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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021

임진왜란중 발생한 최악의 반란 사건 이몽학의 난(李夢鶴亂)

이몽학의 난(李夢鶴-亂)은 1596년 임진왜란 당시 강화협상중이던 시기 정유재란 발발 1년전 이몽학이 불만에 찬 농민들을 선동해 충청도 일대에서 일으킨 반란이다.임진왜란중 발생한 최악의 반란 사건 이몽학의 난(李夢鶴亂) 1.반란 전왕족 서얼 출신인 이몽학(李夢鶴, ? ~ 1596년)은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전라도를 떠돌아다니다가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선봉장이 되었다. 한현은 관원으로 충남전역을 다니며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전에 일어난 송유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감시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몽학 뿐만 아니라 한현, 권인룡, 김시약 등도 서얼 출신으로 계급적 한계로 인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2. 반란 선동과 진행수년을 끈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황폐해지고 흉년까지 겹쳐 ..

임진왜란 위대한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 (郭再祐) 생애 평가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1552년 8월 28일 ~ 1617년 4월 10일)는 임진왜란 당시 크게 활양한 의병장으로 초야에 묻혀살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군이 일본군에게 전멸 당하자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스스로 의병을 조직, 붉은 비단으로 된 갑옷을 입고 활동하여 천강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용맹성에 놀란 왜병들은 곽재우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다. 임신사충신 곽재우의 생애를 정리해 본다.임진왜란 의병장이며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는 훌륭한 인물이며 위인이었다. (곽재우의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곽재우는 1552년 8월 28일 경상도 의령(宜寧)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지내고 사후..

역사/인물 2015.03.31

임진왜란 강화 회담

임진왜란 제2차 당항포 해전, 장문포 해전 그리고 강화 회담과 소강상태. 1.제2차 당항포 해전 이순신장군의 12번째 해전으로 1594년 4월 23일(음력 3월 4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아군 연합함대 124척을 출전시키고 부하 어영담을 시켜 당항포의 왜군들을 치게 했다. 새벽에 함선 20척을 거제도 견내량으로 보내 수비하도록 하고 동시에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서 20척, 전라우수영에서 11척을 선발해 공격 함대를 선발했다. 어영담이 지휘한 함대는 창원시 진동면 진동리 진해선창에 정박하던 왜선 10척을 협공하여 창원시 진동면 고현리 읍전포에서 6척을, 고성군 회화면 어신리 어선포에서 2척을, 나머지 2척은 고성군 동해면 양촌리 법동마을 아자음포에서 격침시켰다 이순신과 전라우수영 이억기는 나머지 함대..

임진왜란 광해군의 분조와 의병의 활동, 명나라 군대의 참전

조정에서는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조정인 분조를 꾸렸는데 평양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이를 이끌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의병 부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인정한다. 이는 조선이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를 시행하였으므로 당연한 절차다.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의 보급로와 통신망을 차단하여 일본군을 곤란에 빠뜨렸다. 의병의 봉기로 민심은 차츰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조선 관군도 재기할 시간을 벌었다. 명(明)에서 온 원군의 활약과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동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소강(小康)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임진왜란 광해군의 분조와 의병의 활동, 명나라 군대의 참전 1.광해군의 활약의병장에게 관직을 주고 무과에 급제하고 현감 이상 관직이 있는 관리로서 대우해줬지만, 의병장을 대상으..

임진왜란 도망가기 바빴던 선조의 몽진과 백성들의 분노

임진왜란이 발생한지 얼마되지 않아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 등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인솔하여 울산·영천 등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해 한양으로 진군한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진하고 신립의 탄금대에서 대패하자. 조선 선조과 조정은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한다. 임진왜란 도망가기 바빴던 선조의 몽진과 백성들의 분노 1.왜의 한양 입성과 도망치는 조정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선의 왕과 백관은 여러 비상대책을 강구하였다. 신립의 패보는 한양의 인심을 극도로 동요시키고 선조는 마침내 정신(廷臣)과 더불어 한양을 떠나 개성·평양 방면으로 도망치고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

임진왜란 왜장과 함께 목숨을 버린 의기 논개 (義妓 論介) 생애 설명

논개 (의기 주씨(義妓朱氏) 또는 의부 주씨(義婦朱氏) 1574년 9월 3일 ~ 1593년) 조선 선조 때의 관기이다. 임진왜란때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장을 꾀어내어 그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다만, 논개(論介)라는 이름은 그녀의 본명인지 별칭인지 확실하지 않다. 주달문과 밀양박씨의 딸이며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첩이었다. 본관은 신안(新安). 전라북도 출신.임진왜란 2차 진주성 전투 패배후 왜장과 함께 목숨을 버린 의로운 여인. 의기 논개 (義妓 論介) 생애 설명1.생애 요약논개는 전라북도 장수 계내면 대곡리 주촌 출생으로, 성은 주씨(朱氏)이며, 1574년 주달문(朱達文)과 밀양박씨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주달문은 전라북도 장수현 계내면 주촌의 훈장으로 생활했으며, 일직 아들 ..

역사/인물 2015.03.29

임진왜란 왜군의 보복전 무차별 학살 제2차 진주성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7월 20일(음력 6월 22일)부터 같은 달 27일(음력 6월 29일)까지 진주성에서 3천여 명의 조선군과 6만여 명의 민간인 그리고 10만여 명의 일본군과의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진주목사 서예원을 비롯하여, 김천일, 최경회 등 대부분의 장수가 남강에 투신하거나 전사를 하였다.임진왜란 왜군의 보복전 무차별 학살로 이어진 제2차 진주성 전투 1.배경임진년 1592년 11월 8일(음력 10월 5일)부터 13일(그달 10일)까지 6일간에 걸쳐 약 3만의 병력으로 총공세를 펼쳤다가 실패한 일본군은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을 확보하고 진주대첩(1차 진주성 전투)의 보복을 위하여 집요하게 진주성 공략을 준비한다. 이듬해 계사년 1593년 거의 모든 일본군을 ..

임진왜란 3대 대첩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행주대첩 의미와 결과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 크게 이긴 전투)으로 불리고,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도 불리고,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로 불린다.임진왜란 3대 대첩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행주대첩(幸州大捷) 의미와 결과 1. 전투 배경임진왜란 초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이치 전투와 독성산성 전투 등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가 된 권율은 행주산성에 웅거하며 명군과 합세해서 한양을 탈환하려다 명군이 벽제관에서 대패하여 평양으로 돌아감으로써 고립 상태에 빠졌다. 한편 일본군은 총퇴각을 하던 중 벽제관..

임진왜란 오만했던 명나라의 참패 벽제관 전투(碧蹄館 戰鬪)

벽제관 전투(碧蹄館 戰鬪) 1593년 2월 27일(음력 1월 27일) 임진왜란 중 벽제관(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에서 일어난 명과 일본의 전투로 명나라의 참패로 끝났다. 벽제관에서 남쪽 3㎞ 지점에 있는 여석령(礪石嶺 : 일명 숫돌고개)에서 일어났으므로 여석령전투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오만했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 군대의 참패 벽제관 전투(碧蹄館 戰鬪) 1.전투전 상황4차에 걸친 평양선전투 끝에 1593년 2월 9일(음력 1월 9일) 조명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탈환된다.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장수 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가 전선에서 무단이탈하는 등 일시적 혼란 상태에 있었다. 부교(奉行)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북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일본 장수들을 한성(漢城)으로 모아 전력을 가다듬..

임진왜란 왜의 장수 소 요시토시(そう よしとし 종의지) 생애와 평가

소 요시토시(そう よしとし 宗義智(종의지) 1568년 ~ 1615년 1월 31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 걸쳐 활약한 왜의 무장 겸 다이묘. 소(宗) 가문의 20대 당주이며 쓰시마 후추 번의 초대 번주. 키리시탄(가톨릭)으로 세례명은 다리오. 임진왜란 초기 왜의 1군이었던 고니시 유키나의 사위(딸의 이름 고니시 마리아)로 고니시와 함께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었다. *참고: 실재 발음은 '소오~'라고 하지만 한글 표기는 '소' 요시토시로 한다.임진왜란 왜의 장수 신중하고 영리했던 소 요시토시(종의지 = 평의지) 생애와 평가 1.출생과 가계에이로쿠 11년(1568년) 소 마사모리(宗将盛)의 4남으로 출생. 제17대 당주 소 요시시게(宗義調)가 은거하면서 소 마사모리의 장자 소 시게나오(宗茂..

역사/인물 201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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