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청나라의 황제

올드코난 2010. 6. 6.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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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황제

(다음백과, 위키백과 내용 정리한 것입니다.)

 

1.태조 (太祖) 천명고황제 (努爾哈齊/天命)

(1583—1616) 아이신줴로 누르하치(중국어: 愛新覺羅 努爾哈齊 - 애신각라 노이합적, 만주어: - 아이신줴로 누르하치. 1559 ~ 1626 9월 30, 재위 : 건주여진 1583 ~ 1616, 후금 1616 ~ 1626)만주 북동부의 여진족 족장으로 후금을 세웠으며 만주어를 위한 글자의 제작을 명했다. 사르호의 결전에서 명나라를 물리쳤는데 이때 조선과 담판을 벌였으며 누르하치가 살아있을 때는 조선과는 더이상의 충돌은 없었다. 후금은 후에 을 멸망시키고 1636 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공식 이름은 쿤둘런 칸, 연호는 천명(天命), 여직(女直:여진의 명대 호칭), 이름은 게렌구룬베 우지레 겡기옌(모든 나라에 은총을 내리는 영명한 황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처음에는 무황제(武皇帝), 나중에는 고황제(高皇帝). 1618년 누르하치가 중국 본토를 처음 공격했고, 그의 아들인 도르곤 때에 가서 중국을 복속시켰다.

여진족은 중국 변방에 살던 부족 가운데 하나로, 퉁구스계() 민족이다. 이들이 살던 변방지역은 통상 중국 황실에서 직접 관장했다. 여진족은 일찍이 금(金:1122~1234)을 세운 적이 있고 금은 몽골족에 의해서 복속되기까지 중국 북부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여진족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명()제국의 전통을 따랐다.

누르하치의 부족은 만주의 다섯 여진족 가운데 하나인 건주여진으로 중국의 동쪽 국경지역과 압록강 이북인 창바이 산맥[長白山脈] 지역에서 살았다. 나머지 하다[哈達후이파[輝發우라[烏拉예헤 여진은 만주 중앙 삼림지역과 스텝 지역에서 훨씬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다섯 부족들은 국경문제로 전쟁과 화해를 거듭했고 때로는 통혼(通婚)도 했다. 이러한 배경을 무대로 하여 누르하치는 아주 작은 규모로 시작하여 점차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1559년에 태어나 20대 초반에 지도자가 되었다. 그전에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명조가 지원하는 다른 부족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당시 은 변경지역에 사는 여러 부족들을 서로 싸우게 하여 이들 부족들이 위협적인 세력이 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전사하자 누르하치는 자신의 부족이 쇠퇴해가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1586년에 자신의 부족 가운데 라이벌이며 명의 지원을 받고 있던 니칸 와일란을 패퇴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다른 여진족들을 하나하나 굴복시켜 나갔다. 다른 여진족들이 명과 연합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해 명이 장악하고 있던 만주 북부지역을 침공했고, 이어 보다 더 야심에 찬 군사적·정치적 모험을 감행하여, 마침내 명으로 쳐들어갔다.
다른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누르하치는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 처음에 이 나라는 다른 여진부족이나 명조와 불분명한 정치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 조직이 확대되면서 이 나라의 잠재력은 점점 더 커져갔다. 1599년 누르하치의 명()을 받아 몽골어와 중국어에 정통한 만주귀족이자 학자인 에르데니가 만주 문자를 만들어서 만주 민족문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해에 여진족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하타국이 복속되어 만주국으로 편입되었다. 1601년 누르하치는 청나라 군대조직의 근간이 되는 8기제도(八旗制度)를 만들었다. 8기는 근본적으로는 군대조직이었으나, 만주족을 위한 행정 및 과세의 단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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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의 사령관과 행정관은 누르하치가 직접 임명했고, 이로써 여진족은 행정조직을 갖게 되었다. 그는 세 아들과 조카에게 4(四旗)의 책임자 자리를 맡겨 그 자신의 권위를 그대로 보존하는 가운데 가문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1615년 당초부터 있던 '4' 4기가 더 보태어져 '8'가 되었고, 이 추가된 4기도 그가 신임하는 인척들에게 책임자 자리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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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부족이 이같이 독창적인 군사관료조직으로 재편된 것은 만주와 기타 지역에 있는 중국 변경지의 군사·정치 구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는 초석이 되었다. 세력확장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누르하치는 만주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이 지역의 채광독점권과 진주, 모피, 그리고 이 지역과 조선에서 나는 인삼 등에 대한 무역독점권을 통해 엄청난 재력을 축적했다. 심지어 인삼 보존방법을 고안하여 많은 이득을 남기기도 했다. 이당시 베이징에 보내는 조공사절은 조공과 무역 업무를 겸했는데, 이들을 통해 많은 은()을 축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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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
년 누르하치는 명에 대한 첫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그당시 그는 이미 '후이파' '우라'의 두 여진부족을 복속시켜 그의 세력권 안에 넣었고, 최대의 강적인 예헤 부족과 그 부족의 지원세력인 명과의 대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명의 변경도시인 푸순[撫順]은 그 성을 지키던 이영방(李永芳)이 만주 쪽으로 귀순하자 손쉽게 함락되었다. 명의 고위관리가 이같이 귀순해온 것은 만주족의 제도 안에서 자신이 가진 중국적인 문화·정치의 경험을 살려가며 만주족 통치자에게 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 관리의 뒤를 이어 수많은 중국관리들이 투항하거나 포로가 되어, 중국식 제도를 많이 답습한 만주족 정부 밑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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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 있는 명조의 황제와 누르하치의 관계는 처음에는 분명치 않은 것이었다. 누르하치 자신도 조공사절단의 우두머리로 베이징을 여러 번 방문했다. '4'가 창설된 1601, 그는 새로운 왕조를 창업한다는 뜻이 분명치 않은 칙령을 발표했다. 푸순 성을 침공하기 바로 전인 1616, 누르하치는 천명(天命)이라는 연호를 사용, 자신을 ''[汗:황제]으로 선언하고 자신의 왕조를 금(金:또는 後金)으로 이름을 정하여 12세기의 여진왕조를 계승했음을 선포했다. 1618년 누르하치는 여러 여진부족들이 자신의 부족에 대항하도록 교사한 명의 정책에 대한 책임과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죽게 한 책임 등을 문책하는 7대한(七大恨)을 선언하고 명과의 국교를 단절한 뒤 국경을 돌파하여 푸순 성을 침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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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의 야심은 끝이 없었다. 처음에는 라오양[遼陽]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마침내 1625년 선양[瀋陽]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길목을 수비하는 명의 군대를 패퇴시키려고 했다. 1626 2월 그는 영원성(寧遠城)을 침공했다가 처음으로 패했고, 그해 9 30일 전투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 죽었다.

누르하치는 자신이 일으킨 군사적·정치적 대업을 완수하지는 못했으나 그가 세운 기반 위에서 아들들이 그 대업을 완수했다. 한 작은 부족의 족장에서 황제로까지 등극했던 누르하치는 3명의 정비(正妃)와 많은 측실을 두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다른 여진 족장가문에서 취해 온 것이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16명의 아들 가운데 아바하이(?~1643)가 그의 뒤를 이어 칸이 되었다. 그리고 만주족 초기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탁월했던 도르곤 왕자가 부왕(副王)이 되어 중국 정복을 완결하여 1644년 베이징에 만주족 왕조를 세웠다.

 

2.태종 (太宗) 숭덕문황제 (皇太極/崇德)

1636—1643Abahai라고도 함.  1592. 11. 28 만주~1643. 9. 21 만주.  중국 청나라의 제2대 황제. 연호는 천총(天聰숭덕(崇德)·1636년에 만주에서 만주족·몽골족·한족의 황제가 되었으며 국호를 후금(後金)에서 청()으로 바꾸었다. 홍타이지는 만주족이 세운 후금의 카간이었던 누르하치(1559~1626) 8번째 아들이었다. 누르하치는 내륙 아시아 스텝 지역의 여러 부족들을 통일하여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부족민을 중국식 관료제 국가로 조직했다. 누르하치가 죽은 뒤에 홍타이지는 형제들을 죽이고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다. 권력다툼에서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주로 군사지도자로서의 남다른 재능을 지녔던 데 있었다. 그는 내몽골과 조선으로 진격해들어가 이 두 나라를 금의 속국으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재정과 식량을 공급받고 내몽골에서는 인력과 말을 공급받아 팔기제(八旗制)로 알려진 군사체제를 완성했다. 4번의 군사 원정을 통해 전에 중국이 장악하고 있던 북만주의 헤이룽 강[黑龍江] 지역을 마침내 장악하고 3차례나 만리장성을 넘어 화북을 침공했다. 포로로 잡혀왔거나 자진해서 금나라를 위해 일하는 한족들의 수효가 많아지자 금도 중국에 더욱 가까운 국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새로운 유능한 한족들이 금에 협조했다. 홍타이지는 한족 관료의 충고를 받아들여 나라 이름을 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중국 공략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실현되기 전에 죽었지만 만주족 지배의 기초를 다졌다. 그가 죽은 지 1년 뒤에 만주족은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北京]을 장악하고 얼마 후 나머지 지역 모두를 평정했다.

3.세조 (世祖) 순치장황 (順治)

1643—1661 ()Shunzhi di ()Shunchih ti.   1638. 3. 15 만주~1661. 2. 5 베이징.  청조의 제3대 황제(1643~61 재위).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1대 황제가 된다. 이름은 복림(福臨).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장황제(章皇帝). 만주지역에 있던 후금(後金)의 통치자 홍타이지[皇太極 : 1592~1643] 9번째 아들인 순치제는 그가 6세이던 1643년에 왕위를 계승했고, 숙부인 도르곤(Dorgon : 1612~50)이 섭정을 했다. 다음해 도르곤이 지휘하는 만주족 군대가 명(1368~1644)의 수도인 베이징을 점령했고, 어린 순치제는 청의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1650년 도르곤이 죽을 때까지는 도르곤이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했다.
순치제는 독일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과 친밀하여 그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한다. 자주 샬 폰 벨에게 조언을 청했으며, 또한 베이징에 로마 고딕 양식의 교회를 세우도록 허락했다. 1657년 이후 그는 점차 불교의 선종(禪宗)으로 관심을 돌려 환관과 승려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주요업적은 청 조정에 한족관리의 숫자를 증가시켰다는 것이다.

 

4.성조 (聖祖) 강희인황제 (康熙)

 1661—1722  )Kangxi ()K'ang-hsi.   1654. 5. 4∼1722. 12. 20 베이징.  중국 청조의 제4대 황제(1661~1722 재위). 개요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2대 황제가 된다. 연호는 강희, 이름은 현엽(玄燁), 묘호는 성조(聖祖). 청제국에 러시아의 일부 지역과 외몽골을 합병시켰고 티베트에까지 세력판도를 넓혔다. 4개의 대외무역항을 개항했고 서구의 교육·예술, 천주교의 도입을 장려했다.

유년시대

현엽은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효강장(孝康章) 황후는 명문가 []씨 출신의 유명한 만주족 장군인 툴라이[圖賴]의 딸이었다(만주족은 만주지방에서 사는 퉁구스족을 말하며 1616년 후금을 세웠고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 1644년 명을 정복하고 중국을 지배했음). 1661 2월 순치제가 천연두로 23세의 나이에 갑자기 죽자, 현엽은 5명의 형제를 제치고 즉시 제위에 올랐다. 그렇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가 다른 형제들의 어머니보다 지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연호인 강희(만주어로는 에레타이핀)는 평화로운 조화를 뜻한다.
등극한 황제가 아직 7세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선제(先帝) 때의 공신인 소닌·숙사하·에빌룬·오보이가 정권을 담당했다. 보수적인 만주족 출신인 이들 4명의 대신이 취한 첫 조치는 십삼아문(十三衙門)을 폐지하고 내무부(內務府)를 설치한 것이었다. 십삼아문은 선제인 순치제 때 도입한, 황실 내의 사무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전 왕조인 명대에 번성했던 환관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십삼아문은 모두 한족(漢族) 출신 환관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설치된 이래 만주족들의 혐오를 받아왔다. 십삼아문 대신에 내무부가 설치되면서 그 구성인원도 만주족 출신의 충성스런 종복들로 바뀌었고 황제의 사생활은 이들이 관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청조는 환관들이 정사(政事)에 개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은 다른 많은 왕조들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특히 대에는 환관들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어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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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
13세가 된 강희제는 소닌과 다른 대신들의 자문을 받아가며 정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그의 선제도 13세부터 통치했음). 그러나 실권은 여전히 4명의 대신에게 있었다. 소닌이 죽자 오보이가 정권을 장악했고 날조된 죄명을 뒤집어씌워 숙사하를 처형한 뒤, 에빌룬을 위협하여 복종시켰다. 1669년 강희제는 할머니인 태황후와 한족 출신 태부(太傅)의 도움을 받아 오보이와 에빌룬을 제거했다. 오보이가 실제로 체포된 것은 황제의 알현실에서였다. 황제의 뒤에 숨어 있던 젊은 무사가 오보이에게 갑자기 덤벼들어 체포한 것이다. 15세가 된 강희제는 이같은 조치를 취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자신이 진정한 군주임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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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권의 장악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강희제는 중국 남부의 세 번왕(藩王)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세 번왕이란 윈난[雲南]오삼계(吳三桂), 광둥[廣東]상가희(尙可喜), 푸젠[福建]의 경계무(耿繼茂 : 그가 죽은 뒤 아들 耿情忠이 뒤를 이었음)를 가리킨다. 이들은 중국의 군벌로서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만주족이 명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만주족 진영의 환대를 받아왔다. 1644년 순치제가 베이징에 입성할 때 중국의 다른 지역들은 여전히 명의 잔군(殘軍)과 비적(匪賊)의 수중에 있었는데, 세 군벌이 이들의 진압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에 왕()으로 책봉되었고, 사병(私兵)을 보유한 채 중국 남부를 다스리게 되었다. 사실상의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던 이들 세 번왕이 베이징의 중앙정부에 큰 위협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1673년에 찾아왔다. 상가희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사병의 지휘권을 포기하고 고향인 만주로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온 것이다. 강희제가 이 제의를 즉각 받아들이자 다른 두 번왕들도 예의상 똑같은 제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의 영토를 황제가 회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같은 번왕인 오삼계는 남쪽의 윈난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태 진전에 매우 놀랐다. 그는 자신 역시 권력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중앙 정부에 대해 반기를 들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만주족이 베이징에 입성할 때 큰 공을 세운 오삼계의 강력한 군대와 일전(一戰)을 각오해야 하는 중대 문제가 어전각의에 제기되었다. 젊은 강희제는 오삼계의 군대를 쳐부수겠다는 단호함을 보이면서, 세 번왕이 결국은 조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 확실한 이상 이 기회에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러한 결정에 충격을 받은 오삼계는 즉각 만주족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켜 삼번(三藩) 이 일어나게 되었다. 개전 초기에 관군(官軍)이 밀리게 되자 차하르 몽골족(만주족이 1635년 내몽골을 정복하기 전까지 이 지역을 다스렸던 왕족)의 부르니가 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그 여파로 그밖의 다른 동아시아 제국도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강희제의 추진력과 탁월한 군사전략이 마침내 늙은 오삼계를 압도했고, 오삼계는 베이징으로 진격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황제임을 선포한 뒤 곧 죽고 말았다. 관군이 1681년 윈난의 쿤밍[昆明]에 입성하면서 반란은 진압되었고 왕조는 굳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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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왕을 제거하고 난 뒤에 강희제는 타이완 정벌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타이완을 다스리고 있던 정()씨 일가는 원래 푸젠 출신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광대한 중국 연안에서 해상무역을 독점해온 해상세력이었다. 만주족에게 복속되는 것을 거부한 정성공(鄭成功 : 서방에는 콕싱가[國姓爺]로 알려져 있음) 1662년 네덜란드로부터 타이완을 빼앗고 근거지를 타이완으로 옮겼다. 그의 자손들은 타이완에서 청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청은 해군력이 없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타이완 정벌을 수행할 수 없었다. 1661년에 채택된 청의 유일한 전략은 푸젠 연안의 주민을 내지(內地)로 강제이주시켜 정씨 일가를 고립시키는 것이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683년 정씨 가문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강희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대를 동원하여 타이완 정벌을 명했다. 정씨 일가는 투항해왔고 타이완은 푸젠 성으로 편입되었다.

중국 본토를 확고하게 장악하게 되자, 강희제는 북방의 적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17세기 중반에 헤이룽 강[黑龍江] 유역까지 남진했던 시베리아 지역의 러시아인들은 강희제의 통치 이전부터도 알바진과 네르친스크까지 내려와 요새를 세웠으나 청군에 의해 격퇴된 바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그뒤 요새를 곧 수복했고, 그 지역에 더 많은 요새를 세웠기 때문에 강희제는 이들에게 일격을 가할 준비를 했다. 1685년 청군은 알바진을 공격하여 며칠 만에 그 요새를 함락시켰으나 청군이 철군하자마자 러시아인들은 그 요새에 또다시 인원을 배치했다. 강희제는 그 이듬해 다시 정벌을 명령했고, 포위공격은 오래 지속되었다. 동시에 강희제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외교협상을 벌여 네르친스크 조약(1689)을 맺었다. 네르친스크에 파견한 청의 대군(大軍)에 압도되어 맺게 된 이 조약에 따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은 헤이룽 강의 외곽지류인 고르비트사 강 유역과 스타노보이 산맥으로 정해졌다. 이로써 헤이룽 강 유역과 청조의 본거지인 만주는 청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강희제는 외몽골을 합병시켰다. 외몽골의 서쪽과 톈산 산[天山] 북쪽에 사는 유목민 준갈이부(準噶爾部 : 몽골4부의 하나) 오이라트족의 통치자인 간덴은 야심만만한 인물로 동투르키스탄을 정복했고, 이어서 외몽골의 할하족 영토를 침입한 바 있었다. 많은 수의 할하족 난민들이 내몽골로 피해와서 청의 보호를 요청했다. 1691년에 강희제는 내몽골의 돌론노르(나중에 둬룬 현[多倫縣]으로 개명)에서 할하족의 대표들을 접견했고, 또 이곳에서 그들의 공식적인 합병맹세를 받았다. 1696년에 강희제는 불모의 고비 사막을 건너 외몽골 원정에 나섰다. 과감하면서도 대단히 위험한 그 원정에서 강희제는 중군(中軍)을 손수 지휘했다. 적대적인 이역에서 배고픔과 목마름을 이겨냈고, 오늘날의 울란바토르 동쪽인 준모드에서 준갈이부를 궤멸시켰다. 간덴은 그 다음해 알타이 산맥의 은신처에서 자결했다. 할하족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외몽골은 청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준갈이 부족이 1717년 티베트를 침입하여 라싸[拉薩]를 함락시킬 때까지 20여 년 동안 청과 준갈이부족 사이에는 평화가 지속되었다. 베트의 달라이 라마가 몽골족에 미치는 정신적 영향력을 염려한 나머지 강희제는 1720년 티베트로 군대를 보내, 준갈이부족들을 라싸에서 축출하면서 이 지역을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강희제는 1712년 준갈이부족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7세기 초반에 남러시아로 이주해온 투르구트족, 또는 볼가 칼미크족에게 사절을 파견했다. 무수한 수로를 이용하여 시베리아 전역을 여행한 만주사절들이 3년 뒤에 돌아오자, 그 일행 가운데 사람인 툴리센[圖理琛]이 〈이역록 異域錄〉이라는 상세한 여행기를 써냈다.

제국의 행정

강희제는 천부적으로 놀라운 정력과 뛰어난 궁술(弓術)의 재주를 지닌 탁월한 군사지도자였다. 그는 일상적인 행정업무에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쏟았다. 중국의 전통적인 황실제도에 따르면, 제국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사소한 일도 황제가 몸소 보살피게 되어 있었다. 강희제는 자신에게 제출되는 보고서와 비망록들을 모두 읽으면서 심지어 아주 사소한 오자(誤字)까지 지적해냈다. 또 하루에 300~400건에 달하는 문서를 모두 결재했는데 그는 심지어 전시(戰時)에도 이렇게 많은 일을 했다.

강희제가 늘 신경썼던 문제는 황허 [黃河]의 치수(治水)였다. 오랫동안 치수사업을 하지 않은 탓으로 황허 강과 화이허 강[淮河]이 합류하는 지점 근처의 유역은 자주 침수되었다. 이 때문에 장시[江西] 북부지역은 큰 피해를 당하곤 했다. 1677년 강희제는 근보(靳輔)를 치수사업의 총책임자로 임명했고, 근보는 1683년에 제방축조와 준설사업을 완성하여 황허 강의 흐름을 안정시켰다. 아울러 황허 강과 남쪽의 양쯔 강[揚子江]을 잇는 인공운하인 대운하의 개수작업이 활발히 진척되어 남쪽의 곡창에서 생산되는 곡물들을 북쪽으로 대량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치수사업의 결과를 검사하고, 남쪽의 부유한 문화·경제 지도자들과 친교를 돈독히 하기 위해 강희제는 양쯔 강 이남의 지역을 1684~1707년 사이에 6번이나 방문했고, 그때마다 여비는 황제의 사재를 털어 충당했다. 개인생활은 근검절약으로 일관했고, 시중을 드는 궁녀와 환관도 몇 사람에 불과했다. 강희제는 세수입(稅收入)을 증대시키는 일이 결코 없었고, 전시에도 세수입을 늘리지 않았다. 실제 그의 통치 시기에 세금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감면되었다. 1711년부터 3년 동안 각 성()은 도합 3,000만 은량이 넘는 세금감면을 받았다. 강희제는 1711년부터 인두세를 내는 성인(成人)의 수를 당시의 수준에서 영원히 동결한다고 선포했다.

타이완 정벌 이후 강희제는 연안무역의 규제를 해제하고 광둥[廣東]을 포함한 4개의 항구를 외국 선박들에게 개방했다. 외국 상인들은 차·비단·도자기 같은 중국제품을 사기 위해 중국에 은()을 가져왔다. 이같은 교역과 내부의 평안은 특히 양쯔 강 이남 지역에 엄청난 산업성장을 촉진시켰다.

강희제는 학문을 매우 좋아했다.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깊어져 과로로 병석에 누웠을 때에도 책을 놓지 않을 정도였다. 1677년 쯔진청[紫禁城] '남서방'(南書房)이라는 서실을 설치하고, 이곳에서 당대의 석학들과 철학·역사 등을 주제로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그는 특히 주자(朱子) 철학에 심취하여 주자가 내세운 유교적 이상을 열심히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만주족이 세운 청조가 중국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의 신임을 얻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유교철학으로 교육을 받은 중국 관리들을 선발하는 전통적인 과거제도 외에도 강희제는 1678년 학문과 문장에 탁월한 재능을 갖춘 사람들을 추천에 의해 관리로 등용하는 특별제도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한림원(翰林院)에 임명된 50명의 인사들(이중에는 유명한 학자 朱彛尊도 끼어 있다)은 명조의 공식 사서인 〈명사 明史〉를 편찬했다. 강희제가 편찬을 명한 다른 책들로 유명한 것은 4 2,000자의 한자가 수록된 〈강희자전 康熙字典〉(1716), 중국어의 운율(韻律) 사서인 〈패문운부 佩文韻府〉(1711), 운율의 백과사전인 〈연감유함 淵監類函〉(1710) 등이 있다. 또 다른 훌륭한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 古今圖書集成〉 10만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또한 강희제 때 시작된 것이다.

교육분야를 본다면, 1669 16개조로 된 칙서를 반포했다. 이것은 선제인 순치제가 반포한 6개조를 수정·확대한 것으로 향리의 생활실천수칙을 상술한 것이다. 이 교육이념은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옹정제(雍正帝)에 의해 확대되었고, 거의 250여 년 동안 중국 농민들의 도덕적 지침이 되어왔다.

유럽의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열렬히 받아들였던 강희제는 많은 예수회 선교사들을 고용했다. 페르디낭 베르비스트로부터 기하학을 배웠는데, 베르비스트는 황실측후소의 부소장격인 흠천감부(欽天監副)가 되어 제국의 공식책력을 편찬했고, 또한 대포 제조에도 간여했다. 이 대포는 삼번의 난과 준갈이부족 정벌 때에 위력을 발휘했다.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 조아생 부베는 강희제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강희제는 또한 피에르 자르투, 장 바티스트 레지 등에게 명하여 제국의 정확한 지도를 편찬토록 했다. 측량조사는 1708년부터 시작되었고, 이들은 제국의 방방곡곡을 답사했다. 장기간에 걸친 끈질긴 측량조사 끝에 1717년에 〈황여전람도 皇輿全覽圖〉가 완성되었다. 장 바티스트 부르귀뇽 당빌이 펴낸 유명한 〈중국·타타르·티베트의 새 지도〉는 이 중국어판 지도를 프랑스어로 펴낸 것이다. 유럽의 회화 역시 강희제를 매혹시켰다.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와, 부베가 데려온 이탈리아인 조 기라르디니는 강희제가 총애했던 궁중화가였고, 이들은 유럽식 원근화법과 다른 활동들로 중국회화에 영향을 끼쳤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같이 문화적인 측면에서 청조에 기여하게 되자, 강희제는 로마 가톨릭교를 좋게 보게 되어 1692년에는 로마 가톨릭교의 중국 내 포교를 공식으로 허락했고, 그뒤에는 쯔진청 안에 프랑스 선교사들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또 자신이 말라리아에 걸려 병석에 누웠을 때 자신을 완치시켜 준 선교사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베이징에 교회를 지어 이들에게 하사했다. 황제가 로마 가톨릭교에 호의를 보이자, 도미니쿠스·프란체스코·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종단(宗團) 출신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건너오게 되었다. 제사나 공자사당 및 천신단에 의식을 올리는 전통적인 중국의례에 관대했던 예수회와는 달리, 이들 다른 종단의 선교사들은 이같은 전통의례가 로마 가톨릭교 신앙과 배치되는 미신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의례논쟁 1704년까지 맹렬하게 계속되었고, 이 해에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중국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이같은 의례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하는 회칙을 내렸다. 자신의 제국 내에 이같은 내정간섭이 벌어지는 것에 격분한 강희제는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명하여 교황의 회칙을 가지고 중국으로 오는 교황특사 카를로 토마스 톰마소 마일라르드 데 토우르논을 체포했고, 1706년에는 예수회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축출했다. 1720년에 또 다른 교황특사인 카를로 암브로조 메차바르바는 황제의 명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당했다.

강희제는 3명의 황후와 여러 명의 첩을 두었다. 한 황후는 헤세리 문중인 소닌의 손녀이고, 다른 황후는 니오후루 문중인 에빌룬의 딸이며, 세번째 황후는 퉁 문중인 툴라이의 손녀였다. 이들 비()와 빈()들은 모두 35명의 아들을 낳았다. 강희제는 1675년 한 살 반밖에 되지 않은 두번째 아들 윤잉(胤芿)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이 조치는 왕자들에게 동등한 왕위계승권을 인정하는 만주족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왕자들 사이에 끔찍한 싸움이 벌어졌다. 불운한 윤잉은 1708년에 폐위되었다가 1709년에 복권되었으나 1712년에 다시 폐위되어 영원히 복권되지 못했다. 이같은 일에 크게 상심한 강희제와 후대 황제들은 다시는 황태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1722년 설날, 황제는 궁중에서 대연회를 베풀고, 많은 원로들을 초청하여 자신의 장기간에 걸친 복된 치세를 자축했다. 그해 겨울, 강희제는 베이징의 북서쪽 교외에 있는 별궁 장춘원(長春苑)에 머물다가, 12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 다음해 베이징의 북동쪽에 있는 마란유에 묻혔고, 능은 징링[景陵]이라 불린다. 제위는 그의 4번째 아들인 윤정(옹정제)에 의해 계승되었다

 

5.세종 (世宗) 옹정헌황제 (雍正)

1722—1735 ()Yongzheng ()Yungcheng.  1678. 12. 13 베이징[北京]~1735. 10. 8 베이징. 중국 청조의 제5대 황제(1722~35 재위).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3대 황제가 된다. 이름은 윤진(),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제(憲帝). 그의 재위기간 동안에 행정기구가 확립되고 황제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이었던 옹정제는 제위를 계승할 처지가 아니었으나, 황태자가 정신병에 걸리게 되자 제위를 계승할 기회를 노려 다른 형들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다룬 일부 연대기에는 그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나와 있다. 어쨌든 아버지인 강희제가 죽자 베이징에 있던 군대의 도움을 받아 제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 초년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여 자기 형제들 중 일부와 그들의 지지자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했으며, 나머지 형제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그가 만든 첩자조직은 아주 치밀해서 관리들의 모든 행동이 그에게 보고되었다고 한다. 강희제 말년부터 자신의 재위 초년까지의 황실 기록조차 변조해서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거나 적들에게 유리한 기록이 있으면 모두 없애도록 했다.

황제 권력의 강화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조치는 친왕(親王:皇族)들이 청조의 핵심적인 군사조직인 팔기군(八旗軍)을 지휘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옹정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 8기 가운데 3기는 황제 직속으로 되어 있었지만, 나머지는 친왕들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제위에 오를 때처럼 친왕들이 이와 같은 군사력을 이용해서 개인적인 야심을 채울까 우려했으므로 모든 친왕들을 궁정 내 특별학교에 다니게 하여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교육시켰다. 그결과 팔기군은 청조 내내 황실에 대해 충성을 다했다. 1729년 옹정제는 행정적인 측면에서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최고행정기구였던 내각(內閣)을 없애고 이전의 비공식 기구였던 군기처(軍機處)를 두었다. 5, 6명의 군기처 대신들이 황제와 함께 일했으며, 황제는 매일 이들을 만나 정사를 논했다. 그들의 일은 신속하고도 비밀리에 처리되었으므로 황제는 모든 중요한 정사(政事)에 대해 친히 검토하고 지시를 내렸다.
정사(正史)의 기록으로는 그가 자연사했다고 되어 있지만 그는 일생 동안 적을 많이 만들었으므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에게 처형된 어떤 사람의 딸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유능한 통치자였던 그는 관료의 부정을 감찰할 관료기구를 만들어 후세에 남겨주었으며, 제국의 법률을 강력하게 시행했다. 또한 재정을 재정비하여 국가의 수입을 증대 시켰다. 세속적인 업적 외에도 종교연구를 꾸준히 해서 선()불교에 관한 광범위한 저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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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 종 (高宗) 건륭순황제 (乾隆)

1735—1795 ()Qianlong ()Ch'ienlung.   1711. 9. 25 중국~1799. 2. 7 베이징.  중국 청조의 제6대 황제

개요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4대 황제가 된다. 이름은 홍력(弘曆), 연호는 건륭,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순제(純帝).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치세(1735~96)를 자랑한다. 1755~60년 사이에 여러 번 군사원정을 펼쳐 중국 북동부 지방에 대한 투르크족과 몽골족의 위협을 제거했다. 새로운 성(지금의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을 창설하여 제국의 영토를 넓혔고, 중국의 남·동부 지역에서 청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유년시절과 교육

1735 10 7옹정제(雍正帝:1723~35 재위)가 죽기 직전, 건륭제는 후계자로 선포되었다. 옹정제는 제위에 오르면서 다섯째 아들인 홍력을 은밀하게 후계자로 내정해두었다. 이것은 선제(先帝)강희제(康熙帝:1661~1722 재위)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홍력이 실제 황태자로 지명되었을 때, 위의 네 왕자들은 모두 죽고 없던 상태였다. 강희제는 손자인 홍력의 뛰어난 자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래의 황제로 점찍어두고 만반의 준비를 시켰다. 홍력은 철저하게 계획된 교육을 받은 뒤,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1733년에는 왕자들 가운데 으뜸인 화석보친왕(和碩寶親王)에 책봉되었다. 1735 10 18, 24(중국식으로는 25)의 나이로 제위에 오르게 되었고, 건륭이라는 연호를 쓰면서 60년이 넘게 통치했다.

용모와 인품

큰 키에 준수한 몸매로 단정한 자세를 늙을 때까지 잃지 않았으며 강건한 체력과 활동적인 성품으로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았다.

건륭제는 베이징에 있든 러허(熱河:지금의 청더[承德], 중국 동북부 지역으로 청의 근거지)에 있든, 또는 베이징 근처의 원명원(圓明園)에 있든, 정해진 의식절차에 따라 규칙적인 하루 일과를 보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혼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 뒤, 대신들이 가지고 온 보고서와 비망록을 결재하고, 관계 신하들을 접견하여 지시사항을 내렸다. 오후 2시에는 황실 주방에서 만든 몇 가지 음식을 골라 약 15분에 걸쳐 혼자서 점심을 먹었다. 한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한 뒤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서예를 하거나, 시를 쓰거나, 학자들과 토론을 하면서 오후를 보냈다. 가끔 황후나 가족들을 만나기도 했다. 다과류의 간단한 음식을 먹을 뿐 저녁은 먹지 않았고, 술도 전혀 마시지 않았다.

건륭제는 검소하고 조직적인 사람이었지만, 흥취를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인품은 온화했고, 궁중에서 연회를 베푸는 것도 좋아했다. 설날에는 황궁 주변 길을 행상들에게 개방했고, 또 축제 분위기에 젖어 황궁 주변을 거닐기도 했다. 사생활을 살펴보면, 1727년에 결혼한 첫째 아내 효선(孝善)황후를 지극히 사랑했다. 1730년에 이 황후에게서 얻은 아들이 자신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1738년에 죽고 말았다. 둘째 아내인 울라나라는 1750년에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건륭제와 사이가 좋지 않아 1765년에 궁중생활을 포기하고 여승이 되었다.

건륭제는 후궁들로부터 17명의 아들과 10명의 딸을 얻었다. 후궁들 가운데 한 사람인 향비(香妃)는 속설에 따르면, 건륭제가 매우 총애했던 애첩이었다고 한다. 향비는 중앙아시아의 야르칸드(지금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족장의 미망인으로 1759년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 건륭제는 향비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았고, 그녀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작은 모스크와 터키식 목욕탕, 그리고 이슬람교식 시장을 만들어 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향비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대면 황제를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면서 정조를 지켰다고 한다. 2년 뒤, 황제가 없는 틈을 타서 건륭제의 어머니 효성헌(孝聖憲)황후가 향비에게 명하여 자결하게 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에도 건륭제의 효심은 변함이 없었고, 어머니가 1777년 죽을 때까지 자주 찾아가 경의를 표했다

치세와 업적

18세기에 들어와 경작지의 증대, 매우 빠른 인구증가, 황제의 선정에 힘입어 국력이 절정에 이르렀다. 건륭제 때 청조는 영토가 가장 넓게 확장되었다. 몇 차례에 걸친 북동부 지역 군사원정(1755~60)에 힘입어 이 지역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또한 늘 소요를 일으키던 투르크족과 몽골족을 제압하여 중국제국에 늘 위협을 주던 외침의 위험을 없앴고, 새로운 성을 창설했다. 이로써 제국의 영토가 약 160만㎢ 정도 늘어나게 되었다. 남방지역에서는 원정이 그리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이 원정에 힘입어 청의 권위가 더 튼튼하게 되었다. 티베트의 라싸에서 일어난 반청(反淸)반란(1752)은 쉽게 진압되었고 달라이 라마의 손에서 실권을 빼앗아 2명의 중국 고위 총독에게 넘겨주어 티베트에 대한 지배를 굳건히 했다. 이로 인해 네팔의 구르카족이 티베트 변경을 더 이상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고(1790~92), 이때부터 구르카족은 청에 주기적으로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 조공). 윈난[雲南:중국 남서부 지역] 서부에서 일어난 현지 부족의 반란에 대한 진압작전(1748)버마 부족들에 대한 원정(1769)은 실패로 끝났지만, 1776년에 새로운 토벌군을 보내어 윈난 지역의 반란을 마침내 진압했다. 버마도 내부의 갈등과 이웃나라 샴과의 전쟁으로 피폐해져 마침내 1788년 청에 조공을 바치겠다고 동의해왔다. 적대적인 파당들이 권력투쟁을 하고 있던 안남(安南:지금은 베트남의 일부) 1788~89년에 걸쳐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처음에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나중에는 크게 패배했다. 그런데도 하노이의 새 통치자는 청을 종주국으로 섬기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동부지방인 타이완 섬에서 거세게 일어난 반란도 1787년에 진압했다. 그러나 이같은 군사적 원정에 드는 막대한 비용은 한때 튼튼했던 국가재정을 심각하게 고갈시켰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건륭제의 통치기간 가운데 마지막 20년 동안에 벌어졌던 부실한 재정관리·사치·부패 등이었다. 이 때문에 청조는 그 뒤 오랫동안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건륭제는 65세 되던 해에 젊은 관리 화신()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화신은 중책을 맡게 되었고, 그의 아들은 건륭제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후 건륭제는 화신에게 막강한 권력을 주어, 제국 내의 실권자가 되게 했다. 화신은 똑똑한 사람이긴 했지만 재산과 권력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화신이 권력을 잡고 있던 시기, 특히 건륭제의 말년에는 정실(情實)과 부패가 너무 심해져 청의 기풍은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건륭제의 화신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건륭제의 뒤를 이은 가경제(嘉慶帝)는 건륭제가 죽은 뒤에야 화신을 제거할 수 있었다. 가경제는 화신을 체포하여 모든 중책에서 해임시키고 재산을 몰수한 뒤, 그가 황실의 인척임을 감안하여 스스로 자결하게 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예술에 대한 애호

건륭제는 예술과 문학의 진흥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문학). 이때는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을 황제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건륭제 자신의 작품이 몇이나 되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시와 산문을 쓰고, 서예를 하고, 그림을 그렸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 고전의 편찬사업을 장려했다는 것이다. 1772년 중국의 전통적인 4개 학문 분야인 고전·역사·철학·문학(經史子集)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저서만을 선정·편찬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고전서 四庫全書〉는 황실과 개인의 서고를 모두 섭렵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학자 기윤(紀昀)을 중심으로 한 여러 학자들에 의해 10년 동안 편찬되었고, 건륭제 자신도 자료선정에 몇 번 참가하기도 했다. 3 6,275권으로 구성된 〈사고전서〉의 필사본 7부가 1782~87년 사이에 베이징·러허·펑톈[奉天:만주어로는 무크덴원명원 등에 있는 주요황궁들과 그밖에 학자들 전용 도서관에 배부되었다. 〈사고전서〉의 목록인 〈사고전서총목제요 四庫全書總目堤要〉는 중국의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도서목록 안내서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중국문학에 이같이 극적으로 기여한 반면, 가혹한 검열제도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1774년 건륭제는 반만사상(反滿思想)을 직접·간접으로 담은 모든 불온서적을 삭제하거나 없애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불온서적 검열을 위해 목록이 작성되었고, 1774~88년 사이에 집행관들에게 관내의 공공 및 개인도서관을 일제 조사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이때, 2,600종이나 되는 책들이 분서(焚書) 조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이나 한국 또는 일부 유력한 만주족 인사의 도서관에 사본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수백 권에 달하는 책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 완간된 뒤에도 〈사고전서〉는 여러 군데 수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건륭제가 불온하다고 생각하는 몇몇 저서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희·옹정 연간에 활짝 피었던 예술의 개화(開花)는 건륭연간에도 지속되었다. 건축·회화·도자기가 발달했으며, 특히 비취·상아 세공이 매우 발달하여 후에는 수출용으로만 생산되었다.

할아버지인 강희제와 마찬가지로 건륭제는 예술가들을 애호했다. 카스티글리오네나 장 드니 아티레 같은 유럽 선교사들의 화가적 재능을 높게 평가하여 각별히 아꼈다. 여러 가지 기계류와 기계장치들을 만들어낸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식과 기술을 칭찬했으나, 선교사들을 지적 만족의 원천이며 흥미 있는 물건의 창조자라고 생각했을 뿐, 그 이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베이징 부근의 원명원을 꾸미는 데 많은 신경을 썼고, 점점 더 자주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수많은 건축물·호수·정원으로 둘러싸여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원명원이 황궁으로는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대지를 넓히고 새로운 건물들을 세웠다. 건륭제의 요청에 따라, 여러 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과 같은 양식의 분수대 주변에 개조된 이탈리아식의 궁전과 정원을 지었다. 이는 서구의 17~18세기 건축물과 비슷한 바로크와 로코코식 건물이었으나, 지붕은 중국식이었다

서방과의 관계

건륭제는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태도를 취했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예수회 선교사들과 개인적으로는 매우 좋은 친분관계를 유지했으나, 로마 가톨릭교에 대한 황실의 거리감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18세기초에 강희제와 교황 특사간에 벌어졌던 '전례문제'(조상제사와 로마 가톨릭교의 양립문제에 대한 논쟁) 이후 로마 가톨릭교의 가르침은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었다. 비록 각 성에서의 선교활동은 계속 허용되었지만 지방관청은 그들의 선교에 강한 적대감을 보였고, 전체 신도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그 뒤 영국 정부는 중국과 교역을 넓히려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중국과의 교역은 광저우 항[廣州港]으로 제한되었다. 1793 9월에는 매카트니 경이 인솔한 특별사절단을 접견했으나, 그들이 제시한 요구사항은 거절했다.

양위

60년을 통치한 뒤 할아버지 강희제의 치세가 61년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1795 10 15일 다섯째 아들인 옹염( )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제위를 물려주었다. 1796 2 9(중국 책력으로는 신정) 가경(嘉慶)이라는 새로운 연호가 제정되었으나, 건륭제가 죽을 때까지 건륭이라는 연호를 그대로 썼다. 건륭제는 죽을 때까지 실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실제로 따지면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에 있었던 황제이다.
평가

20세기까지 건륭제는 예술과 문학의 애호가로, 외부세계의 새로운 사상들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가진 위대한 건설자로, 제국을 놀라울 정도로 번영시키고 잘 다스린 영명한 군주로 평가되었다. 베이징의 궁중에서 살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철학자의 모습을 지닌 황제라는 인상을 서방에 전파했고, 18세기의 서구 철학자들은 이에 자극을 받아 계몽군주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더 크게 키워나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중국과 서방에서 발표된 역사연구는 건륭제의 치적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대신 여러 번에 걸친 군사원정이 가져온 재정부담, 궁중 안의 과다한 사치와 낭비, 18세기말에 제국의 행정을 좀먹은 부정부패, 파괴적으로 진행된 검열제도를 허용한 전제정치 등을 강조하고 있다.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위대한 군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가 후계자에게 물려준 청제국은 너무나 허약하고 미비했기 때문에, 19세기 중엽에 서방에 의한 충격을 이겨낼 수 없었다.


 

7.인종 (仁宗) 가경예황제 (嘉慶)

1795—1820 ()Jiaqing ()Chiach'ing. 1760. 11. 13 중국 베이징~1820. 9. 2 후베이 성[湖北省] 러허[熱河:지금의 청더(承德)]. 중국 청조(淸朝) 7대 황제(1796~1820 재위).

이름은 옹염(雍琰). 시호는 예제(睿帝). 묘호는 인종(仁宗). 쇠퇴하고 있던 청제국을 부분적이나마 되살리려 노력했다. 1796년에 아버지 건륭제(乾隆帝:1735~96 재위)가 퇴위하자 즉위하여 가경이라는 연호를 썼다(→ 건륭제). 그러나 1799년까지는 아버지와 부패한 관리 화신()이 권력을 계속 장악했고, 가경제 자신은 의식행사(儀式行事)를 이끄는 정도의 일만을 했다.
그동안 중국 중부와 서부에서 백련교도의 (1796~1804)이 일어났으며, 화신과 그 측근들이 군비를 횡령하려 한 탓에 반란진압이 늦어졌다. 1799년 건륭제가 죽자 가경제는 즉각 화신을 잡아들여 자살하도록 했으며, 난을 진압하기 위해 능력있는 장군들을 기용했다. 그러나 힘이 고갈된 청군(淸軍)이 난을 수습하는 데는 5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또 남해안에는 해적들이 들끓기 시작하여 교역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으나 10여 년(1800~10)이 지난 뒤에 이들을 소탕할 수 있었다
(→ 백련교도의 난).
건륭제가 죽고 화신이 체포된 뒤에 가경제는 황실재정을 복구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는 강력한 통치자가 못되어서 만연한 관리들의 부패를 없애기보다는 궁중의 경비를 줄이는 정책을 취했다. 이런 조치는 황족들을 언짢게 했다. 이 정책은 국가재정을 복구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조정이 갈수록 무력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정부수입을 더 늘리기 위해 높은 관직을 팔았던 것 때문에 실제로 부패는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백성들의 세금부담은 여전히 과중한 상태였다. 1803년 폭도들이 길에서 가경제를 습격했으며, 1813년에는 한 무리의 음모자들이 궁전을 급습하려 했다. 그는 청조의 가장 인기 없는 황제로 삶을 마쳤다.


8.선종 (宣宗) 도광성황제

(道光) 1820—1850 )Daoguang ()Taokuang. 1782. 9. 16 중국 베이징[北京]~1850. 2. 25 베이징.중국 (淸朝)8대 황제. 이름은 민녕(旻寧). 묘호는 선종(宣宗). 시호는 성제(盛帝). 재위기간(1820~50) 동안 기울어가는 국세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20년에 도광이라는 연호로 즉위하여 이전 황제들의 통치기간에 크게 줄어들었던 황실재정을 개인적인 검약을 통해 복구하고자 애썼다. 그가 제위에 있을 때 홍수와 기근을 막기 위해 황허 강[黃河]의 제방을 고치고 대운하를 수리하는 일이 절박해졌다. 이는 당시 대운하가 중국 남부에서 수도 베이징[北京]까지 쌀을 운송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패한 관리들은 운하의 수리비를 횡령했고, 도광제는 운하의 수리문제가 더 악화되지 않을까 우려하여 노동자 수의 축소를 꺼려 했다. 1849년에 이르러서는 대운하가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해적들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해상으로 쌀을 운반하게 되었다. 또한 일자리를 잃은 수천 명의 운하 선원들이 소요의 불길을 부추겼다. 한편 서양 상인들의 아편무역을 막으려 한 도광제의 조치가 불씨가 되어(1838) 영국과의 제1아편전쟁(1839~42)이 일어났고, 이에 따른 전쟁비용과 평화협정 조건에 따라 영국에 지불한 막대한 배상금이 국내의 불만을 더욱 커지게 했다. 도광제는 태평천국운동(1850~64)으로 알려진 대규모 정치적·종교적 성격을 띤 소요가 중국 남부를 휩쓸기 시작하던 무렵에 사망했다.

 

 

9.문종 (文宗) 함풍현황제 ()

1850—1861 ()Xianfeng ()Hsienfeng. 1831~1861.중국 청조의 제9대 황제(1850~61 재위).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7대 황제가 된다. 여진 이름은 애신각라(愛新覺羅). 본명은 혁저(). 묘호는 문종(文宗). 연호는 함풍. 도광제(道光帝)의 넷째 아들이다. 당시 중국의 정치상황은 부패한 데다 내우외환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1853년 태평천국군은 난징[南京]에 수도를 정하고 북벌을 위해 출병하여 베이징[北京]을 위협했다. 1856년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청 조정은 전국의 팔기(八旗녹영(綠營 : 청대 정규군의 일종)의 군사와 상군(湘軍)을 소집하여 태평군과 싸웠으며, 대외적으로는 타협적으로 투항했다. 1858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다구[大沽] 포대를 점령했을 때 함풍제는 계량(桂良)과 화사납(花沙納)을 파견하여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과 톈진 조약[天津條約]을 체결했다.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공했을 때 원명원(圓明園)이 불타버렸고, 함풍제는 러허[熱河 : 지금의 청더(承德)]로 도망갔다. 동생 혁흔(奕訢)이 베이징에 남아 영국·프랑스와 각각 베이징 조약을 맺어 화약했다. 2차 아편전쟁중에는 많은 영토를 상실하게 된 러시아와 아이훈 조약[琿條約], 베이징 조약을 체결했다. 1861 8월 러허의 행궁(行宮)에서 병으로 죽었다.

 

10.목종 (穆宗) 동치의황제 (同治)

 1861—1874 )Tongzhi ()T'ungchih. 1856. 4. 27 베이징~1875. 1. 12 베이징.중국 청조의 제10대 황제(1861~75 재위).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8대 황제가 된다. 이름은 재순(載淳), 묘호는 목종(穆宗), 시호는 의제(毅帝).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고 있던 청은 동치제가 제위에 있을 때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았다. 이를 일컬어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 한다. 그는 6세에 즉위해 어머니 서태후(西太后 : 1835~1908)가 중심이 된 3인 섭정체제에서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동치중흥은 한( : BC 206~AD 220)과 당( : 618~907) 중엽에 있었던 위대한 유신(維新)들을 본떠서 일어난 부흥운동이었다. 동치 원년(1861)에 청 정부는 당시 중국 남부를 위협하던 태평천국운동(1850~64)을 마침내 수습하고 중국 북부에서 일어났던 염군(捻軍)의 난(1853~68)을 진압했다. 황실재정이 복구되었으며 훌륭한 인재들을 관직에 새로이 등용했다. 오랫동안 반군(反軍)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에 다시 과거시험을 실시했다. 또 농민에게 씨앗과 농기구를 나누어주고 토지개간을 장려해 농업생산을 다시 활성화시켰다. 여전히 유교경전을 공부하는 것만이 관리로 출세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외국기술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피상적인 성공에 그쳤지만 서양무기제조계획이 실시되었다. 외교문제를 다루기 위해 총리아문(總理衙門)을 새로이 설치했으며 서양에 대해 알고 대응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17세가 되던 1873년에 친정(親政)을 시작한 동치제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 가운데 하나는 6개국의 대표들에게 자신을 알현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동치제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사절이 황제를 알현할 때 개두의식(磕頭儀式 : 간청의 표시로 이마를 3번 바닥에 대고 절하는 의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톈진 조약[天津條約 : 1858]과 베이징 조약[北京條約 : 1860]을 맺어 서양 세력들과의 긴장을 완화시키기도 했으나 병약하고 정치에 무관심했던 동치제는 계속해서 서태후의 간섭을 받았다. 그는 친정을 시작한 지 2년이 조금 지나서 사망했다.

 

 

11.덕종 (德宗) 광서경황제 ()

1874—1908 ()Guangxu ()Kuanghsü.  1871. 8. 14 중국 베이징~1908. 11. 14 베이징. 중국 청조의 제11대 황제(1875~1908 재위).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9대 황제가 된다. 이름은대첨(). 연호는 광서. 묘호는 덕종(德宗). 시호는 경제(景帝). 그의 통치기간 동안 서태(西太后:1835~1908)가 조정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면서 쇠퇴해가는 제국의 체제를 근대화시키고 개혁하려는 젊은 황제의 노력을 저지했다.

바로 전대 황제인 동치제(同治帝)가 죽자 그 어머니 서태후는 자신의 4세 된 조카를 황제로 선정했다. 그녀는 이 조카를 양자로 삼았고, 1861년부터 해오던 대로 섭정을 하면서 조정을 다스렸다. 이러한 행동은 황실의 신성한 계승원칙을 깨뜨린 것이었지만, 여기에 대한 반대는 모두 진압되었고 1875 2 25일 이 젊은 왕자는 광서라는 연호로 즉위했다.

1887년 광서제는 친정(親政)할 나이가 되었지만, 정책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서태후로부터 정권을 이어받을 때까지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898 27세가 되자 마침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백일 유신'으로도 알려져 있는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실행하면서 그는 자신의 측근에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관료들을 등용하고 광범위한 개혁의 칙령들을 반포했다. 이렇게 되자 보수적인 관료들이 반발했다. 제국군대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영록(榮祿:1836~1903)의 도움을 받아 서태후는 다시 수도로 돌아와 황제를 황궁에 유폐하고 나서, 그가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황제의 죽음이나 폐위를 바라지 않았던 외국열강이 그의 생명을 구하기는 했지만, 그 후 그는 아무런 권력도 갖지 못했다.

1908 11 15일에 서태후가 죽었고, 매우 미심쩍게도 그때까지 건강하던 광서제가 바로 전날에 죽었다고 공표되었다. 서태후의 마지막 포고로 광서제의 3살 난 조카에게 황위가 넘겨졌고, 새로운 황제는 선통(宣統)이라는 연호로 즉위했다.


 

12.공종 (恭宗) 선통민황제 (宣統)

1908—1912 ()Puyi ()P'u-i.  1906. 2. 7 중국 베이징[北京]~1967. 10. 17 베이징. 중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1907~12 재위) 또한 일본이 세운 괴뢰정권 만주국의 황제(1934~45 재위).

청제 때의 연호는 선통제(宣統帝). 1908 11 14일에 큰아버지인 광서제(光緖帝)가 죽자, 3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라 아버지 순친왕 재풍()의 섭정을 받으며 3년간 황제로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듬해인 1912 2 12일 제위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푸이가 퇴위함으로써 267년에 걸친 만주족의 중국 지배와 2,000년간에 걸친 황제 지배체제가 끝나게 되었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궁전에서 계속 살도록 허용되었다. 그는 자신의 호칭으로 헨리라는 이름을 택했고, 이후 서구에서는 헨리 푸이로 알려졌다. 1924년 푸이는 몰래 베이징을 떠나 톈진[天津]에 있는 일본인 조계(租界)로 거주지를 옮겼다. 1932 3 9일 만주국의 집정관(執政官)이 되었고, 1934년 만주국 황제로 추대되어 연호를 강덕(康德)이라고 정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 8월 소련에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1950년 전범 재판을 받기 위해 중국으로 송환되었으며, 1959년 특사로 풀려나 다시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식물원의 기계수리상점에서 일했다. 1964~65년에 영어로 된 푸이의 자서전 〈황제에서 시민으로 From Emperor to Citizen〉가 간행되었다.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푸이(溥儀)는 후손이 없으며, 1950 조카 유얀을 후계자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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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황제 가계도>

 

1명제┬제2숭덕제─제3순치제

              └도르곤               ∥───제4강희제

                                 효강장황후       ∥───제5옹정제

                                              효공인황후       ∥───제6건륭제

                                                           효성헌황후       ∥───제7가경제

                                                                효의순황후                     

┌──────────────────────────────────────────────────────────────────────────────────┘

└제8도광제─제9함풍제┬제10동치제

                           ├제11광서제

                           └□─제12선통제

                                        

                                효각민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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