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2월 4일 언론재벌 허스트가 상속녀 패티 허스트가 SLA에 납치된다. 하지만 그녀가 더 유명해진 것은 이후 그들의 동료가 되어 SLA 멤버들과 함께 은행강도를 하다 체포가 된 것이다. 유죄 판결(은행강도죄)를 받아 35년형을 선고 받았다 7년형으로 감형받 22개월간 수감형생활후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가석방되고 이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2001년 1월 사면을 받게 된다. 20세기 희대의 사건 중 하나였던 패티 허스트 납치사건의 당사자인 패티에 대해 정리해 본다.
1974년 패티 허스트(Patty Hearst) 납치사건 정리
1. 패티 허스트
패티 허스트(Patty Hearst) 본명은 퍼트리샤 캠벨 허스트(Patricia Campbell Hearest, 1954년 2월 20일 ~)로 결혼 이후 이름은 퍼트리샤 허스트 쇼(Patricia Hearest Shaw)이다. 언론계의 큰 손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손녀이며 백만장자 조지 허스트(George Hearst)의 증손녀
2.SLA
SLA는 Symbionese Liberation Army 약자로 ‘공생(共生)해방군’으로 불린다. SLA의 '코브라 깃발': 7개의 머리를 가진 코브라를 상징한다. 이들 SLA는 자본주의 국가 타도를 외치던 흑인해방·여성해방 극좌파 통일전선이지만 실제 이들은 살인과 강도 짓을 일삼던 극좌 모험주의 테러집단이었다.
3. 사건
1974년 2월 4일 오후 9시 20분 당시 19세이며 버클리 2학년이었던 패티 허스트는 연인과 고급 아파트에 함께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 소총과 샷건으로 무장한 2인조의 좌익 과격파 공생 해방군 습격을 해 패티 허스트를 납치한다. 3일후 1974년 2월 7일 신바이오니즈 해방군 (SLA)을 자칭하는 범인들이 지역 방송국을 통해 몸값을 요구한다. 문제는 이후의 패티 허스트의 행동이었다. “허스트 가문의 돼지로 살지 않겠다"며 자신을 납치한 SLA과 한패거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2달 뒤 1974년 4월 15일 SLA들은 샌프란시스코 북부 하이바니아 은행의 한 지점을 습격한다. 이때 은행 CCTV에 납치되었던 패트리샤 본인이 범인 일당과 함께 소총을 가지고 함께 강도하고있는 영상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다. 한달후 1974년 5월 17일 FBI는 SLA의 범인 일당의 아지트를 급습해 범인 6명을 사살하는데 패티 허스트는 마침 동료와 외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서 도주를 할 수 있었다.
다음달 1974년 6월 7일 패티 허스트는 ‘타니아’라는 가짜 이름으로 LA 방송국을 통해 SLA의 동지가 된 것을 선언하고 카세트 테이프와 사진을 제공했는데 이 테이프의 내용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각오와 자신의 부모에 대해 "파시스트 돼지"라고 욕을 하고 약혼자에 대해서도 심한 욕을 하는 내용이 담겨 당시 미국 사회를 술렁이게 한다. 이 테이프가 공개된 직후 약혼자는 패티 허스트와의 약혼을 파기한다.
이후 은닉생활을 하던 패티 허스트는 다음해 1975년 9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FBI에 의해 체포된다. 체포 도중 소변을 눈 것에 대해 자신이 요실금이 있음을 고백하며 남자 경찰관 앞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체포된 다음해인 1976년 2월 재판이 시작된다. 패티는 무죄를 주장하는데 그녀의 변호사는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라 살해 당하지 않기 위해 가짜로 가입한 것에 불과했다며 세뇌 된 것이지 책임은 공생 해방군에 있다“고 주장했는데, 배심원은 사건의 사회적 영향을 고려 징역 35년 판결을 내린다.
4.사면
판결 후 후에 대통령이 되는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 로널드 레이건과 서부 배우 존 웨인 등 유명 인사들들이 석방 탄원서를 제출하고 결국 징역 7년으로 줄어들게 되고 지미 카터 대통령의 특별 사면에 의해 보석금 150만 달러를 지불하고 1977년 1월 19일 가석방된다. 이후 자유의 몸이 된 패티는 적극적으로 사교계 활동을 시작하고 유명인사가 되는데, 보석중 그녀를 보호하던 경호원 Bernard Shaw(버나드 쇼)와 결혼해 두명의 아이들 둔다. 2013년 버나드쇼가 사망할때까지 이들의 결혼은 지속되었고, 2001년 1월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완전 사면을 받게 된다.
5.마무리
패티 허스트가 납치된후 납치범들과 동조한 행위에 대해 스톡홀름 신드롬에 의한 피해자라는 의견과 자발적인 참여였다는 의견이 대립한다. 당시 19세라는 어린 나이와, 부유한 집안이지만 많은 이들에게 비난을 받언 가문에 대한 어떤 불만 등이 겹쳐진 반항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체포되어 만 2년도 되지 않아 감옥을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녀의 집안의 막강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허스트 가문은 당시 미국의 언론을 좌우했던 언론 재벌로 영화 시민 케인의 모델이기도 했다. 영화배우들과 인기인들이 그녀의 사면에 나섰던 것도 이런 이유가 있던 것이다.
그녀가 죄를 저지른 과정은 이해가 되지만, 이후 사면을 받고 행복한 여생을 보낸 그 과정을 보면 결국 미국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된다. 패티 허스트가 만일 가난한 집안 여자였다면, 사면은 거론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동정심이 들지 않는 것은 그때문이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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