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미국 제 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Herbert Clark Hoover) 평가

올드코난 2017. 1. 31. 12:31
반응형

허버트 클라크 후버(Herbert Clark Hoover, 1874년 8월 10일 ~ 1964년 10월 20일)는 미국의 31대 대통령으로 박애주의자였고 많은 이들이 기대속에 취임했지만 대공황이 터지며 미국인들게 큰 비난을 받는 대통령으로 남게 된다. 정리해 본다.


1. 초기생애

1874년 8월 10일 아이오와 주 웨스트 브랜치에서 출생했는데 미시시피 강 서부에서 태어난 첫 대통령이었다. 9살에 고아가 되어 1885년 오리건 주의 퀘어커 교도였던 삼촌과 함께 살았다. 그의 삼촌이 교장으로 있던 작은 퀘이커 학교 Friends Pacific Academy에서 교육을 받았다. 1888년 삼촌이 오리건 주의 세일럼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하자 후버도 거기서 일했다. 경영 대학원에서 대수학과 기하학을 공부했다. 1891년 스탠포드 대학교에 입학 광산공학을 전공하고 1895년 졸업한다. 1899년부터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를 10년간 여행했고 1909년 중국에서 돌아온 후 광산업으로 크게 성공해 30대에 큰 부자가 된다.. 뛰어난 행정가이며 위대한 기술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2. 정치

40세이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런던에 있었던 후버는 연합국 구제활동의 책임자로 발탁되고 벨기에 구제위원회 의장직을 맡아 전쟁 중 대규모의 식량분배 계획을 관리하고 활발한 구호활동을 펼쳤고 구호자금을 모집하는 일을 담당했다. 1917년 4월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자 미국 식량청 청장이 되어 미국의 식량 생산을 촉진하고 분배하는 일을 하다 1918년 다시 유럽으로 가 사재까지 털어가며 구호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위대한 인도주의자로 칭송받게 된다.

종전후인 1920년 워런 하딩의 공화당 행정부에서 상무장관이 되었고 세인트로렌스 해로를 개척하고 당시 최대 규모 댐 공사인 볼더 댐(후버 댐) 공사를 지휘했다. 건설 경제 행정 등 뛰어난 능력을 보인 후버는 캘빈 쿨리지 행정부에서도 중용된다.


3. 대통령 취임과 대공황

1928년 대선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고 상대 후보 민주당의 앨 스미스를 상대로 선거인단 444 득표수 21,437,277표를 획득(스미스는 선거인단 87, 득표수 15,007,698표 기록)해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때 내건 선거 슬로건이 유명한데 "A chicken in every pot, a car in every garage!(모든 냄비에 닭고기를, 모든 차고에 자가용을!)" 내걸어 큰 방향을 일으켰고, 미국 시민들에게 엄청난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고 언론들 역시 찬사를 쏟으며 대단한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극찬을 받으며 1929년 3월4일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7개월만인 그해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 대폭락 (검은 목요일)으로로 촉발된 경제공황이 발발한다. 그해 12월에만 실업자가 100만명으로 늘어났다고 하면 임기 3년차에 미국 전체 노동인구 1/4인 1300만명이 실업자라는 최악의 상황이 된다. 굶주린 노동자들은 집에서도 쫓겨나고 이들이 세운 판자촌은 ‘후버촌’이라고 부르는 등 후버에 대한 미국인들의 분노와 실망은 매우 컸다. 여기에 1차대선 참전 군인들의 1932년 연금 보너스 지급을 요청하며 워싱턴 시위를 일으켰는데, 더글라스 맥아더(우리가 아는)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키자 여론은 후버에게서 완전히 떠나 버렸다. 대담한 정책들을 내놓지만 경제는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메 후보 정책의 문제는 기업 회생을 바탕으로 둔 것이지 민생을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후버는 국가가 국민을 돕는게 미국 개척 정신에 어긋난다는 말을 했는데 이런 사고가 문제였다. 모든 사람들이 후보처럼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후보는 몰랐던 것이다. 결국 1932년 선거에서는 뉴딜정책을 공약으로 내건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패하며 재선에 실패하게 된다.


4. 말년

퇴임후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정책을 비난하고, 대공황에 대해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고 정당성을 주장하며 살다 1964년 10월 20일 91세로 사망했다.


5. 평가

후버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유능하고 일찍 성공한 자들 중에는 독선과 자만심이 있는 법인데, 후버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후보는 위기 상황에서는 맞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가 사업에 성공한 배경도 당시 국가 차원에서 기업들에게 엄청난 혜택과 규제 완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경영 능력은 있었지만 큰 시련을 겪을 정도로 어려운 일을 겪지는 않았던 사람이다. 자신의 성공을 자신의 능력때문만이라고 자만했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세계대공황은 분명 그의 책임만은 아니다. 미국 사회에 수십년간 누적된 문제점들인 대기업의 시장독점과 부패한 공직자와 공무원들과 빈부차별 등이 한순간에 터져나온 것이다. 하지만 후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미국 경제가 심각해지고 공황이 발생할 것 같은 징후들이 드러났지만 후버는 이를 무시했다는 점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무시하고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고 미국경제의 기초는 튼튼하다고 주장하며 별것 아니라는 입장을 취했고 이는 심각한 오판이었던 것이다. 흙수저 출신에 성공한 30대 부자에 인도주의자 등 능력과 인품이 있다는 칭찬을 너무 많이 받았던 것일까. 환호를 받으며 취임해 손가락질을 받으며 퇴임한 후버를 보면 성공하고 있을 때 더 조심해야 한다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말을 되새기게 한다. 이런 후버에게서 이명박 대통령과 여러면이 겹친다.


6. 일화

젊은 시절 10년간 세계를 누비고 다녔는데, 호주에서 그의 아내 루 헨리 후버에게도 전보로 청혼을 했다고 한다. 차가운 이미지였는데 부드럽게 하기 위해 사진을 공개한 애견 킹 투트(King Tut, 저먼 셰퍼드)의 이름은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에서 따 온 이름이다. 후버 부부는 대화를 나눌때 영어가 아니라 중국어로 대화했는데 자신들의 말을 누가 듣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재임시절 후버와 부인은 백악관 직원들과 대하는 것을 매우 싫어해 말 대신 수신호를 했을 정도였고 백악관 직원들이 대통령 내외를 마주치면 피하거나 숨었다고 전한다.

경제대공황과 잇다른 정책의 실패로 시민들은 “후버! 후버가 다 망쳐놓았다!”고 외쳤다.취미가 낚시여서 낚시에 대한 말을 많이 했고 낚시에 대한 책도 냈다고.

미국 최대의 댐 후버 댐(높이 221m, 저수량 320억m^3)은 그가 재임 중이던 1931년 공사를 시작해 1936년 완공되었는데 원래 이름은 '볼더 댐'으로 1949년 후버댐으로 바뀌었는데 당시 네바다의 라스베이거스나 LA의 발전은 모두 이 댐 덕분이어서 후버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