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미국 제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주니어 (Theodore Roosevelt. Jr) 평가

올드코난 2017. 1. 30.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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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루즈벨트 주니어 (Theodore Roosevelt. Jr. 1858년 10월 27일 - 1919년 1월 6일)는 미국 25번째 부통령(1901년)이며 26대 대통령(1901년-1909년)으로 테디 루스벨트(Teddy Roosevelt), 테오도어, 테오도르 루스벨트라고도 부르는데 곰사냥에서 다치고 초라한 암컷 곰을 사냥하지 않고 풀어준 일로 테디 베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의 삼촌이며 미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였다. 미국인들에게 늘 인기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대해 정리해 본다.


1. 가계

1858년 10월 27일 뉴욕 변호사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니어(Theodore Roosevelt, Sr. 1831–1878)와 마사 불럭(Martha Bulloch, 1835 - 1884)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상은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뉴암스테르담의 지주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Klaes van Rosenvelt)였다. 어머니 마사는 프랑스의 칼뱅파 신교도인 위그노 신자였으며, 스코틀랜드인과 프랑스인, 아일랜드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 여성으로 조지아 주 출신이었다. 뉴욕 주 출신 시어도어 시니어를 만나 뉴욕 주로 건너왔다. 시어도어에게는 여러 형제가 있었는데 위로 누나인 안나와 남동생 엘리엇, 여동생 코린 등이 있고 남동생 엘리엇 루스벨트는 1894년 34세의 나이에 사망하는데 조카딸 엘리너 루스벨트는 32대 대통령 프랭클린의 아내가 된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와는 숙부, 조카 사이로 알려져 있지만 클라에스 판 로세펠트의 아들 니콜러스 루스벨트가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의 6대조 할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은 먼 친척 형제뻘이다. 시어도어의 5대조 요한 루스벨트는 공화당 당원이었지만 그의 형제였던 프랭클린의 5대조 야곱 루스벨트와 그의 후손들은 민주당원이었다.


2. 초기생애

어릴 때 몸이 약해 간질과 발작, 폐렴, 천식 등 잔병치레가 심하였다. 아버지 시어도어 시니어는 병약한 아들이 발작을 하면 데리고 함께 마라톤도 하고, 아들을 마차에 싣고 직접 말을 몰아 마을을 한바퀴 돌기도 했는데 이런 영향으로 평생 운동을 통해 강한 체력을 길렀고 정력적인 활동을 하게 된 이유가 된다.

반면 몸이 약했던 아버지는 컬럼비아 로스쿨에 재학할 무렵 47세로 사망한다. 아버지는 그에게 늘 편지를 썼고, 임종 직전의 한 편지에서는 '내가 너를 만나서 아버지가 되었던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모른단다.'라는 말을 남겼다. 위그노 교도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가정교사에게 배우고 지역의 고등학교를 거쳐 하버드 대학교로 진학했다. 하버드 재학 시절 그는 대학의 럭비 등 운동부 선수로도 활동했다. 1880년 하버드 대학을 마그나 쿰 라우데 급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컬럼비아 로스쿨에 진학했지만 법률 공부 보다는 역사와 정치에 매료되어 도중에 중퇴했다. 이 시기 컬럼비아 로스쿨 1학년 재학 중 보스턴 출신의 앨리스 해서웨이 리와 만나 사귀다가 그 해 결혼했다. 1884년 첫 부인 앨리스 해서웨이가 사망하고 에디스 커밋 캐로와 재혼해 뉴욕 주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만에 정착하여 계속 같이 살았다.


3.정치

1882년 24세에 공화당 소속으로 뉴욕 주 하원 의원이 된 뒤 타락한 파벌정치에 저항하고 소신있는 행동으로 명성을 얻었다. 어머니와 아내의 연이은 죽음으로 시골에 내려가 다코타 준주(準州)에서 집안 목장을 경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1889년 다시 정치 활동을 재개한다.

37세인 1895년 당시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에 의해서 공화당 소속 인사임에도 뉴욕 주 경찰청장에 임명되었고, 뉴욕 주 인사위원회 위원과 주 경찰청장으로 지내면서 개혁운동을 재개했다. 뉴욕 주 경찰청장으로 정치인의 부패를 적발, 성역을 가리지 않고 처벌, 숙청하여 명성을 얻었다. 1895년 선거에 당선된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취임 초에는 미국 국방부 해군담당 차관보로 발탁되었다. 이오 매킨리 정부 초 미국-에스파냐 전쟁이 일어나자, 시어도어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강력히 주장했고 1898년 전쟁이 선포되자 국방부 해군담당 차관보 직을 사퇴하여 '사나운 기마자(Rough Rider)라는 별명을 가진 민병대 제1의용기병대를 조직해 민병대를 이끌고 쿠바로 건너가 케틀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산티아고 전투에서 스페인과 쿠바인 연합군을 크게 격파하여 대승으로 이끌고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전쟁터에 아들과 함께 출전해 아들이 전사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후 그해 12월 시어도어는 뉴욕 주지사에 출마해 당선된다. 뉴욕 주지사로 재임기간 동안 부패하고 무능한 공직자들을 해임한다. 1900년 재선에 도전하는 매킨리의 부통령 후보가 되고 매킨리가 재선에 성공하자 부통령이 된다.


4. 대통령

대통령 매킨리의 암살로 사망하고 1901년 9월 14일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제26대 대통령이 된다. 취임 당시 그의 나이가 42세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연소다.

혁신주의를 내걸고 소수 기업의 독과점 철폐, 철도 운영의 국가 통제, 재벌과 노조 간 중재 및 국가의 적극 개입, 노동자 보호입법과 동시에 노조의 폭력에 대해서는 강력 대응하고 자원보존 등의 정책을 펼쳤다. 대기업과 노동조합 사이의 장기간 갈등을 겨우 종식시키고 바로 대통령 및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여 기업과 노조를 동시에 통제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베네수엘라 문제, 카리브 해 문제에 개입했고 열강의 남아메리카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남아메리카를 관리하기도 했다. 그 밖에 아시아와 유럽 문제에 개입했다. 1904년부터 파나마 운하 건설을 추진하였다. 1904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앨턴 파커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재선 후 루스벨트는 의회에 주간 철도운임을 규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한을 요구했다. 1905년부터 시작된 2기 임기인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자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포츠머스 조약)을 주선하고 모로코 문제의 해결을 알선해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06년에 '헵번 법'을 제정, 주간 통상규제위원회(ICC)에 최고운임 설정기능을 부여하여 철도 운임 요금을 조절하게 하였다. 한편 미국 국내 출산율이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것에 대해 '인류 자살' 추방운동을 펼치고 출산 장려 정책을 펼쳤고 개인주의자와 독신자들에 대한 맹비난했고 환경 운동가, 환경보호론자들에 대한 비난을 퍼부었고 정부간행물 인쇄업자와 관공서에 지시하여 간소화된 영문 철자법을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그의 발언과 조치들은 연방 전체의 논쟁거리로 발전되었다. 루즈벨트는 친구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후계자로 선정했고 루즈벨트의 지지로 태프트는 쉽게 대통령에 당선이 된다.


5. 테디 베어 유래

대통령 임기중인 1902년 미시시피로 곰 사냥을 갔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새끼 곰을 발견했는데, 아직은 어린 곰을 사냥할 수 없다며 그냥 돌아온 일이 있었는데, 클리퍼드 베리먼 기자가 이걸 워싱턴포스터지에 삽화와 함께 실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별명이 ‘테디’였고, 뉴욕의 장난감 가게 주인 모리스 미첨이 전시한 인형에 ‘테디’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지금도 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곰인형 테디 베어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블로그 올드코난 갈대의 지혜와 나무의 의지를 갖고 글을 쓰겠습니다. 



6. 퇴임후

1909년 3월 퇴임과 동시에 10개월 동안 아프리카와 유럽을 여행하고 1910년 1월에 돌아왔다. 문제는 최측근이자 친구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당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자신의 정책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가자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다. 태프트와의 갈등으로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내 경선에 뛰어들지만 태프트에게 패하한다. 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공화당을 탈당하고 진보당을 창당해서 본인이 직접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공화당이 분열, 정치 신인이었던 민주당 후보 우드로 윌슨이 당선되고 만다. 1912년 선거 운동 중 독일 출신 이민자 존 슈랭크의 총에 맞았으나 주머니에 있던 연설문 종이뭉치와 안경집, 십자가 목걸이 덕에 목숨을 건졌다. 19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직후 잠시 요양하다가 브라질 밀림을 탐험하고 저술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미국이 참전해야 함을 역설하였고 직접 자신이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로 지원병 사단을 이끌고 출전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안을 윌슨이 거절, 동시에 맹비판을 가하자 윌슨에 대한 적개심을 품기도 했다. 그 대신 그는 자신의 아들들을 참전시켰다. 그 중 막내아들 쿠엔틴 루스벨트는 프랑스에서 전사했다. 1916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를 간절히 희망하였고 교섭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1918년 윌슨이 제1차 세계 대전을 종결시키기 위한 단안으로 국제연맹안을 발표하자 시어도어는 이를 강하게 반대했다. 대통령 재직 시절부터 평화유지를 위한 국제조직을 지지했던 루스벨트는 윌슨의 국제연맹안에는 완강히 반대했다. 1920년 대통령 선거 2년 전인 1918년에 다시 도전하여 러닝메이트로 워런 하딩을 지명하였다. 1918년 10월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다가 6주만에 퇴원하고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선 출마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7. 최후

1920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 전인 1919년 1월 6일 루스벨트는 전 날 뉴욕 주 오이스터 만 근처 오이스터 베이의 사가모어 힐의 자택에서 몇 편의 글을 쓴 뒤 잠을 자다 다음날 새벽 4시경 정맥에서 분리된 응고된 혈액이 폐로 유입됨에 따라 수면중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잠들기 전 하인인 제임스에게 "불 좀 꺼 줘 제임스" 였다고. 향년 60세. 미국 뉴욕 주의 미국 자연사박물관 앞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동상이 세워졌다. 미국 러시모어 산의 역대 대통령들 기념 석상 조각을 할 때 세 번째로 그의 얼굴이 새겨졌다. 저서로 《미국과 세계 전쟁》 등이 있다.


8. 평가

러일전쟁을 종식시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는데, 미국인으로서 미국 대통령 중으로서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었다.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을 세웠고, 셔먼 독점금지법으로 대기업들의 트러스트 폐해를 막았다. ‘자본주의가 도를 넘어 거대기업의 횡포조차 감시, 관리하지 못하면 미국에도 공산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순위에서 링컨, 워싱턴과 더불어 탑3에 자주 들어가는 인기있는 대통령이다. 늘 앞에 서고 주인공이 되기를 바랬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대해 그를 잘 아는 사람은 “결혼식에서는 신랑, 장례식장에서는 죽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관객 보다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고, 정렬적이었던 루즈벨트는 지금도 미국인들에게 많은 사랑과 이야기 거리를 남긴 대통령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대해서는 자료가 방대해 차후 그의 일대기를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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