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미국 제 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 평가

올드코난 2017. 1. 21.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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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14번째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 재임 1853~57)는 북부인 출신이지만 남부에 호의적이었고 대통령 재임 중 노예 제도 문제로 분열된 남부와 북부 사이에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정리해 본다.

남북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미국 제 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


1. 개요

프랭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 1804년 11월 23일 ~ 1869년 10월 8일 재임 1853~57), 뉴햄프셔주 힐즈버러 출생, 부인 제인 애플턴 피어스, 13대 대통령, 부통령은 윌리엄 R 킹


2. 초기 생애

뉴햄프셔 주지사 벤저민 피어스의 아들로 태어나 6명의 형들, 2명의 동생들과 누이들과 함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20년 보든 대학교에 입학해 나다니엘 호손과 친구가 된다.

법률을 공부해 콩고드에 법률 사무소를 열었고 정치에 관심이 많아 앤드루 잭슨의 대통령 선거 운동을 지지하고 1829년에는 뉴햄프셔 주의 하원 의원이 되었다. 2년 후 재선되었고, 32세에 상원 위원이 된다.

1834년 조합 교회의 목사를 지낸 보든 대학교 학장의 딸 제인 애플턴과 결혼했는데 제인은 결핵에 걸렸고, 정치를 싫어했하고 결국 프랭클린 피어스는 1842년 상원의원직을 사임하고 정계를 은퇴한다.


3. 멕시코 전쟁과 정계 복귀

1846년 멕시코 전쟁이 발생하고 제임스 K. 포크 대통령은 피어스를 미국 육군의 대령으로 임관하고 법무 장관은 거절한다. 전쟁이 시작된 지 몇달 후 피어스는 준장으로 진급하지만,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전쟁이 끝난후 정계로 복귀를 한다. 185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는데, 부인이 놀라 기절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시기에는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의 부인은 알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피어스가 민주당 태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당을 위해서도 열심이었지만, 북부 출신이며 남부에 호감을 가진 정치인이라는 점 때문이다.


4. 대통령

1852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피어스 휘그당은 윈필드 스콧 장군 (부통령 후보 해군 윌리엄 A. 그레이엄)을 대선후보로 지명해 선거를 벌였고 선거결과 선거인단 254 대 42라는 큰 차이로 피어스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피어스는 취임직전부터 슬픔과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는데

대통령 취임식 2달 전 11세 아들 벤저민이 철도 사고로 사망하고 제인 여사는 슬픔으로 쓰러지고 결국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후 대통령 임기중 대부분 윗층의 방에서 은둔했다고 전한다. 이런 사적인 것 보다 가장 큰 문제는 노예제로 인한 남북 갈등은 피어스로서는 도저히 해결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데에 있다.

이 시기 해리엇 비처 스토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라는 책은 미국 북부에 노예제 반대 여론을 살려주었다. 하지만 피어스는 이런 북부의 분위기 보다는 남부에 더 관심을 두는 듯한 태도로 비난을 받게 된다. 주요 내각을 와도 국무장관 윌리엄 L. 마시, 재무장관 제임스 거스리, 전쟁 장관 제퍼슨 데이비스, 법무장관 갈렙 커싱 등은 모두 남부 출신이고, 북부는 해군장관 제임스 C 도번, 내무장관 로버트 매클럴랜드 정도 였다. 특히 전쟁장관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는 훗날 남무동맹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이런 내각에 북부 지역이 불만을 갖게 된 것은 당연했다. 피어스는 노예제 문제를 계속해서 피해가려 했고 1854년 캔자스 네브레스타 법을 제정했는데, 이로 인해 이 지역에는 노예제 문제로 큰 싸움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내부 문제에서는 고전했지만, 영토확장에 있어스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멕스코로부터 1천만달러를 주고 뉴멕시코와 남부 애리조나 지방의 7만 8,000㎢의 땅을 사들이기도 했다.(개즈던 매입) 이로 인해 서부 로스앤젤리스와 동부 뉴올리언스까지 대륙횡단 철도를 건설할 수 있게 되어 남부 지역에서 크게 호응을 받았다.


5. 후보 지명 실패 및 은퇴

1856년 전당대해에서 민주당은 피어스 대신 뷰캐넌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해 피어스는 재선을 못하게 된다. 퇴임후 피어스 부부는 마데이라 제도에서 2년을 보내고 유럽을 방문한 후 귀국했다. 제인 여사는 1863년 12월 2일에 사망한다. 그리고 피어스는 조용히 살다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정책을 국가적 재앙이라며 크게 비난하기도 했다. 1869년 10월 8일 콩코드에서 향년 65세로 사망했다. 올드 노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6.평가

그는 역대 대통령중 무능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고 있는데, 여기에는 그 시대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이 많다. 당시 남북 문제는 한 사람이 해결하기에는 그 갈등의 길이 매우 깊었다. 그럼에도 피어스가 많이 아쉬웠던 것은 노예제 문제를 회피하고 갈등을 해결하기 보다는 덮는 쪽을 택했다는 점이다. 캔자스 유혈사태는 피어스의 이런 태도가 원인이었다. 훗날 남북전쟁의 원인을 피어스때문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서 피어스는 대통령으로의 자질은 부족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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