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미국 제 29대 대통령 워런 G. 하딩 (Warren Gamaliel Harding): 미국 역대 가장 무능한 대통령 하딩 평가

올드코난 2017. 1. 30.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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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개멀리얼 하딩 (Warren Gamaliel Harding, 1865년 11월 2일 ~ 1923년 8월 2일)은 미국의 29대 대통령(1921~23)으로 임기 중에 사망한 여섯번째 대통령이다. 미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대통령 조사에서 늘 1위를 기록하는 역대 가장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하딩에 대해. 정리해 본다.


1. 어린 시절

오하이오 주 코르시카 근처에서 조지 트라이언 하딩과 피비 디커슨 하딩의 8명 자식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는 1642년 플리머스 식민지에 정착한 영국인의 후손이다.

하딩은 코르시카와 캘리도니아의 그래머 스쿨들에서 수학했고 아버지가 절반을 소유한 주간 신문 캘리도니아 아거스 (Caledonia Argus)에 타자치는 것을 배웠고 오하이오 센트럴 대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학교 신문을 편집했다. 1882년 교사자격을 얻고 오하이오 주 매리언 근처에 학원에서 한 학기 동안에 강의했는 후에 강의가 자신에게 가장 어려운 직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딩이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된 것은 별 재능이 없었기때문이 경험을 쌓기 위함이 아니었다.

Marion Democratic Mirror를 위해 일하다 188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제임스 G. 블레인을 지지한 이유로 해고당하고 하딩과 친구들은 파산한 시골 신문 매리언 스타 (Marion Star)를 300달러에 사들여 편집을 맡게 된다. 1891년 26살에 은행원의 딸 플로렌스 클링 더 월프(1860~1924)와 결혼하는데 하딩보다 5세 연상으로 아이가 둘이 있던 이혼녀였다. (하딩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부인은 야망이 커 "여공작"이라 불리었는데 하딩이 정치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부인때문이었다.


2. 정치

하딩은 편집자와 실력있는 웅변가로 알려지게 되고 1889년 공화당 주상원에 선출되고 2년 후 재선된다. 전략가 해리 M. 도허티의 후원으로 1오하이오 주지사가 되고 1914년 미국 상원에 당선되지만 임기 6년 동안에 주요 법안을 내놓지 못했고 출석도 반이나 빼먹는 등 불성실하고 무능한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약삭빠른 데는 있었는데 대통령에 다시 출마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접근해 부통령 후보 자리를 약속받지만 선거전 루스벨트가 사망하고 만다. 그런데 하딩은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당시 대통령 윌슨은 병석에 있었고 경제도 어렵기 때문에 민주당에 대한 여론이 나빠 공화당에서 대통령이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공화당 내 유력한 대선주자들이 나서고 경선은 혼탁해지고 9번에 걸친 투표에도 후보가 결정되지 않자, 가장 무난하고 만만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내세우기로 하는데 그가 바로 하딩이었던 것이다. 물론 하딩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다. 자신이 대통령 감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거절하지만 공화당이 적극 밀면서 대선에 출마해 엄청난 득표수를 얻으면 당선되는데 득표수 16,153,115표 선거인단수 404명을 획득해 당선된다. 참고로 경쟁후보 민주당 제임스 콕스는 9,133,092명 선거인단수 127명을 얻는데 그쳤다. 이는 하딩이 잘했다기보다는 당시 미국 상황이 매우 어지러웠고 새로운 인물을 원했던 유권자들은 기성 정치인들에게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다. 하딩은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새로운 인물과 같았는데 엄밀히 말하면 하딩을 몰랐다는게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29대 선거는 모든 여성이 투표할 수 있던 첫 선거였으며 라디오 방송으로 공개되었던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하딩은 상원 임기중 선출된 첫 대통령이 되었다.


3. 대통령

하딩은 당선되자 많은 문제에 직면하는데, 리더십도 없었지만 인사관리가 더 큰 문제였다. 포커 친구를 비서로 임명하는 등 측근 및 코드 인사로 큰 비난을 받게 된다. 특히 ‘오하이오 갱’으로 불린 하딩의 친구들의 부패로 하딩 자신도 힘들어 했다고 한다. 재임 기간 중 윌슨이 만든 금주령으로 인한 어수선한 분위기와 부패한 행정부 등 언제 사고가 터질것만 같았지만 하딩에게 다행스런 것은 그의 임기 중에는 큰 사건이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다음 대통령과 세대들에게 그 후유증을 남겼다는 점에서 하딩은 분명 비판을 받아야 한다.


4. 사망

1923년 초부터 건장이 좋지 않았는데 공화당은 1924년 대통령 선거를 위해 하딩에게 무리한 스케줄을 소화하게 만들고 샌프란시스코 기차에서 쓰러진 하딩은 1923년 8월 2일 샌프란시스코 호텔에서 사망해 임기중 사망한 6번째 대통령이 된다. 유해는 매리언으로 옮겨졌고 부인 플로렌스도 1924년 11월 21일에 사망해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암살설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5. 평가

미국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없는 대통령으로 평가 받는다. 무능하고 업적도 없었고 도저히 대통령감이 아니었다는 평가가 많다. 자질도 없었지만 본인도 대통령이 될 생각이 없었는데 대통령이 되었으니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 리가 없었다. 사생활도 좋지 않아 사후 여러 스캔들이 밝혀지기도 했다. 헐리우드 갱 영화를 보면 하딩 시기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를 하는 것도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하딩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무능했을뿐인데 이에 대해 앨리스 루스벨트 롱워스의 평가가 적절할 것 같다. “하딩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얼간이였다.”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하딩은 이토록 큰 비난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딩은 자신의 능력 이상의 지위를 얻는 자는 반드시 몰락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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