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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021

임진왜란 임진사충신 4번째 김천일 생애와 평가

임진왜란 의병장들중에 고경명, 김천일, 조헌, 곽재우 등을 임진사충신으로 불린다. 임진사충신 4번째 김천일에 대해 알아 본다. 1.출생 및 가계김천일(金千鎰, 1537년 ~ 1593년)은 1537년 전남 나주군에서 진사(進士) 김언침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사중, 호는 건재(健齋), 본관은 언양이며, 시호는 문렬(文烈)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이항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573년(선조 6년) 학행으로 발탁되어 군기시 주부가 되었고, 이후 용안현감과 강원도·경상도의 도사를 역임하였다. 사헌부 지평 때 상소를 올렸다 좌천되어 외직으로 나갔으며, 1578년(선조 11년) 임실 현감을 지냈다. 이후 담양부사·한성부 서윤·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2.임진왜란1592년 임진왜란 때에 나주에서 고경명(高敬命), 최경회..

역사/인물 2015.04.06

전성기를 이룬 왕의 묘호 세종(世宗)

조선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의 묘호는 국가의 전성기나 안정기를 이룬 황제나 왕제게 붙여진 것으로 다른 묘호들에 비해 많은 왕들이 받았고 받기를 원했다. 가장 인기 있는 묘호 세종을 받은 왕들에 대해 정리해 본다.동아시아의 왕(황제) 묘호 3탄 전성기를 이룬 왕 세종(世宗) 설명 1.조선 - 세종대왕조선의 제4대왕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년 5월 7일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 성(姓)은 이(李), 휘(諱)는 도(祹), 본관(本貫)은 전주(全州), 자(字)는 원정(元正). 사후 묘호(廟號)는 세종(世宗), 시호(諡號)는 장헌대왕(莊憲大王)으로, 정식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

역사/세계사 2015.04.06

왕조 시대 공덕을 칭송하여 주던 시호(諡號) 설명

왕조국가에서 임금이나 정승,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주던 시호(諡號)에 대해 알아 봅니다. 1.시호와 사시 개요시호(諡號)는 죽은 인물에게 국가에서 내려주거나 죽은 군주에게 다음 군주가 올리는 특별한 이름으로, 동양의 봉건 왕조 국가에서 시행되었다. 시호를 받는 대상은 황제, 제후, 임금 등의 군주와 그 조상 및 부인, 공신, 고급 관료, 기타 국가적으로 명망을 쌓은 저명한 인물이다.시호는 국가가 부여하는 공적인 시(諡)로서, 개인이 붙이는 사시(私諡)와 구별되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시(諡)는 전자 쪽이다. 시호를 붙이는 제도의 기원은 중국 주나라 중기 때(기원전 9세기경)로 언급되며, 천자 뿐만 아니라, 제후・경대부・고관・저명한 유학자 등에게 내려졌고, 시대가 흘러 고승도 대상이 되..

역사/세계사 2015.04.06

동아시아 왕조 국가 왕(황제)의 사후 붙여지는 묘호 설명

동아시아(한국, 중국, 동남아) 왕조 국가에서 왕(황제)의 사후 붙여지는 묘호에 대해 알아 봅니다. 1.개요묘호(廟號)는 중국, 한국, 베트남 등 동양의 봉건 왕조 국가에서 황제 또는 국왕과 같은 군주에게만 붙인 칭호로 사후 태묘(太廟, 또는 종묘)에서 군주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었다. 두 글자로 이루어지며 앞자는 시호법에 따라 군주의 치세와 업적을 뜻하는 글자인 시자(諡字)이고 뒷자는 ‘조’(祖) 또는 ‘종’(宗)을 붙이는 종호(宗號)이다. 군주와 신하 모두에게 바쳐질 수 있는 시호와는 달리, 묘호는 오로지 종묘에 그 위패가 합사된 군주만이 받을 수 있었다. 본래 묘호는 개국 군주와 같이 공과 업적이 큰 소수의 군주들에게만 허락된 칭호였다. 그래서 중국의 고대 왕조 상대에서 한(漢)대까..

역사/세계사 2015.04.06

동아시아의 왕(황제) 묘호 2탄: 중흥의 뜻을 담은 중종(中宗)

중종(中宗)은 동아시아 제왕의 묘호 중 하나로, 흔히 국가적 위기에서 나라를 바로 세운 제왕이나 이미 망한 나라를 다시 중흥한 제왕에게 쓰인다. 중종의 묘호를 썼던 왕들을 요약해 본다.동아시아의 왕(황제) 묘호 2탄: 중흥의 뜻을 담은 중종(中宗) 1. 상나라의 제9대 왕(10대 군주) 태무(太戊)태무(太戊)는 상나라의 10대 군주로 때어날 때의 이름은 자밀(子密) 또는 자주(子伷)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형인 옹기에 이은 상나라의 9대 군주였다. 현인 이척(伊陟)을 재상으로 해 상나라를 부흥시켰다. 입궐하지 않았던 제후도 이 때에는 입궐하게 되었다고 한다. 75년간 통치하였고 중종(中宗)으로도 불리며 아들인 중정이 뒤를 이었다.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따르면 삼촌인 소갑에 이어 상나라의 7대 군주..

역사/세계사 2015.04.05

임진왜란 의병장 중봉 조헌 (重峯 趙憲) 생애와 평가

임진왜란하면 칠백의총과 의병장 조헌 선행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고경명·김천일·곽재우와 함께 임진 4충신(壬辰四忠臣)의 한 사람인 중봉 조헌에 대해 알아본다. 임진왜란 의병장 중봉 조헌 (重峯 趙憲)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조헌(趙憲, 1544년 ~ 1592년)은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렬(文烈). 본관은 배천(白川). 성혼의 문인이다. 참고로 배천 조씨는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 조광윤의 후손이다. 2.생애, 관료생활조헌은 5살 때에 글을 읽는 등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효성이 있고 유순했다. 집은 가난했지만 12세 때부터 김황(金滉)에게 시와 글을 배워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567년(명종 22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에 ..

역사/인물 2015.04.05

임진왜란 의병장 임진사충신 제봉 고경명

임진왜란 의병장들중에 고경명, 김천일, 조헌, 곽재우 등을 임진사충신으로 불린다. 곽재우에 이어 고경명에 대해 설명해 본다. 1.출생과 가계고경명(髙敬命, 1533년 ~ 1592년)은 1533년 광주 압보천에서 대사간 고맹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본관은 장흥(長興),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2.명종시대 관료 생활1552년(명종 7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동시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58년(명종 13년) 식년시 문과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전적에 임명되고, 이어 공조좌랑이 되었다. 형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를 거쳐 1563년 교리가..

역사/인물 2015.04.05

임진왜란, 오만하고 무모했던 신립 (申砬) 장군 생애와 평가

신립(申砬, 1546년 10월 23일 ~ 1592년 4월)은 무과에 급제해 오위도총부와 진주판관, 한성판윤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첫 해에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펼치고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탄금대 패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무능한 전술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오늘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 신립의 탄금대 전투에 대해 아주 간략히 나왔다. TV에서 신립의 최후를 너무 장엄하게 묘사를 했는데, 당시 전투 상황은 비참했다고 여겨진다. 신립에 대한 인물평을 정리해 본다.임진왜란, 오만하고 무모하고 무능했던 신립(申砬) 장군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신립은 명종 원년(1546년) 10월 23일 평산 신씨 화국과 부인 파평 윤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 ..

역사/인물 2015.04.04

임진왜란 진주대첩의 영웅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 일대기와 평가

임진왜란 3대대첩 진주대첩(제1차 진주성 전투)의 영웅 위대한 승리를 남기고 전사한 충무공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 일대기와 평가 1.출생 및 가계김시민(金時敏, 1554년 ~ 1592년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 본관은 (구)안동,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 고려 때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13대손이자 지평(持平) 김충갑(金忠甲)의 셋째 아들. 2.전쟁 전1578년(선조 1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으며, 1581년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경기어사의 서찰로 구황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1583년 여진족 이탕개가 회령(會寧)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다. 그 공으로 훈련원 판관(判官)이 되었다. 이때 그는 군대 ..

역사/인물 2015.04.01

임진왜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의병장 김덕령, 누가 죽였나?

김덕령은 임진왜란 당시 호남 의병장의 지도자로 호남 의병장인 김천일과 최경회의 의병군이 진주에서 전멸한 뒤 다시 광주에서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의병이 조직되었다. 일본군이 침략하자 자발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항전하였으나 이몽학의 난 관련자로 무고되어 억울하게 처형된 비운의 인물이다. 임진왜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의병장 김덕령, 누가 죽였나? 1.출생과 가계김덕령(金德齡, 1567년~1596년 8월) 본관은 광산·,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별칭은 신장(神將), 충용장(忠勇將), 익호장군(翼虎將軍).1567년 광주(光州) 충효동 성안 마을에서 아버지 김붕섭(金鵬燮)과 직장(直長) 반계종(潘繼宗)의 딸인 어머니 남평반씨(南平潘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에 형 덕홍(德弘..

역사/인물 2015.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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