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미국 제 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 (James Buchanan) 평가

올드코난 2017. 1. 28. 09:39
반응형

노예제를 반대했지만, 대통령이기에 이 제도를 보호해야 했던 미국 제 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에 대해 알아 본다.


1.개요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1791년 4월 23일~1868년 6월 1일) 미국의 15대 대통령(재임 1857~61), 미국 유일의 독신 대통령, 부통령은 존 C 브레킨리지. 미국 역사에 인기 없는 대통령 중 한 명, 퇴임 후 남부에서 노예를 사들여 북부에 풀어준 점은 좋게 평가 받음. 사진을 보면 머리를 기울이고 있는데, 뷰캐넌은 한쪽 눈이 근시이고 반대쪽 눈은 원시인 선천적인 부동시 환자였다. 뭔가를 보려면 머리를 앞으로 기울여야만 했고 눈을 심하게 깜빡거리는 증세를 보였다.


2. 초기 생애

펜실베이니아 주 머서스버그 근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제임스 뷰캐넌 1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1783년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왔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스피어와의 11명의 자식들 중의 둘째로 태어났다. 1809년 졸업 후에 랭커스터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812년 변호사 일을 시작한다.


3. 독신으로 산 이유

뷰캐넌은 미국 유일의 독신 대통령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앤과의 사랑때문이었다. 뷰캐넌은 부유한 랭커스터 철강 제조업자의 딸 앤 콜먼과 결혼까지 약속했다 불화를 일으킨다. 이후 앤은 필라델피아로 이주하고 몇달 후 죽고 만다. 뷰캐넌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독신으로 살게 된다는게 한가지.

둘째는 동성애자 설이다. 전임 대통령 피어스의 부통령 윌리엄 킹은 미혼남이었는데 뷰캐넌과 둘이 15년간 한 집에서 같이 살았고, 그 즈음 킹의 별명이 미시스 제임스 뷰캐넌, 팬시 아줌마 (Aunt Fancy)' 등이었다.


4. 정치인

뷰캐넌은 일찍 정계에 입문하는데 23살에 펜실베이니아 주 의원이 된다. 그리고 1820년 연방 하원 의원이 되고 5선을 하게 된다. 이후 상원에도 진출한다. 1824년에 미영 전쟁의 영웅 앤드루 잭슨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지지했고 잭슨이 존 퀸시 애덤스에게 패한 후에도 지지를 한다. 1828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잭슨은 뷰캐넌을 1831년 러시아 주재 미국 공사로 임명하고 1832년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첫 통상 조약을 협상하기도 한다. 1833년 11월 미국으로 귀국 후 이듬해 12월에 펜실베이니아 주 입법부는 뷰캐넌을 미국 상원에 선출하고 1845년까지 상원 의원을 지낸다.

1845년 상원 직을 사임하고 국무 장관 직을 맡는다. 멕시코 전쟁으로 남서부의 영토를 확장하고 영국과 협상을 조정 오늘날의 캐나다 경계선을 이룬 국경선을 타협한다. 1849년 휘그당이 정권을 잡자 뷰캐넌은 잠시 은퇴하고 185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섰지만. 프랭클린 피어스가 승리하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5. 대통령

뷰캐넌은 4년후 1856년 대통령에 다시 출마한다. 민주당이 피어스에 이어 뷰캐넌을 대선후보로 내세운 것은 오랜 외교관의 경험으로 다양한 국제경험도 있었지만 북부출신이면서 친 남부성향으로 남부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미국 15대 대선은 휘그당의 분열로 민주당이 쉽게 승리를 거두며 뷰캐넌은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대통령이 된 뷰캐넌은 자신의 사람들 위주로 내각을 구성해 민주당의 반발을 샀고 특히 남부 출신과 남부에 호의적인 인물들로 채워 북부 지역 정치인들이 뷰캐넌을 비난한다. 무엇보다 뷰캐넌의 문제는 노예제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드레드 스콧’ 사건으로 당시 미국이 큰 소란을 겪고 있었는데, 이때 뷰캐넌은 자신의 고향인 펜실베니아 주 판사들에게 남부에 유리한 판결을 내리게 만들어 민주당 내에서도 큰 비난을 받게 되고 결국 민주당은 16대 대선 후보 지명을 철회해 버린다.블로그 올드코난 갈대의 지혜와 나무의 의지를 갖고 글을 쓰겠습니다. 

6. 재선 실패

16대 대선은 휘그당이 공화당과 미국당으로 분열했고, 민주당은 민주당과 남부 민주당으로 분열을 하게 되는데, 민주당 분열의 책임은 뷰캐넌에게 있다. 뷰캐넌은 민주당 후보가 된 스티븐 더글라스를 싫어했는데,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남부 민주당 후보가 된 부통령 브레킨리지를 적극 도왔고 결국 공화당의 에이브러함 링컨이 큰 표 차이로 당선된다. 남은 얼마 안되는 임기 중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연방을 탈퇴했는데 이를 막지 않았고, 북부의 책임으로만 몰고 가는 등 뷰캐넌의 친 남부 정책은 미국의 분열과 남북 전쟁에 분명 책임이 있었다.


7. 말년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이어 남북 전쟁이 발발한다. 뷰캐넌은 휘틀랜드에 돌아갔고 자신의 한 일들을 정당하다 여기며 이를 알리기 위해 저서 〈반란 이전에 뷰캐넌의 행정부〉를 남겼다. 1868년 6월 1일 77세에 랭커스터에서 사망했고 우드워드 힐 묘지에 안장되었다.


8. 평가

남부와 북부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북부 지역을 무시하고 남부의 의견만 들어 결국 전쟁의 큰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뷰캐넌 재임 당시는 미국 사회는 분명 분열을 하고 있었지만, 전혀 막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다. 공정하지 못한 인사 문제 또한 문제였다. 외교적인 업적은 좋았다고 보지만 내치에는 미흡했는데, 이는 강대국 간의 이해 사이에서 자국의 이득이나 강대국이 편에만 서면 되었던 외교와 국민들의 의견을 공정하게 듣고 토론하는데에는 미흡한 전형적인 외교관 츨신 정치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사람됨은 나쁘지 않아 퇴임후 남부에서 흑인 노예를 사들여 자유주였던 펜실베니아 주에 풀어주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그가 노예제를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분열을 막기 위한 노력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 보면 뷰캐넌은 좋은 사람이지만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 같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