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미국 제 21대 대통령 체스터 A. 아서 (Chester Alan Arthur) 평가

올드코난 2017. 1. 29.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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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앨런 아서(Chester Alan Arthur, 1829년 10월 5일 ~ 1886년 11월 18일)는 미국의 21대 대통령(재임 1881~85)으로 제20대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의 부통령이었다. 1881년 7월 2일 가필드가 암살되고 9월 19일 사망하자 대통령 직을 승계했다.(부통령 출신 4번째 승계 대통령) 펜들턴법을 서명했고 사망 당시 몸무게는 112킬로그램으로 미국 대통령 중 3번째로 뚱뚱했다. 부정부패 등으로 권위를 잃어 버린 행정부와 대통령의 권위를 세우는게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를 받는 체스터 A. 아서에 대해 정리해 본다.


1. 초기 생애

버몬트 주 페어필드에서 3남 6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아서는 북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교사이자 침례교 목사였다. 어머니 맬비아 스톤은 버몬트 주 농장 지대에서 자라왔다. 가족은 버몬트 주의 여러 지역에 옮겨다니다가 뉴욕 주의 상부에 정착하였다. 어린 체스터 아서는 모범생으로 일찍이 정치에 관심을 가졌고 14세에 휘그당의 헨리 클레이를 지지하였다.

18세에 유니언 대학교를 졸업하고 법학을 공부하고 1854년 뉴욕 법률회사에서 일하면서 흑인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2. 정치

1854년 아서는 뉴욕에서 열린 공화당 창당 회의에 참석하고 공화당 소속의 에드윈 D. 모건이 1859년에 뉴욕 주지사가 된다. 1861년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참전했고 1862년 초 시민군의 조사 장군에 임명되었다가 후에 주립 병참감으로 임명되었다. 1860년대 후반 아서는 뉴욕 주 상원의원 로스코 콘클링의 계파가 되고 공화당에 입당하기 전, 그는 1871년 율리시스 S. 그랜트에 의해 뉴욕 관세청장으로 임명되었다. 1,000명 이상의 고용주들로 이루어진 관세청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연방 사무소였는데 후에 뇌물 증여죄와 부패 혐의로 러더퍼드 B. 헤이스에 의해 해임되기도 했다. 청렴한 공무원은 아니었던 셈이다.


3. 대통령

1881년 7월 2일 가필드 대통령이 총상을 당하고 9월19일 사망하고 다음날 9월 20일에 뉴욕에 있는 저택에서 대통령 선서를 하며 2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1880년 부인 엘렌 여사가 사망했기에 막내 여동생 메리 아서 매켈로이가 영부인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아서가 부통령이 된 배경을 잠시 살펴 보면, 1880년 미 공화당은 제임스 A. 가필드를 대통령 후보로 임명되고 아서를 부통령 후보가 되는데 아서는 부패한 상원의원 로스코 콩클링 계파였다. 콩클링을 가필드를 지지하는 대신 아서를 부통령으로 내세운 것이다. 20대 대통령 가필드가 암살로 죽고 아서가 대통령 직을 승계하자 많은 이들이 우려를 했던 것도 이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아서는 로스코 콩클링과의 관계를 과감하게 끊어 버린다. 이런 아서에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가필드의 정책의 일관성을 지켜내고, 인맥과 계파와 관직 거래 등을 금지하는 펜들턴 법에 서명하면서 미국 정가의 오랜 악습인 ‘관직 사냥’(엽관제)를 없애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 법은 깨끗한 정부와 공무원의 신분을 보장하게 되는 근거가 되면서 미국의 마그나카르타로 불리기도 한다.

공무원 개혁과 정치 개혁은 기득권 정치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아서가 의회에 대해 거부권을 많이 행사한 이유도 기성 정치인들과의 대립으로 봐야 한다. 대표적으로 당시 문제가 된 중국인 이민 금지기간을 20년을 거부해 10년으로 정하기도 했다. 언론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 언론은 그를 무능하고 게으른 대통령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112kg의 거구에 화려하고 위엄있는 의상을 입고 다녔고, 신사 보수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세련된 정치인이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아서의 내면은 매우 낭만적이고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 취임초기 3개월 동안 백안관을 수리하게 하고 그 기간 다른 곳에 거처를 했다 수리가 다 끝난후 백악관으로 입주를 했다고 한다. 이때 백악관의 주현관 디자인을 맡긴 사람이 루이스 티파니였다.


4.말년

아서는 재선에 도전하려 했지만 광화당 경선에서 패해 재선을 포기한다. 퇴임후 뉴욕으로 돌아왔다. 미식가이며 술을 좋아했고, 대통령 재임기간에도 하루 6시간 이상 일을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성인병에 시달렸고, 건강 악화로 퇴임 2년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1886년 11월 18일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향년 57세. 올버니에 있는 루럴 공동 묘지에서 자신의 부인 옆에 안장되었다.


5. 평가

부패한 관리를 내치고 미국의 무역을 크게 확대시켰고 이전 대통령들이 추락시킨 대통령의 위엄과 권위를 되찾도록 해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학자 윌리엄 실은 아서를 “아서는 펜들턴법 사인과 고급스런 취향”을 가진 인물로 평가를 내렸는데, 이는 미국인들에게 그렇게 기억에 남는 대통령이 아니라는 다소 야박한 평가일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16대 대통령 링컨 이후 대중들이 대통령에 대한 엄청난 기대치를 충족시키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링컨을 기억하고 그에 대한 우상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 국민들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아서는 이런 때에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후 최소한 자신의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는 평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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