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미국 제 20대 대통령 제임스 에이브램 가필드(James Abram Garfield) 평가

올드코난 2017. 1. 29.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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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에이브램 가필드(James Abram Garfield, 1831년 11월 19일 - 1881년 9월 19일)는 미국 20대 대통령(1881년 3월 4일 ~ 9월 19일)으로 취임 후 총상을 당해 미국 대통령 중 두 번째로 짧은 재임 기간을 가졌다. 임기중 암살범에 의해 죽음을 맞은 일명 테쿰세의 저주 제임스 A. 가필드에 대해 정리해 본다.


1. 초기 생애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근처 오렌지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 부모 에이브램과 일라이자 가필드는 동부에서 건너온 개척자들로 부친은 제임스가 18개월 때 사망했고 어머니 홀로 고된 일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10대 초반부터 일을 했고 16세 때에 6주간 오대호 클리버랜드에서 운하를 운행하는 선원을 하기도 했지만 병으로 집으로 돌아와야 했고 이때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어미니의 설득으로 건강을 회복하자 체스터 근처에 있는 조가 신학교(Geauga Seminary)에 입학한다. 20세 때에 클리블랜드 근처의 하이럼에 있는 웨스턴 예비 절충학파 연구소(현재의 하이럼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매사추세츠 주 윌리엄스타운의 윌리엄스 대학교로 옮겨 학장 마크 홉킨스의 지도를 받게 된다. 1856년 졸업 후, 가필드는 하이럼 대학교로 돌아와 고대언어학과 문학의 교수가 되었고 다음 해 26세의 나이로 대학의 학장이 된다. 학장을 지내면서 법률을 공부한다.

1858년 11월 11일 오하이오 농민의 딸 루크레샤 루돌프(1832~1918)와 결혼하고 7명의 아이를 낳지만 2명은 유아기에 사망하고 아들 해리 오거스터스 가필드(1863~1942)는 윌리엄스 대학교의 학장과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행정부에서 근무한다. 다른 아들 제임스 루돌프 가필드(1865~1950)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아래에 내무 장관을 지냈다.


2. 정치

185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존 C. 프레몬트의 선거 운동을 지지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보이고 노예제도 문제에 눈을 뜨게 된 가필드는 1859년 오하이오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다. 남북전쟁 중이던 1862년 육군에 복무 중인 가필드는 미국연방 하원에 선출되고 17년간 9선을 지내게 된다. 급진적인 공화당의 재건을 지지하고,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탄핵에 투표하기도 했다. 중도적인 정치성향에 지적이고, 좋은 인품에 연설도 뛰어나 많은 이들이 가필드를 주목하게 된다.

공화당 그랜트 대통령 집권기에 뇌물을 받은 적이 있는데 크레디트 모빌러(Credit Mobiller)의 뇌물을 받았고 당시로서는 큰 돈인 5천달러의 사례금을 받기도 했지만 당시에도 선거자금이 많이 필요했던 시기이고 의원들 보수가 적던 시기였기에 당시에는 이에 대해 정치인들은 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3. 대통령 당선

1880년 대통령 선거는 뉴욕주에서 판가름이 날 정도로 초 박빙이었다. 가필드는 뉴욕주 실제 의원들에게 관직을 나줘 주기로 하며 이들과 타협해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이때의 득표를 보면 공화당 가필드 4,446,158표, 민주당 윈필드 후보 4,444,260표로 이들의 표차이는 고작 1.898표였다. 단 선거인단 수는 차이가 컸는데 가필스 선거인단수는 214명, 윈필드 후보는 155명이었다.

문제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한 협성이 가필드에게 약점이 되었다. 장관 임명은 물론 대통령 권한까지 제한을 받을 정도로 그를 지지했던 자들의 요구는 집요했다. 결국 가필드는 선거전의 약속을 거부하는게 옳다는 판단을 내린다. 이에 분노한 자들 중 한명이 찰스 J 가토였다.


4. 암살

1881년 7월 2일 가필드는 모교 윌리엄스 대학교 동창회(25회)를 참석하러 워싱턴을 떠날때 역 대합실을 지나갈 때 찰스 J 가토가 쏜 두발의 총에 맞은 가필드가 쓰러지고 이때 가토는 "난 건장파이며 아서가 대통령이다!"라며 소리를 외쳤다. 가필드는 총에 맞고 11주동 안을 버텼지만 패혈증이 겹치며 뉴저지 주 엘버론에서 9월 19일 숨을 거두고 만다. 향년 50세였다. 그의 시체는 클리블랜드에 안장되었고 그의 친구들은 가필드의 부인과 자식들을 도우기 위하여 모금을 벌였다.

암살범 찰스 J 가토는 즉시 체포되었고 암살 이유에 대해 가필드가 자신을 파리 주재 미국 공사로 임명하기를 거절했기때문이라고 밝혔다. 제정신이 아니라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배심원들은 유죄 판결을 내렸고 1882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5. 테쿰세 저주

1840년 당선된 해리슨이 병사로 사망한 이래 1860년에 당선된 16대 링컨이 1865년 암살되고 20년인 1880년 당선된 19대 가필드가 암살되고 20년 뒤인 1900년 25대 매킨리가 암살되었고 1920년 당선된 워렌 하딩은 병사를 했고 1940년 당선된 루스벨트 역시 병사했다. 1960년 당선된 케네디는 암살되었고, 1980년 당선되 레이건은 총을 맞았지만 목숨을 건진 이후 현재까지 임기중 죽은 대통령은 없다. 그래서 테쿰세 저주가 풀린 것은 아닌가 하는 말도 나온다.


6.평가

전임 러더퍼스 헤이스 대통령은 “가필드를 미국의 역사를 모두 뒤져봐도 가필드처럼 낮은 곳에서 출발해 많은 업적을 이룩한 이는 없었다. 가필드 외에는 없을 것이다. 링컨과 벤저민 프랭크린까지도”라고 평했다. 스스로 가난을 극복하고 성직자, 학자, 군인, 정치가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가필드는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았기에 당시 미국 서민들의 고난을 잘 이해했던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 개혁을 추구하고 물질주의를 배격하기도 했지만 뇌물을 받은 모순적인 태도에, 부정을 싫어했고 결국 암살까지 당했던 인물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는 부패한 것이 아니었다. 그 시대에서 그정도의 타락한 면이 있었지만, 그것이 미국이라는 국가와 국민들에게 해를 주기 위해 받은 뇌물도 아니었고, 본인이 뇌물을 요구하러 다닌 것도 아니었다. 먼지는 묻었지만, 똥이 묻은 것이 아니었다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암살로 그의 임기가 너무 짦아 업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임기를 채웠다면 부패와의 전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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