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 (김창수): 독립운동가
출생:1876.8.29(음7.11) ~1949.6.26서거
(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
일대기(약력) - 출처 : 백범 일지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현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에서
빈농의 김순영의 외아들로 태어남. 어머니는 곽락원이며 당 17세. 아명은 창암.
1879년 천연두를 앓음.
1880년 집안이 강령 삼거리로 이사하다.
1884년 조부상을 당함. 국문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다.
1887년 집에 서당을 만들고 이생원을 초빙하여 한문 공부를 하다.
1889년 "통감", "사략" 등의 병서를 읽음.
1890년 학골 정문재의 서당에서 "당시", "대학", "과문" 등을 배우다.
1892년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매관매직의 타락한 과거에 실망. 그 후 풍수와
관상공부 등을 했고, 병서를 탐독함.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창수라 개명함.
1893년 황해도 도유사의 한 사람으로 뽑혀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를 만남.
1894년 팔봉접주로서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략했으나 실패.
1895년 신천 안태훈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했고, 그의 아들 소년 안중근을 만남.
당시에 명망이 높은 해서 거유 고능선의 지도를 받음. 압록강을 건너가 김이언이
지휘하는 의병대에 참가.
1896년 2월,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군사 간첩 토전양량을 죽여 국모의 원한을
품음. 5월 2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인천 감영에 투옥됨. 감옥에서 "태서신사",
"세계지지" 등을 읽고 신학문에 눈뜸.
1897년 7월에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명으로 사형 직전에 특사령이 내려짐.
1898년 3월 9일 밤 탈옥, 전국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의 중이 됨.
1899년 환속하여 고향에 돌아옴.
1900년 김두래란 이름으로 변명하고 다시 방랑길에 오름.
1901년 12월 9일 엄친 김순영씨 세상을 떠남.
1902년 장연 친척집에서 여옥이라는 처녀와 약혼함.
1903년 여옥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기독교에 입교함. 안창호의 영매 신호와
약혼했으나 파혼.
1904년 신천 사평동 최준례와 결혼함.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준. 이동녕 등과 함께 구국운동에 앞장섬.
1906년 해서 교육회 총감이 되어 학교 설립을 적극 추진함.
1907년 장녀 화경 출생.
1908년 신민회를 통하여 구국운동에 앞장 서는 한편,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움.
1909년 전국의 강습소를 순회하였고, 재령 보강학교의 교장이 됨. 10월 안중근 의사
사건에 연좌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1910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회의에 참석함.
1911년 1월 5일 사내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안명근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언도 받음.
1913년 옥중에서 이름을 구, 호를 백범이라 함.
1914년 감형으로 7년의 형기를 끝내고 7월에 가출옥함.
1916년 출옥 후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 관리인으로 있으면서 농촌계몽운동에 힘씀.
1917년 장남 인 출생함.
1919년 3.1 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이 됨.
1922년 차남 신이 상해에서 태어남.
1923년 임시정부 내무국장에 취임.
1924년 1월 1일 상해에서 부인 최여사 폐렴으로 세상을 떠남.
1926년 12월 임시정부의 원수인 국무령에 취임.
1927년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쳐 국무위원에 취임
1928년 자서전 "백범일지" 상권의 집필을 시작함. 3월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1929년 5월 자서전 "백범일지" 탈고함. 재중 거류민단장을 겸임.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그 단장이 되어 독립투사를 양성.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일황 저격에 실패함. 4월 29일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지게 함.
1933년 윤의사 의거 후 신변이 위험해지자 강소성 가흥으로 피신. 가흥에서
주애보라는 여사공에게 몸을 의탁함. 중국의 장개석 장군을 만나 친교를 맺고, 낙양
군관학교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할 것을 결정.
1934년 다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함.
1935년 11월 가흥에서 임시의정원 비상회의를 열어 기구를 강화.
1936년 이동녕 등의 동지들과 한국국민당을 창당함.
1937년 임시정부를 진강에서 장사로 옮김.
1938년 민족주의 3당 통합문제를 논의하던 남목청에서 조선 혁명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아 1개월 동안 입원 치료함.
1939년 다시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취임. 어머니 곽씨부인 인후염으로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
1940년 장사가 위험해지자 광주로 갔다가 장개석 주석의 도움으로 다시 중경으로
감. 5월 혁명 투쟁 각 단체를 통합, 한국독립당에 집중케 하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함. 군사특파단을 협서성 서안에 상주케 하여 무장부대 편성에 노력.
1941년 12월 9일 임시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함.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 정부 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 협정이 체결 공포됨.
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연합군과 공동 작전에 진력하게 됨.
1944년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주석으로 재선됨. 협서성 서안과 안취성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고 미군의 원조로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기술 훈련을 적극
추진 지휘.
1945년 2월 임시정부는 일본군과 독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함. 장남 인
호흡기병으로 세상을 떠남. 11월 2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개인 자격으로
환국함.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보고 12월 28일 이후 반탁 국민운동을 적극 추진.
1946년 2월 비상국무회의가 조직되어 그 총리에 취임함. 인천. 마곡사 등 전국을
순회.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골을 효창공원에 봉안함.
1947년 1월 비상국민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그 부주석에 취임함. 2차 미, 소
공동위원회가 열리자 반탁투쟁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 11월 유엔
감시하의 남북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 결의안을 지지함. 그의 정치 이념을 표현한 '나의
소원'을 발표.
1948년 2월 2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함. 4월 19일 남북 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감. 5.10 선거 후부터는 건국실천원양성소에 힘을
기울임.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함. 7월 5일 거족적인
국민장으로 효창 공원에 영면함.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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