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재임 한달 미국 제 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William Henry Harrison) 인물평가 및 설명

올드코난 2016. 12. 16.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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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 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William Henry Harrison: 재임 1841년 3월 4일 ~ 1841년 4월 4일)은 취임 한달 만에 사망해 역대 가장 짦은 재임 기간을 기록했다. 군인으로서는 유명하지만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은 딱히 없다. 대통령전까지의 생애를 간단히 정리해 본다.

역대 최소 임기, 재임 한달을 기록한 미국 제 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William Henry Harrison) 인물평가 및 설명

1. 개요

윌리엄 헨리 해리슨(William Henry Harrison, 1773년 2월 9일 - 1841년 4월 4일)은 미국의 9번째 대통령(1841년 3월 4일 ~ 4월 4일)으로 23대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의 조부다. 1825년 상원에 진출한 해리슨은 임기후 은퇴하여 10년동안 정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1836년 대통령 선거에서 휘그당 대통령 후보로 나가자 낙선했지만, 1840년 선거때 당선을 위해 로고송(늙은 티피커누와 존 타일러),캠페인을 사용하여 당선되었다. 취임 당시 그는 자신이 아직 기운이 넘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장대 비가 내리는데도 자켓을 벗고 취임연설을 하다 급성폐렴에 걸렸고, 그로 인해 한달만에 사망했다.


2. 어린 시절

1773년 2월 9일 대영 제국 버지니아 식민지 버클리에서 벤저민 해리슨과 엘리자베스 바셋 해리슨의 3남 4녀 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자신의 초기 교육을 집에서 받았다. 1787년 햄프던-시드니 칼리지에 들어갔다가, 후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다.


3. 유능한 군인, 무자비한 인디언 토벌

1791년 부친이 사망하자 의학 공부를 그만두고 육군에 입대한다. 당시 인디언 토벌 전쟁에 참전했고 중위로 진급했다. 1794년 그레이트 마이애미 강에서 승리로 이끄는 전략을 세워 대위로 진급하고 오하이오 주 워싱턴 요새를 공격한다. 이 시기 해리슨은 재판관이자 부유한 토지 투기업자 존 사이메스의 딸 애나 사이메스(1775~1864)와 결혼 이들 부부는 6남 4녀를 두었다. 이중에 6명이 해리슨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해리슨은 분명 유능한 군인이지만, 상대는 아메리카 원주인들인 인디언들이었다. 이들을 무자비하게 토벌해 이들의 땅을 강탈한다. 1800년 애덤스 대통령은 해리슨을 인디애나 준주의 지사로 임명하여 12년 동안 그 직에 있었다. 해리슨은 인디언들을 사실상 감시하곡 억압했는데 인디언들에게 술 파는 것을 금지시켰고 천연두 접종하는 명령을 내렸다. 1809년 해리슨은 인디언 지도자들과 함께 화이트 강과 와바시 강에 놓인 약 2,900,000 에이커(1,170,000 헥타르)의 대지를 정착자들에게 건네주는 조약을 협상하는데 이는 인디언들에게서 땅을 강탈하는 짓이었다. 인디언들은 이 조약을 비난하고 이에쇼니 족의 추장 테쿰세 아래 연합한다. 해리슨은 인디언과의 전쟁을 지휘하고 1811년 티피카누 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해리슨은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1812년 영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온타리오주 테임즈에서 영국과 인디언의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그리고 해리슨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영악한 면을 보인다.


4. 1836년 대통령 선거

1814년 군복을 벗고 1816년 미국 하원에 선출된다. 군 복무 당시 군 공금을 오용한 이유로 기소당했지만 유죄를 면하고 해리슨은 오하이오로 돌아와 1819년 주립 상원에 선출되고 1825년 미국 상원에 선출된다. 1828년 상원직을 사임하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다. 1836년 대통령 선거에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당시 잭슨 대통령의 후광을 얻은 마틴 밴 뷰런의 민주당 후보로 결정되고, 휘그당은 국민영웅이었던 해리슨을 후보로 지명한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마틴 밴 뷰런의 승리였다.


5. 1840년 대통령 선거

1836년 선거에에서 패한후 해리슨은 다음 선거를 준비한다. 남부 출신 존 타일러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부유하고 귀족적인 자신을 평범한 서민으로 가장하는 전략을 구사하는데 노태우 대통령의 구사했던 ‘보통사람’ 전략이었다. 여기에 선거송(로고송)까지 처음으로 도입해 써먹었던 인물이며 모자와 풍선 현수막 등을 동원했고, 전국적으로 유세를 하는 등 오늘날 미국 선거 운동의 사실상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문제는 내용은 전혀 없는 그럴듯한 이미지 정치 즉 포플리즘 정치였다는 점이다. 어쨌던 그의 선거전략은 주요해서 재선을 노리던 현 직대통령 마틴 밴 뷰런을 누르고 제9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


6. 대통령 재임 한달

1841년 3월 4일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다. 이때 그의 나이는 68세 고령이었다. 그런데 이날 아주 많은 비가 내렸다. 해리슨은 자신이 전쟁 영웅이며 대통령으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었는지, 외투까지 벗어 버리고 1시간 40분이나 되는 긴 취임사를 읽어 내려갔다. 결국 너무 무리한 탓으로 해리슨은 급성 폐렴에 걸리고 말았고 취임한지 단 한달만인 1841년 4월 4일 사망하고 만다.


7. 평가

해리슨은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군 중 한명이었다. 대통령까지 되었던 위싱턴과 잭슨과 비견될 정도다. 하지만, 그가 싸웠던 상대들은 원주민들이었다. 해리슨이 대변했던 백인들은 인디언들 입장에서는 날강도들이었다. 자신의 땅을 지키고 생존을 위해 싸울 수 밖에 없던 절박한 인디언들을 해리슨은 무자비하게 진압을 했다. 이런 해리슨이 백인들 입장에서는 영웅이었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정복자이며 약탈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해리슨은 대표적인 이미지 정치인이었다. 정책이나 이념 대결 보다는 흑색선전 같은 상대방 흠집내기 등의 방법을 썼던 사람이고 선거를 쇼로 만든 현대 선거전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혹평을 받는다. 그래서 한 달만에 죽은 것은 하늘이 뜻이며 미국에게는 행운이라는 말도 나온다. 대통령으로서는 너무 짧아 평가를 하는게 무의미하고 인간적으로 평가하자면, 공명심과 탐욕에 사로 잡혔던 영웅주의에 사로 잡혔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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