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미국

잠만 잤던 미국 제 30대 대통령 존 캘빈 쿨리지 2세(John Calvin Coolidge, Jr.) 평가

올드코난 2017. 1. 30.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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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캘빈 쿨리지 2세(John Calvin Coolidge, Jr., 1872년 7월 4일 ~ 1933년 1월 5일)는 미국 29대 부통령이며 제30대 대통령(1923년 - 1929년)이다. 하딩 대통령이 죽자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이듬해 재선에 성공한다. 5년 임기동안 잠만 잤다는 비판을 받고 있고, 미국 독립기념일 7월 4일에 태어난 유일한 대통령이다. 정리해 본다.


1. 대통령 전

1872년 7월 4일 버몬트 주 플리머스에서 잡화상의 아들로 태어나 아머스트 대학을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되고 공화당에 입당하고 매사추세츠 주 상원 의원과 주지사를 역임했는데, 이 시기였던 1920년대는 노동 운동이 거셌는데 이는 노동자의 책임이 아니다. 저임금과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근로자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은 보장받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주지사였던 쿨리지는 주방위군을 동원해 시위자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노동연맹의 위원장에게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파업을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언제라도 있을 수 없다(There is no right to strike against the public safety by anyone, anywhere, any time!)”라는 유명한 말을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공화당 내에서 인정을 받게 되고 1920년 부통령 후보가 되고 하딩이 당선되면서 부통령에 취임한다.


2. 대통령

하딩이 취임한지 2년이 조금 지난 1923년 8월 2일에 사망하는데 이 때 쿨리지는 고향인 버몬트 주의 아버지 집에 있었다. 하딩이 죽은 다음날 오전 2시 30분 잠을 자고 있다 하딩의 부고를 접하고 아버지에게 대통령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 때 아버지가 한밤중에 가게 계산대에 성경을 올려 놓고 불을 밝히고 아들 쿨리지에게 대통령 선서를 시켰고 선서가 끝난 후 쿨리지는 다시 세 시간 동안 잠을 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쿨리지는 대통령 직을 승계한 후 해리 도허티를 해임하고, 내무장관 알버트 폴로를 뇌물죄와 직권남용으로 현직 장관이 처음으로 구속되는 사례가 되는 등 부패 공직자를 퇴출시키는 노력을 보이자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면서 1924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다.

재선 후 1차대전 전범 국가 독일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는데 독일의 전쟁배상금을 줄여 독일의 경제안정을 도우려 했고, 인디언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 시키고 백악관에서 원주민 추장들과 만나기도 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쿨리지는 인품이 나쁜 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쿨리지에게 가장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경제를 정말 몰랐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경제상식도 제대로 모르는 경제무식자였던 것이다. 특히, 경제를 위임한 재무장관 앤드루 멜런는 재벌 출신으로 시장에 대한 정부 불간섭주의 즉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했고 그 결과 세계 대공황으로 이어지게 된 것으로 쿨리지는 이에 대해 분명한 책임이 있다. 운 좋게도 1929년 3월 퇴임후 7개월 후인 1929년 10월에 대공황이 터지며 책임을 면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공황에 대한 책임과 비난은 후임자 허버트 후버가 받게 된다.


3. 말년

1928년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 선언을 하고 퇴임 후 철도위원회 의장, 맹인협회 의장, 미국역사학회 회장 등 여러 자리를 역임했다. 말년에 자서전을 집필하고 여생을 보내다가 대공황 중이던 1933년 1월 5일 부인이 시장에 가기 위해 외출을 했고 쿨리지는 면도를 하고 있었는데 부인이 시장에 다녀오자 쿨리지는 자택 마루바닥에서 쓰러져 숨져 있었다고한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향년 60세.


4. 평가

공직자로서 청렴함과 국민에게 신뢰를 얻게 만든 점은 그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경제에 대해 무능해 대공황을 불러온 점은 분명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공직생활을 잘했다기 보다는 편했다고 보는게 좋을 것 같다. 잠이 아주 많다는 것은 천성이 게으른 사람으로 이런 사람들은 눈에 띄는 그런 일은 하지만, 꾸준한 일이나 보이지 않는 그런 세세한 일은 놓치는 경향이 많다. 쿨리지가 경제에 대해 무지한 것도 그렇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쿨리지는 대통령이나 고위 관직 보다는 행동 대장이나 경찰 혹은 군인으로 현장에서 일하는 게 어울릴 사람이었다. 동시대 사람들이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안타깝거나 슬퍼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를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쿨리지는 유능한 대통령은 아니었다.


5.일화

간단명료하고 과묵하고 검소했다는 이유로 당대에는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의 과묵함이 어느정도였는지는 1928년 대선 불출마 성명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1928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I do not choose to run for President in 1928.)” 이 한 문장이 끝이었다.

대통령 재임 중 국무회의에서 조는 일이 많아 구설수에 올랐고 매일 11시간은 잠을 잤다고 한다. 오후에 정기적으로 낮잠을 2~4시간 자고 항상 오후 10시에 취침에 들었다고 한다. 헨리 L. 멘켄은 이런 쿨리지에 대해 "그의 최대 업적은 미국 역사상 어떤 대통령보다 가장 잠을 많이 잔 것이고 더 적게 말한 것이다. 그가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는 동안 미국은 추락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훗날 국무회의에서 잠자기로 유명했던 로널드 레이건은 쿨리지의 초상화를 백악관에 소중하게 걸어 놓았다고 한다.

선거 운이 좋아 평생 작은 선거부터 대선까지 20여회의 선거를 치러 낙선한 것은 단 한 번 뿐 이었는데 학교 운영회 이사 선거 뿐이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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