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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58

정유재란,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露梁海戰)

노량해전(露梁海戰)은 임진왜란 당시 1598년(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이순신이 이끈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수군이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워 크게 무찌른 대첩으로서, 이순신의 마지막(전사한) 해전이기도 하다정유재란,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이며 이순신의 마지막 해전이었던 노량해전(露梁海戰) 결과 설명 1. 배경명과 왜의 협상이 결렬되자 1597년 왜군은 15만 대군을 동원 조선을 다시 침공했다. (정유재란 丁酉再亂) 초기에는 원균의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고 하삼도를 유린하던 왜군은 이순신의 복귀와 명나라의 원병, 조선 의병의 활약으로 전세를 역전당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하는 상황이 되었다. 정유재란 발발 다음해인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

정유재란, 순천왜성 전투 이순신 최후의 승리 장도해전(獐島海戰) 설명

사로병진작전으로 사천성 전투가 벌어지던 때에 순천 왜성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하지만, 실재로는 육지에서 전투는 벌어지지 않고 바다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를 장도해전이라고 한다. 정리해 본다.정유재란, 순천왜성 전투 혹은 왜교성 전투(倭橋城 戰鬪)와 이순신 장군 최후의 승리 장도해전(獐島海戰) 설명 1. 풍신수길의 사망과 왜의 철군 결정1598년 8월 18일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직후 고부교(奉行)과 고다이로(大老)는 일본군의 철병을 결정한다. 2. 사로병진작전풍신수길의 사망과 철군 소식이 조선 조정에 알려지고 조·명 연합군은 철병하는 왜군을 추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변경한다.1598년 7월 경략(經略) 형개(邢驚)가 한성으로 당도하고 명군은 조선..

이순신에 고개숙인 명의 제독, 광동진씨의 선조 진린 (陳璘) 생애

정유재란 당시 명의 수군 장수로 참전한 진린은 초기에는 이순신에게는 골칫덩어리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결국 이순신 장군의 인품에 감탄하고 진심으로 존경을 하게되는데,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은 진린의 태도 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진린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본다.이순신의 인품에 고개를 숙인 명의 제독 광동진씨의 선조 진린(陳璘) 생애 1.생애 요약진린(陳璘, 진인, 중국어: 천린, 1543년 ~ 1607년)은 중국 광둥성 사오관 출신의 무관이며 수군 제독(提督)이었다. 1562년 명나라 관직에 출사하고, 광동 수비대에 소속되었다 폭동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난아오현(南澳县)의 부사령관직을 맡게 된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시 어위도총관 및 전군도독부도독(前軍都督府都督) 직책으로 명의 수군 5..

역사/인물 2015.07.24

조선 수군의 대승 절이도 해전(折爾島海戰)이 평가 절하된 이유 설명

절이도 해전(折爾島海戰, 1598년)은 선조 31년인 1598년 8월 20일(무술년 음력 7월 19일) 절이도(거금도)에서 조명 연합 수군과 왜의 수군 사이에 벌어진 해전으로 수정실록에는 상세한 기록이 빠져있다. 대승이라고만 기록이 되었는데, 절이도 해전이 왜 평가가 절하되었는지 정리해 본다.정유재란, 조선 수군의 대승 절이도 해전(折爾島海戰)이 평가 절하된 이유 설명 1. 전투 전 상황명량해전이후 왜의 수군의 사기는 떨어졌지만, 수적으로는 여전히 많았다. 당시 왜의 수군의 요새지는 예교(광양만)로 그전에 전라도 지역의 왜의 수군을 공략해 전라도 앞바다를 장악해야 했다. 문제는 명의 제독 진린이 겁쟁이면서도 공명심이 많은 자였는데, 전공 욕심에 이순신을 방해하고 났다.이순신은 진린의 행태를 조선 조정에 ..

정유재란 최대 전투, 임진왜란을 사실상 종식시킨 울산성 전투(蔚山城戰鬪)

정유재란 당시 조명 연합군과 왜군은 울산에서 2차례에 걸쳐 큰 전투가 벌어지는데, 2번의 전투 모두 매우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로 비록 조명 연합군이 승리를 하지는 못했지만 정유재란의 판도를 바꾼 전투이며, 임진왜란을 종식시킨 전투로 평가 된다.정유재란 최대 전투, 임진왜란을 사실상 종식시킨 울산성 전투 (蔚山城戰鬪) 1. 전투전 상황조선수군의 명량해전의 승리이후 왜군은 사실상 북진을 포기하고, 조선 3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점령하겠다는 계획에도 차질을 빗고 왜군의 세력은 남해 지역에 한정되게 된다. 지루한 대치상태에서 조선 조정은 왜군을 확실히 몰아내기로 결정하게 되고, 당시 조선의 도원수 권율과 명나라 부총병 양호는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 중 누구를 먼저 쳐야 할 지 의..

세계 해전사에 남을 이순신의 승리 명량 해전 (鳴梁海戰)

명량 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2~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0여 척을 격퇴한 세계 전사에 빛나는 승리를 거둔 해전이었다.정유재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이순신의 위대한 승리 명량 해전 (鳴梁海戰)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을 준비하는데, 그 첫 전투였던 어란포 해전(於蘭浦海戰; 1597년 10월 7일(음력 8월 27일))으로 조선 수군의 사기를 높이고, 2번째 전투인 벽파전 해전을 벌이는데. 1. 벽파진 해전벽파진 해전(碧波津海戰)은 1597년 음력 9월 7일 (양력 10월 16일) 벽파진에서 왜군의 소규모 함대를 격파한 소규모 해전 이순신이 삼도수군..

정유재란, 왜군의 북상을 저지한 직산 전투 (稷山 戰鬪) 의의 설명

왜군의 2차 침입인 정유재란은 하삼도를 목표로 했었다. 조선 수군마저 괘멸시킨 왜군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유린하고 다음 공략지는 당연히 충청도 지역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근처인 소사벌에서 조명 연합군과 왜군의 전투가 벌어지는데.정유재란, 왜군의 북상을 저지한 직산 전투 (稷山戰鬪: 소사벌 싸움) 의의 설명 1. 전투전 상황정유재란이 시작되자 14만 1500여 명의 일본군은 경상도 일대를 점거하고 북쪽으로 진격하였고 명은 군도 병부 상서 형개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재차 원병을 파병하게 된다. 조선은 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의 지휘로 8도에서 군사를 모으고 대비한다.정유재란 초기 일본군이 총공세를 벌이며 남원과 전주가 함락되고 왜군이 한성 방향으로 북상하고 조선 조정은 당황하고 명..

정유재란, 이순신의 복귀와 첫 해전 어란포 해전 의미

원균에 의해 조선의 수군은 전멸하고 만다. 결국 선조는 이순신을 복귀시키는데,정유재란, 이순신의 복귀와 첫 해전 어란포 해전 의미 1.이순신의 복귀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춘원포로 후퇴, 수군들은 상륙하여 도주하고 판옥선 대부분이 불타거나 왜군에게 노획당해 오사카로 끌려간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 함선은 배설의 함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선조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이..

정유재란, 전라도 의병들의 장렬히 전사한 구례 석주관 전투

남원성과 전주성이 함락되고 왜군이 침공해 노략질을 당했던 구례 지역에서 전 남원 전투에서 패해 후퇴했던 구례 현감 이원춘이 의병을 일으켜 들고 일어나 석주관에서 9월과 11월(음력)에 걸쳐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다.정유재란, 전라도 의병들의 장렬히 전사한 구례 석주관 전투 1.전투 과정당시 구례는 남원과 전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교통지였기에 일본군은 다시 구례 지역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돌려야 했다. 석주관에서의 전투로 구례 현감 이원춘은 전사한다.이후 구례 주민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10월 31일(음력 9월 22일) 구례의 선비 왕득인(王得仁)은 의병 50명을 모아 적을 여러 차례 기습, 공을 세웠으나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구례가 함락되고 적의 노략질이 심하여지자 왕득인의 아들 의성(義成)을 비..

정유재란, 조명연합군이 전멸한 남원성 전투(南原城 戰鬪) 설명

남원 전투(南原 戰鬪), 남원성 전투(南原城 戰鬪)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전라도 남원성을 공격해 조명 연합군과 전투를 벌인 것으로 조명 연합군뿐만 아니라 각지의 의병장들과 군민들까지 합세해 전투를 치렀으나 결국 패배해 모두 살해당하고 지휘관 이복남은 자결하였다. 남원성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자 이복남, 임현, 정기원, 신호 등은 성문으로 잠입하여 성을 점령한 5만 8천명의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전사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 등은 성을 탈출하였다.정유재란, 조명연합군이 전멸한 남원성 전투(南原城 戰鬪) 설명 1.전투전 상황정유재란이 발발하고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괘멸한 상황에서 왜군은 9월 17일(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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