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전쟁영웅 무능한 지도자, 미국 제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Ulysses S. Grant)

올드코난 2017. 1. 2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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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Ulysses S. Grant, 1822년 4월 27일 ~ 1885년 7월 23일)는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이며 미국의 18번째(1869년-1877년) 대통령이다. 미국 50달러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군인으로서는 유능했었지만 대통령으로서는 무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제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Ulysses S. Grant)에 대해 정리해 본다.


1. 초기생애

오하이오 주에서 가죽 가공업자 제시 그랜트와 농장주의 딸 한나 심프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내성적인 성격에 말수가 적고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지만 말을 잘 다루었다. 그랜트는 감리교에서 하이럼 율리시스'(Hiram Ulysses)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이것은 그의 아버지가 자신이 좋아하는 ‘오디세이’의 등장인물 오디세우스의 이름을 따 붙여준 이름이었다. 그랜트는 하이럼이라는 이름을 싫어해서 자신의 이름을 율리시즈 H. 그랜트라고 적곤 했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즈음 서류를 제출한 하원의원이 그랜트의 가운데 이름을 잊어버렸고 대신 그랜트의 외가 성인 심프슨을 차용해 율리시즈 심프슨 그랜트라고 적게 되고 그랜트는 이후 줄곧 그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육군사관학교 동기들은 샘 그랜트로 불렀고 외톨이였다고 전한다.


2. 남북전쟁 영웅

1843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장교 임관 후 1846년 멕시코 전쟁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종전 후 1848년 그랜트는 친구의 여동생 줄리아 덴트와 결혼 후, 아내와 떨어져 있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술을 마셔 알콜중독증에 시달렸고 결국 1854년에 군을 불명예 퇴역해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가 사업을 하지만 잘 되지는 못해 가난에 찌든 삶을 살아야 했다.

1861년 남북 전쟁이 시작되자 준장으로 군에 복귀해 남부군이 차지하고 있던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를 점령해 맹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이때 그랜트는 항복의 조건을 묻는 적에게 무조건 항복만을 받는다는 답을 남겨 'Unconditional Surrender' 라는 별명이 붙었다. 빅스버그 전투에서도 큰 전과를 세우자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그랜트를 북부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랜트는 게티즈버그 전투 이후 사기가 꺾인 남부군을 몰아붙였으며, 그리하여 1865년에 애포매톡스에서 남부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3. 정치입문 및 대통령 취임

링컨 대통령이 암살되고 앤드루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그랜트는 국가군통수 대원수 겸 육군참모총장이 된다. 존슨 대통령이 의회의 탄핵을 받았고 재선 가능성이 없어지자 여당 공화당은 그랜트를 대통령 후보로 점찍는다. 그리고 1868년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데 37개 주 중 26개 주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해도 남북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 있던 시기였다. 인종차별이 여전하고 빈부격차 등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이 있었고 정부 각료들과 그랜트의 비서들이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는 사태와 대규모 금융 스캔들이 발생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무능한 면을 보이지만, 1872년 재선에 성공한다. 37개 주 중 31개 주에서 승리했는데 이 결과는 본인도 놀랐고 당시 미국 시민들도 의아해할 정도로 그랜트의 대통령으로서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었다.


4. 말년

퇴임후 1879년에 부인과 함께 일본을 방문해 환여회가 열린 우에노 공원에 삼나무를 심었고, 부인은 목련을 심었는데 현재도 남아있다. 친구 퍼니낸드 워드가 경영하는 중개회사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었다가 사기를 당해 알거지 신세가 되어 1884년 파산 선언을 했다. 같은 해 <센추리 매거진> 지에 남북 전쟁 회고담을 쓰기 시작해 자서전을 준비했다. 그랜트는 사망 직전에 자서전을 완성했고 그 자서전은 미국 군 역사상 최고의 자서전 중 하나로 평가되며 친구 마크 트웨인과 출판 계약을 맺어 당시 화폐로 50만 달러의 저작권료를 받았다.

1885년 7월 23일 후두암으로 63세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몸무게는 108킬로그램으로, 미국 역대 대통령 중 4번째로 뚱뚱했다.


5. 평가

남북전쟁의 영웅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이 되고 재선에도 성공했다. 백악관에 처음 들어갈때만해도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8년 동안 그는 매우 무능한 정치력을 보여주었고, 많은 스캔들이 있었다. 그 이유는 그랜트는 오랫동안 군에서 활동했었지 정치인으로서는 경력이 없었던 초보였다는데 있었다. 그의 임기내내 정부 각료들이 부패를 저지른 것은 그랜트가 정말 뭘 몰랐다는 점이었다. 대통령이 무능하니 그를 만만하게 본 관료들이 각종 스캔들을 일으켰던 것이다. 문제는 그랜트는 이런 관료들의 행태를 모르거나 이들을 옹호하려는데에 있었다. 그랜트의 이런 잘못된 의리 정치는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는 물론 당시 미국의 빈부격차를 크게 벌리게 되는데, 그랜트는 이런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를 못했다. 오로지 내 편만이 옳다는 코드 정치를 행했던 것이다. 유능한 군인이 훌륭한 지도가 되는 법이 아니라는 것을 그랜트는 보여주었고 그랜트는 대통령이 아닌 군인으로 남았어야 할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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