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미국 제 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Millard Fillmore) 평가

올드코난 2017. 1. 19.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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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13대 대통령(1850~53) 밀러드 필모어(Millard Fillmore)는 휘그당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테쿰세의 저주가 아닌 대통령의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유일한 부통령이다. 노예 제도 문제로 미국이 남북으로 분열된 1850년에 제13대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정리해 본다.

유능했지만, 시대를 잘못만난 미국 제 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

1. 개요

밀러드 필모어(Millard Fillmore, 1800년 1월 7일~1874년 3월 8일), 휘그당 소속, 미국 역사상 2번째로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대통령. 부계는 스코틀랜드계 장로교도였고 모계는 영국교회에서 분리된 국교 반대자였으나 그는 나중에 유니테리언주의자가 되었다.


2. 초기 생애

뉴욕 주 북부 핑거 레이크스 지역 카유가 카운티 서머힐의 통나무집에서 나다니엘 필모어와 피비 밀라드(Phoebe Millard)의 9남매 중 두 번째이자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전대통령들에 비해 매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흙수저 출신이었다. 나중에 버펄로 시의 남쪽 이스트 오로라에서 살았다. 가난했기에 어려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재단사 견습생으로 일을 하게 되고 1819년 뉴호프 아카데미를 여섯 달 동안 다녔고 그곳에서 자신의 미래의 아내 애비게일 파워스와 사랑에 빠졌다. 그해 말, 월터 우드 오브 몬트빌(Walter Wood of Montville)에서 서기로 근무하면서 독학으로 법률 공부를 해 변호사가 된다. (참고: 이전까지 독학 변호사 대통령 앤드류 잭슨, 마틴 밴 뷰런) 지방 판사들과 교류하면서 교사로 지내다가 1823년 이스트 오로라에 법률 사무소를 개업했고 1826년 2월 5일 애비게일 파워스와 결혼한다. 1830년 버펄로로 이주해 변호사 일을 한다.


3. 정치

젊은 변호사 밀러드는 정치에 마음을 두기 시작한다. 1828년 휘그당을 창당하는 데 도움을 준 올버니의 출판업자 설로우 위드(Thurlow Weed)의 도움으로 1832년 뉴욕 주 하원 의원에 선출되어 1833년부터 1843년까지 임기2년의 연방 하원의원을 4번 지내게 된다.

1844년 뉴욕 조지사 선거에 패해 변호사에 복직했고 1846년 버펄로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1848년 1월 1일, 뉴욕 주의 감사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그해 휘그당은 멕시코 전쟁의 영웅 재커리 테일러 장군을 대통령 후보로 필모어는 부통령 후보로 지명해 미국 12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4. 대통령 승계

부통령이 된 필모어는 1850년 7월 9일 테일러 대통령이 재임 16개월만에 사망하자 다음 날 대통령 직을 승계한다. 13대 대통령이 된 후 필모어는 능력이나 정치적인 재능 등은 있던 사람이지만, 문제는 그가 취임한 1850년 미국의 상황은 노예제로 인한 남북 갈등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고, 미국 의회에는 헨리 클레이, 스티븐 더글라스, 제퍼슨 데이비스, 다니엘 웹스터, 존 칼훈 등 쟁쟁한 의원들이 있던 시기였다. 막강한 의회와 내부 혼란은 필모어 대통령이 제대로 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필모어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연방을 탈퇴하려 하자 군사 조치로 강력하게 대응해 탈퇴를 막아냈다.

그렇지만, 이는 미봉책이었고, 무엇보다 필모어가 대통령에 취임후 즉각 수용했던 ‘1850년 타협안’은 남부의 흑인 노예들은 쉽게 잡아 올 수 있도록 만든 법으로 이웃 캐나다로 도주한 노예들을 다시 잡아 오게 만들었고, 노예들에게는 재판도 허용되지 않았고, 해방된 자유 흑인들조차 다시 노예가 되게 만들어 버렸다. 이런 모순된 악법을 필모어는 옹호하며 서명을 했고 이에 반대하는 북부를 공격했고 그를 지지했던 북부 지역은 등을 돌리고 만다. 그가 재선에 실패하게 된 이유였다.

그리고 필모어 시기 미국 역시 해외 식민지에 눈을 돌리고 있었고 중국은 다른 열강들에게 사실상 넘어가 상황이라 필모어는 일본을 선택한다. 1853년 필모어는 매튜 페리 제독의 지휘하는 4척의 군함을 일본에 보내 개국을 강요하고 다음해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쇄국을 풀게한다.


5. 말년

1853년 재선에 실패한 필모어는 백악관을 떠나게 된다. 휘그당은 이후 공화당이 되기 때문에 휘그당으로서 필모어는 마지막 대통령이었다. 퇴임 한 달만에 부인 애비게일이 사망했고, 1856년 군소정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참패를 당하고 정치를 은퇴한다. 1858년 캐롤라인 카마이클 매킨토쉬와 재혼했고, 남북전쟁 시기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정책들을 반대하기도 했다. 은퇴후 버펄로에 돌아와 지역 사회를 위해 일하며 여생을 보내다 1874년 3월 8일 74세로 세상을 떠난다. 포리스트 론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6. 평가

전임 12대 대통령 테일러에 비해 능력도 있고, 정치적인 타협 등이 좋다는 평가를 많이 받고 있지만, 문제는 그가 취임할 당시는 노예제 문제로 남과 북이 분열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시기에는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제대로 된 역량을 발휘하기 힘들었던 때였다. 그 시대 필모어는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는 있지만, 인품과 겸손을 갖춘 좋은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대표적인 예로 1855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라틴어 명예박사 학위를 주려하자, 라틴어를 모른다면 겸손하게 거절한 일화가 있다. 분수를 아는 사람이었다. 내 생각에 밀러드 필모어는 전쟁과 개혁의 시대 보다는 수성의 시대에 맞는 사람으로 태종의 역할 보다는 세종의 역할이 바람직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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