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연설만 잘했던 미국 제 23대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 6세 (Benjamin Harrison VI) 평가

올드코난 2017. 1. 2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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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해리슨 6세(Benjamin Harrison VI, 1833년 8월 20일 ~ 1901년 3월 13일)은 미국의 23대 대통령(1889~93)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헨리 해리슨의 증손자이며, 제9대 해리슨 대통령의 손자다. 보호 관세 정책과 내정 개혁 문제를 실시했다.


1.생애 초기

벤저민 해리슨 6세는 명문정치가문 해리슨 집안 사람으로 오하이오 주 노스 벤드에 있는 할아버지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농장집에서 태어났다. 존 스콧 해리슨과 엘리자베스 어윈 해리슨의 10명의 자식 중 둘째로 아버지 존은 농부로 2번 의회에서 근무했다. 벤저민 해리슨 6세는 키가 작고 탄탄한 소년으로서 젊은 시절을 농장에서 보냈다.

해리슨은 신시내티 외곽에 있는 파머스 칼리지에서 3년동안 수학했는데 이때 신입생 중 첫 부인이며 여성 대학 학장 존 스콧의 딸 캐롤라인 래비니아 스콧(1832~1892)을 만났다. 해리슨은 스콧 가족을 따라 옥스퍼드로 이주해 거기서 마이애미 대학교를 1852년에 졸업했고 변호사로 일하게 된다. 대학시절 연설을 잘했지만 성격이 쌀쌀맞아 별명이 ‘빙산’이었다고 한다.


2. 정치

휘그당 의원의 아들이며 휘그당 대통령의 손자로 해리슨은 이름 때문에 정계 진출과 당선이 쉬웠다. 1857년 인디애나폴리스 검사가 되고 다음해 공화당 주립 중앙 위원회 비서가 되고 1860년 주립 대법원 서기관이 되었고 4년 후 재선된다. 신앙심도 깊어 1857년 장로교 집사가 되고, 1861년 교회 장로가 된다.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1862년 인디애나 주지사 올리버 P. 모턴은 해리슨에게 인디애나 의용병 70 연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해리슨은 대령에서 준장까지 진급한다. 전쟁이 끝난 후, 해리슨은 변호사로 활동하다 1876년 인디애나 주지사 선거에 나갔다 2번 다 패한다. 1879년에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은 해리슨을 미시시피 강 위원회에 임명하여 1881년까지 그 직에 있었다. 1881년 1월에 미국 상원의원이 되는데 이는 가문의 힘이었다. 하지만 1887년 선거에서 낙선한다.


3. 대통령

1884년 대통령 선거에서 클리블랜드에게 패한 제임스 G. 블레인은 1888년 선거에 불출마하고 공화당은 해리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데, 정치인으로서 큰 업적도 없고 연설 외에는 잘하는게 없었던 해리슨이 대선후보가 된 것은 공화당은 부패하다는 이미지가 컸는데, 해리슨은 청렴한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까지 된 것은 해리슨이라는 집안 배경과 기업이 재정적인 후원 등이 컸다. 선거에서 표는 적었지만 선거인단은 많이 확보한 해리슨은 23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 문제는 당선후 소신있는 정치 보다는 주변에 끌려다녔다. 보호무역의 매킨리 관세법에 서명한 것도 그의 지지자들의 입김때문이었다. 또 셔먼 독점금지법등 대기업을 막는 법도 서명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실행하지는 못했다. 무능했기 때문이며 무난한 무사안일주의였기 때문이다. 재임중 첫 부인 캐롤라인이 사망했고 캐롤라인 여사를 간호한 메리 디미크(1858~1948)와 재혼하는데 나이차가 25살이었다. 둘은 외동딸 엘리베스(1897~1955)를 두었는데 이때 해리슨의 나이는 63살이었다. 1892년 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하지만 전임 대통령 클리블랜드가 당선된다.


4. 말년

퇴임후 해리슨은 인디애나폴리스로 돌아와 변호사로 복귀하고 1901년 3월 13일 자택에서 향년 68세로 사망한다. 인디애나폴리스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우리들의 나라>가 있다.


5. 평가

연설은 뛰어나지만 대통령으로서 부족했다는 평가가 많다. 인간미도 많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사람을 만나는 것을 싫어해서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람을 대면하는 것을 싫어했고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한 것도 없으며 가문의 배경이 대통령 당선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왠지 박근혜 대통령과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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