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미국 제 22대, 24대 대통령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올드코난 2017. 1. 29.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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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1837년 3월 18일 - 1908년 6월 24일)는 미국의 22대 (1885년-1889년)와 24대(1893년-1897년) 대통령으로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연속이 아닌 건너뛰기 임기도 2번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남북전쟁 이후인 1885년부터 1912년 우드로 윌슨이 당선될때까지 공화당이 득세 하던 시대 유일한 민주당 대통령이었다. 미국 대통령 중 두 번째로 뚱뚱한 사람으로 가장 뚱뚱한 대통령 1위는 175kg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2위가 125kg의 클리블랜드였다.


1. 초기 생애

클리브랜드는 1837년 3월 18일 뉴저지 주 콜드웰의 장로교 목사 가정에서 9남매 중 5째로 태어났다. 어려서 자주 이사를 가야만 했고 16세에 아버지를 잃고 학업을 포기하고 일을 해야했지만 독학으로 변호사가 된다. 1870년 뉴욕 주 이리 카운티의 군 보안관으로 당선되고 이 기간 2건 이상의 교수형을 집행해 ‘버펄로 교수형 집행인’이라고 비난 받았고 이에 대해 클리브랜드는 사형 집행에 관한 책임을 부하들에게 떠넘기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2. 정치

44세가 되던 해 부유층 중심의 공화당 대신 서민 중심의 민주당에 입당하고 정직과 소신있는 행보를 보여 소신있는 정치인으로 많은 시민들에게 큰 기대를 갖게 만든다. 1881년 "공공기관은 공공의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며 유권자들을 설득해 버펄로 시장에 당선되고 1882년 뉴저지 주지사로 당선된다.


3. 22대 대통령

클리블랜드는 개혁적 이미지, 정직하고 소신있는 행동, 중도 정치인으로 민주당 지지자들과 개혁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의 지지를 받아 1884년 공화당 후보 제임스 G. 블레인을 누르고 22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1860년 이후 24년만에 공화당 아닌 정당 출신이 당선된 것이다. 당시 선거운동은 네거티브 전이었는데 클리블랜드의 정직한 이미지를 깎아내리기 위해 변호사 시절 사생아를 낳았다며 "엄마, 엄마, 아빠 어디있어요?"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클리블랜드는 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그 사생아(오스카 폴섬 클리블랜드)의 엄마라고 주장하던 마리아 크로프트 할핀에게 양육비를 지원했다. 이유는 할핀은 그 아기를 낳을 당시 클리블랜드의 동료 변호사이자 조언자였던 오스카 폴섬을 포함한 여러 남자와 관계되어 있었지만 클리블랜드는 자신이 할핀의 남자들 중 유일한 미혼 남성이었으므로 책임을 져야한다고 믿었기때문이라고 한다.

가장 큰 논란은 가정 형편으로 남북전쟁에 참전하지 못해 병역기피자라는 비난이었다. 다행히 경쟁 후보 블레인 역시 군대를 가지 않았기에 공화당은 클리블랜드에 대해 끝까지 공격을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1886년 6월, 클리블랜드는 동료 변호사였던 오스카 폴섬이 1875년에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가족을 돌보고 재산을 관리하던 중 오스카 폴섬의 딸 프랜시스 폴섬과 연인이 되어 1885년에 청혼을 하여 백악관에서 결혼한다. 클리블랜드는 대통령 때 결혼한 두 번째 대통령이며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린 유일한 대통령이며 부인 프랜시스 폴섬은 역대 영부인 중 21세로 가장 어렸고 나이 차가 27세로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의 나이 차 중 가장 컸다.

클리블랜드는 부패척결을 외쳤고 특별 계층에 대한 연방 정부의 지원을 거부하고 남북전쟁 참전 용사들의 연금에 대해 부당한 이득을 얻는 것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고 철도 산업을 규제하는 등 이득집단을 위한 법에 대해 거부했다.


3. 24대 대통령

클리블랜드는 1888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다. 공화당 후보 벤저민 해리슨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뒤진 것이다. 1889년 클리블랜드의 부인인 프랜시스 폴섬은 백악관을 떠날 때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백악관 가구와 장식들을 지금처럼 잘 보존해두세요. 나중에 우린 다시 돌아올테니까요. 지금부터 4년 후에.. 대략 1460일 후에 우린 돌아올 겁니다. 4년후 1892년 24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며 연속이 아닌 임기를 건너뛰어 대통령을 두번 역임한 유일한 대통령이 된다.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시기는 공직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고, 의회가 권력을 장악하던 시기였다. 여기에 대통령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893년 공황으로 심각한 경제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많은 은행들이 도산했고 국고가 바닥나고 있었다. 이에 JP모건 등 은행에 돈을 빌리며 은행의 꼭두각시라는 비난도 받게 된다. 1894년 6월에 일어난 풀먼 파업 사건은 미국의 승객·화물·우편 수송망을 마비시키고 시카고와 20개의 철도 중심지에 연방군을 보내 파업을 강제로 해산시킨다. 1895년에 그는 먼로 독트린을 이용 대영제국과 베네수엘라의 국경분쟁을 종식시켰다. 이 외도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의 2번째 임기는 불황과 파업 그리고 의회와의 싸움이었다.


4. 말년

퇴임 후 클리블랜드는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으로 이주해 프린스턴 대학교의 이사로 일했다. 학교 회장이었던 우드로 윌슨과 마찰을 빚었는데 1856년부터 1932년까지 민주당에선 단 두 명의 대통령만을 배출했는데 그 중 한 명은 클리블랜드였고 다른 한 명은 우드로 윌슨이었다. 클리블랜드는 1908년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향년 71세. 나소 장로교회 소유의 프린스턴 묘지에 묻혔다.


5.평가

역사학자들은 링컨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사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유능한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한다.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소신과 신념이 강한 인물이지만 보수적이고 구식이어서 융통성이 부족했다는 비판 또한 많이 받고 있다. 정부가 경제에 간섭을 반대한 시장자유주의자였고 국가가 가난한 국민을 돕는 것에 반대하고 오히려 국민이 국가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이는 훗날 존 F 케네디가 이어 받는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 노동자들 보다는 부자들을 위한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며 가진 것이 없는 자들에게 국가를 위해 희생하라는 것과 같다. 노동자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하며 클리블랜드 시기에 강렬한 노동투쟁이 발생하던 것도 이때문이었다. 클리블랜드과 이 당시 민주당이 부유층에 맞섰다는 것은 편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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