 2천년대에 이미 술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중국의 문헌에는 우왕때에 제후를 소집하여 도산회(塗山會)라는 모임을 가졌을 때 특
히 단군의 자손을 초청했다는 것이 있는데, 이는 술을 매개로 정치적인 왕래가 있었음
을 시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헌에 최초로 등자안 것은 <고삼국사기>이다. 그 중 동명성왕의 건국담
속에 술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하백(河伯)의 세 딸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가 더위를 피해 청하(지금의
압록강)의 웅심연에서 놀고 있었다.
이때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세 처녀를 보고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신하를 시
켜 가까이하려고 하였으나 그녀들은 응하지 않았다. 그 뒤 해모수는 신하의 말을 듣고
새로 웅장한 궁전을 짓고 그녀들을 초청하였다. 초대에 응한 세 처녀가 술대접을 받
고 만취한 후 돌아가려 하자 해모수는 앞을 가로막고 하소연을 하였다. 세처녀가 놀라
달아났는데, 그 중 유화만이 해모수에게 잡혀 궁전에서 잠을 자게 되어 정이 들고 말
았다. 그 뒤 주몽을 낳게 되었다는 것이 동명성왕의 건국담이다.
이 신화를 통해 술이 아득한 예날 생성되었음은 알 수 있으나 술을 빚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 그밖에 재료나 방법에는 언급이 없어 어떠한 술이었는진 알 길이 없다
.
동양에서 술의 시조가 의적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이것이 한낱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설파한 사람이 이조 광해군 때의 학자 서유거다. 그는 그의 저서 <임원경제> 중
'주례총서(酒禮總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술의 기원으로 말하면 지금 이를 분명히 밝힐 도리는 없으나 글자가 생기기 이전에 이
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를 역사책에서 더듬어 보면 술의 기원에 대해 기술된
것이 있으나 근거가 희박해서 전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고증할 길조차 없어
어느것이 정말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고서에 기재된 것을 보면 술의 연유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보여진다.
1. 의적이 처음 술을 빚엇다는 것은 우왕 때의 일이며
2. <요주천종(堯酒千鍾)>에는 술을 요제(전설상의 황제) 때에 만들었다고 하며
3. <신농본초(神農本草)>의 술에 대한 대목에서는 황제 내경(전설상의 황제)이 술
을 다스렸다고 되어
있어 의적이 처음 술을 빚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으며
4. 다른 책에는 하늘에 주성(酒星)이 있으니 술을 빚는 것은 하늘이나 땅이 모두
같다고 하며
5. 두강(杜康)이 빚었다고 해서 두강주란 말이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일이란 지혜로운 사람이 먼저 시작한 것을 후세의 사람들이 흉내내어
계승하는 것이므로 술도 또한 어느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 수가 없는 것이
다.
옛 풍습에 음식을 먹을 때는 먼저 술로 제사를 지내 왔지만 누구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인지조차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도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글로 보아 중국에서 전해지는 술의 기원은 애매한 것이며 태고 적에 술이 만들어지
고 차차 개량되어 온 것으로밖에는 볼 수 없다는 견해인 것이다.
3. 우리술의 역사
술의 기원이 인류사회에서 민족의 형성과 더불어 원시생활 시대이래자연발생적으로 출
현하였던 을묘의 일종이라는 견해가 오늘날 지배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삼국사기(古三國史記)>에서 밝혀지고 잇는 바
와 같이 고구려를 세운 주몽 또는 동명성왕의 건국신화 가운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웅심연(熊心淵)가에서 하백의 딸 세 자매를 취하려 할 때, 미리 술을 마련해 놓고 이
것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수궁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세 처녀 중에서 큰딸 유화(
柳花)와 인연을 맺어 주몽을 낳게 하였다는 설이 있고 보면 우리나라의 술의기원 또한
신화 속에서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삼국 형성기에 이미 전래곡주(傳來穀酒)가 그 바탕을 이루어 예,부여,진한,마한 사회
를 비롯하여 고구려에서 제천, 영고, 제귀신 동맹등 제행사(諸行事)에서 주야음주가무
(晝夜飮酒歌舞)한 바 있었고 특히 고구려에서는 건국 초기(A.D.28년)에 지주(旨酒)를
만들어 한나라의 요동태수를 물리치는 등 주조기술이 뛰어나 중국인들 사이에 자청선
장양(自菁善藏釀)하는 나라로 주목을 받은 바도 있엇다.
이때에 이미 우리나라는 주국(酒麴)과 맥아(麥芽)로 술빚는 방법을 익히고 잇엇고, 이
주국을 이용하여 곡주를 빚는 기술을 일본 응신 천황때에 백제의 인번등을 통하여 우
리나라의 주조기술이 일본에 이전되엇던 까닭에 후세에 가서 주신으로 추앙을 받은 사
례가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에서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후기에는 백제의 주조기술이 중국과 대등할 정도로 발전을 보아 <주서(周書)
>에는 주(酒) 예문화(醴文化:감주문화)가 중국과 대등하였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었
고, 이에 따라 주국을 이용하여 청주/탁주가 빚어지고 또 맥아 또는 주국을 이용한 감
주가 빚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시기에는 신라 청주를 비롯하여 고구려 청주가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의 고하주를 낳게 하였거나 당대의 문사들 사이에서 애상(愛賞)되고 있었다.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오면 곡주류의 여러 주품들이 개발되기 시작하엿고 상류사회에서
는 청주류가 성행되고 있었으며 술은 간장, 된장, 젓갈등과 함께 기본 폐백음식으로
이용되고 있엇을 뿐 아니라 그밖에 고등발효식품들과 함께 양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고려시대로 내려오면 전래의 곡주류 양조법은 그 정착차원을 넘어서 전기(前期)중에
청주류, 탁주류, 중양주류, 재주류(막걸리), 감주류등의 전통적인 주류의 양조기술은
더욱 심화되었고, 과실류등을 혼양하는 혼양주조법이 새로 개발됨과 동시에 약재를 혼
양한 약용혼양주조법도 아울러 자리를 잡고 있었고, 재제주류(再製酒類)에 속하는 자
주류(煮酒類) 양조기술 또한 정착을 보고 있다. 주국(酒麴)의 종류도 다양화되고 전래
의 소맥국(小麥麴) 위주에서 미국(米麴)이 병행되고 있었으며, 미국을 이용한 특별한
술로는 이화주(梨花酒)가 정착되고 있었다.
곡주양조법을 바탕으로 하는 양조기술이 고급화됨에 따라 주조사상 주목할 일은 조선
조까지 전해지고 있었던 유명주품의 명칭이 고려조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고급 청주류로 황금주(黃金酒), 벽향주, 삼해주(三亥酒), 유하주(流霞酒),
춘주(春酒), 녹파주(綠波酒), 구하주(九霞酒)등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청주의 대표로
알려져 왔던 방문주(方文酒:일명 백하주(百霞酒))가 이때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고,
조정에서는 특급 청주류인 청법주(淸法酒)와 선온주가 보편화되고 있었다.
또한 삼중양조법을 바탕으로 한 삼해주, 춘주 등의 개발은 양조기술의 고도화에 따른
소산물의 하나였다.
탁주류 가운데서도 우리나라 고유의 특급탁주로 내외에 알려졌던 이화주(梨花酒)도 이
때에 정착을 본 것이며, 혼탁주류에 속하는 부의주, 녹의주 또한 고려조에서부터 그
맥이 이어진 것이었다. 양용혼양주로 이름난 계주(桂酒), 두주(杜酒), 초주(椒酒), 초
백주(椒栢酒), 창포주(菖蒲酒), 애주(艾酒)등이 또한 이때에 자리잡은 술들이고 과실
및 화엽입주법(花葉入酒法)을 바탕으로 한 혼양주로는 국화주(菊花酒), 죽엽주(竹葉酒
), 백자주(栢子酒), 송주(松酒), 오가피주(五加皮酒)를 비롯하여 포도주가 있었다. 그
밖에도 중탕법을 새로 도입하여 재제주류인 자주류(煮酒類) 또한 고려조에서 비롯된
것들의 하나이다.
고려시대가 마침 곡주양주문화의 성숙기를 맞이하였던 것은 국내적으론 양조기술의 축
적의 결과라 할 수 있었겠지만 또 하나의 중요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는 것은 국내적으
로 안정세가 유지되고 있었던 반면에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대외적인 교섭이 활발해진
것도 그 원인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고려시대 전기중에 유입된 외래주만 보더라도 북방계민족으로부터는 중산주(
中山酒)를 비롯한 행인자법주(杏仁煮法酒), 계향어주(桂香御酒) 등 유명 청주 및 약용
자주가 유입되고 있었고, 멀리 남만사회로부터는 화주(花酒)란 과실주문화가 흘러오고
있었다.
이와같이 대외주의 접촉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고려조 후기로 접어들면 이와같은 움직
임은 더욱 확산되어 몽고와의 접촉을 통하여 마유주문화를 접수하였고, 중국 원나라를
거쳐 멀리 서역사회의 포도주문화를 수용하기에 이르렀으며, 중국으로부터는 계속 특
급 청주류인 상존주(上尊酒), 백주(白酒)등이 유입되고 있었다.
이와같은 움직임 속에서 우리나라 주류사상 중요한계기가 되었던 것은 증류주문화가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고려말엽에 유입된 증류주문화의 유입경로를 보면 아라기주문화가 몽고 또는 대식상인
을 통하여 충렬왕 초기중에 유입하였고, 뒤이어 원나라와의 교섭이 활발해지는 동안
중국에서 창시된 소주문화가 흘러 들어왔다.
이들 증류주문화가 유입되자마자 곧바로 이 땅에 증류주문화가 개화되었고 증류주문화
는 정착과 동시에 그뵤속도로 발전하여 증류법을 바탕으로 한 노주(露酒)가 탄생하였
고, 이 증류법을 바탕으로 한 재제주류 또한 속속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개발된 것 중 일차증류주로는 노주와 함께 홍로(紅酒)가 있었고 고차증류주로
는 감홍로(甘紅露) 등이 있었다.
마침내 고려사회에서는 전래의 양조곡주문화에 증류주문화를 추가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고려사회는 양대주류문화권을 완성함으로써 우리나라 전래의 주품들의 틀이 이
때에 이루어져 그 틀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조선시대로 내려와서도 고려시대까지 마련되었던 주품들의 틀 그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전기중에는 양조기술면에서 점차 고급화하는 경향이 뚜렷하여져 상류사회에서는 중양
주법을 존중하는 한편 양조원료에 있어서도 갱미(粳米) 위주에서 점미(粘米)로의 전환
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때의 우량주로 손꼽던 주품으로는 삼해주를 비롯하여 백하주, 이화주, 백자주, 호도
주(胡桃酒), 하향주, 청감주(淸甘酒), 자주(煮酒), 국화주등이 있었다.
특히 고려시대 말엽에 와서 정착되었던 증류주는 조선조에 들어서서 급속도로 파급되
어 세종대를 중심으로 노주문화는 점차 국제화 단계로 발전하여 일본, 중국 등으로 소
주의 수출과 함께 기술이전이 병행되고 잇었다.
조선조 후기로 접어들면서는 지방주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비전(秘傳)되고 있었던 지방
주품들이 노춝되기 시작하였고, 이때의 유명주 대열데 등록되어 있었던 주품중에는 호
산춘, 약산춘(藥山春 서울), 노산춘(魯山春 충청), 벽향주(碧香酒) 평안) 등을 손꼽을
수 있다.
특히 전기까지의 국제화 관계로 치닫고 있었던 증류주는 고급양조주의 술덧까지 소주
로 전용되는 기현상을 빚어 서울 공덕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삼해주 술도가에서는 이들
삼해주를 모조리 소주로 고아 내는 술덧으로 애용하였다 하니 증류주에 대한 기호적
변화를 짐작할 만하다.
이와같이 조선조 후기에 증류법을 이용한 주류 개발의 전성기를 맞이함에 따라 우리나
라 주류의 구성도 크게 변화되었고, 이때의 주품들을 유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순일차증류소주로 점미로주(粘米露酒), 갱미로주(粳米露酒), 소맥(小麥)소주, 대맥(大
麥)소주, 교맥(蕎麥)소주, 감자(甘蔗)소주, 면말(麵末)소주 등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환소주류라 하여 고차증류한 주로는 감홍로(평양), 계당주(평양)가 유명하였다.
각색(各色)소주류라 하여 착색물료를 곁들여 고아낸 소주류 가운데는 홍로(홍소주),
황로, 갈로류(褐露類)들이 또한 유명주 개열에 끼여 있었다.
자주류라 하여 고려시대까지만 하여도 곡주양조류에 채소 등을 넣고 중탕하던 방법이
이때에 이르러 그 바탕이 소주로 전환되었고 이름난 것만 추려도 죽력고(竹瀝膏), 이
강고(梨薑膏 전라,황해) 등이 있었다.
재제주류 역시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곡주양조에 혼용하였던 사례가 이때에 와서는 노
주(露酒)로 뒤바뀌었고, 그 가운데서 알려졌던 주품으로는 장미로(薔薇露), 매화로,
감귤로, 이로(梨露), 박하로(薄荷露), 감국로(甘菊露), 생강로(生薑露), 산사로(山査
露), 인삼로 등이 있었으며 각색(色) 각향(香)이 어우러진 주품들을 선조들은 만끽하
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유명 풍미물료가 총동원되는, 이를테면 서구사회의 재제주류를 무색케 하
는 지혜를 우리 선조들은 간직하고 있었다.
합주(合酒) 또는 혼용주류라 하여 양조용수 대신으로소주를 이용하였던 주품 가운데는
과하주(過夏酒)와 송순주(松筍酒)가 유명하였으며 특히 과하주의 고장으로 서울이 알
려져 있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조선조 후기까지에 발전을 보았던 증류주를 바탕으로 한 주품들이 오늘날에
는 어찌되었는지 궁금하거니와 증류주의 음용(飮用)이 성행되었던 조선조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듯 색다른 일화도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고추가 유입된 직
후에 소주맛만도 강렬한 터에 한때 소주에다 고춧가루를 타서 마시는 버릇이 성행되었
고 이로 인하여 죽거나 병을 앓게 된 사람도 상당히 있었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대응방법으로 본초학 분야에서는 소주독을 다루는 처방과 함께 술에
취하지 않는 방법, 또한 술을 빨리 깨게 하는 처방들이 나타났음은 물론이거니와 소주
의 음용법이 등장하게 되었다.
소주를 한잔 마시고 냉수를 한잔 마시는 방법, 또 소주에 얼음을 넣거나 꿀을 타서 마
시는 등 오늘날의 서구사회의 칵테일 방식을 무색케 하는 처방이 가사서에서 속출하였
다.
그뿐 아니라 정다산(丁茶山) 같은 사람은 전국의 소주고리(古里)를 모조리 거두어들이
기를 조정에 청하였고, 이익 같은 분은 큰 소주도가에서 소비하는 양곡만도 일년의 비
용이 수천 두에 달하고 있고 이것은 빈호 10년의 양식에 해당한다 하여 한탄하기도 하
였다.
그런가 하면 전라, 황해의 이강고와 같은 자주류는 고종 19년 2월에 있었던 한미통산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대표한 전권대사(슈펠트)와 청국사신이 합석한 만찬
의 자리에서 우리나라 쪽에서 내놓은 음식으로 전복, 백자(栢子), 구기자차, 약반(藥
飯), 조악(助岳), 정과(正果), 원소병(圓小餠), 다식등과 함께 동참되고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 음식물에 매혹당했던 일들은 이강고와 같은 전통주가 있었고, 또한 자랑할
줄 아는 주체의식이 있었던 사건이 아닌가 한다.
이와같이 증류주류가 성행되는 가운데서도 한말까지 증류주류와 함께 양조곡주류의 뿌
리는 계속 이어졌고 서민사회에서는 상대(上代) 이래 전승을 거듭하였^던 속성 재주(
막걸리)가 보편화되고 있었지만, 한말에 이르러 개항과 함께 강대국과의 통상협정이
체결되면서 우리나라에는 새로운 외래주의 물결이 물밀듯이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유입된 외래주를 간추려 보아도 중국계로는 홍여주(紅與酒)를 비롯하여 재제주
류에 속하는 매혼로(梅魂露), 사국공(史國公), 오가피(五加皮), 이화백(梨花白), 죽엽
청(竹葉靑), 포도춘(葡萄春) 등이 주종이고, 일본주로는 왜백주(倭白酒), 왜례주(倭禮
酒) 등이 있었고, 독일계로는 적포도주, 앵주(櫻酒) 등이고, 서반아계의 셰리(SHERRY)
, 불란서로는 샴페인 등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한말사회는 마치 다국적주가 공존하기 시작하는 때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 이런 상황변화 속에서도 전래주는 그 맥을 이어왔지만, 주조기술의 국제화를 예견하
였던지 조선조 말기 서유규, 이규경, 최한기 등은 중국계의 유명주를 집중적으로 분석
, 주국의 개선 양조기술의 개량 등 우리나라 전통주의 나아갈 바를 암시적으로 제시하
는 등의 노력이 끊임없이 한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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