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세상

정인숙 피살 사건 진범은 누구일까. 배후 박정희 실행 중정?

올드코난 2016. 3. 1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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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3월 17일 밤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정인숙은 총상으로 사망한다. 여전히 진범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배후에 누가 있는지 충분이 짐작은 된다. 정리해 본다.

타락한 박정희 시대의 단면, 1970년 3월 17일 정인숙 피살 사건 진범은 누구일까. 배후는 박정희 살인은 중앙정보부? 충분히 의심이 가는 상황이다.


1.정인숙 요약

정인숙(鄭仁淑, 1945년 2월 13일 - 1970년 3월 17일) 본명은 정금지(鄭金枝)이고, 다른 별명은 혜미이며,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대구 부시장이었던 정도환의 딸로 4.19혁명전까지는 부유한 집안이었다. 4.19 이후 가세가 기울고 이때부터 성격이 삐뚤어졌다고 전한다.

1962년 신명여고 졸업 후 1964년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에 지원했다 떨어지고 이후 명지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흥미를 잃고 중퇴한다. 뛰어난 미모로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려고 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전하며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영화감독을 만났지만 1년만에 헤어지고, 임신한 아이는 낙태 이후 요정에 들어가 요정업에 종사하게 된다.

이후 제3공화국 당시 인기 접대부로 국무총리 정일권의 내연녀이기도 했지만 당시 정계 거물들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일권이 유독 정인숙을 좋아해 결국 이들은 아이를 낳게 되는데, 이는 당시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에게는 큰 약점이 된다. 그래서 해외로 보내고 큰 돈을 준 것으로 알려졌지만, 외국 생활이 답답해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고 남성 편력과 낭비벽으로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2. 피살 사건 배경

사건 당시 대통령선거 1년전이었다. 박정희는 3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후 유신까지 이어지지만, 이때는 3선에서 당선을 하는게 목적이었다. 문제는 경제상황등으로 박정희 지지율이 많이 떨어져 당선이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이러한 때에 정인숙의 낳은 아이의 친아버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정일권 국무총리는 박정희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정일권 자신도 정인숙에게 많이 시달려 지친 상황이었다.


3.사건 발생과 진행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정인숙은 총상으로 현장에서 사망했고 차를 운전하던 넷째 오빠 정종욱은 넓적다리를 관통했지만 생존해 있었다. 정종욱은 택시 기사에게 도움을 청해 구조되었다. 시신은 바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내진 뒤 공개 부검하였다. 부검 과정에서 낙태 경험이 몇번 있었던 것이 알려졌고 기타 사항은 불문율에 붙여졌다. 그의 오빠 정종욱은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퇴원과 동시에 구속되었다.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은 현장에 있던 친정 오빠 정종욱이 용의자로 지목되어 체포하는데, 1주일 후 검찰은 수사 결과에서 범인은 오빠 정종욱이라고 지적한다. 정종욱은 정인숙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면서 정인숙의 문란한 행실을 지적했지만 정인숙이 말을 듣지 않고 자신에게 심한 폭언을 가하자 가문의 명예를 위해 누이동생을 암살하고 강도를 당한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는 것이다.

야당 신민당에서는 정부 고위층의 개입 의혹을 제기하고 정인숙 살해 사건 이후 의혹이 거세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관련자를 색출하였으나, 정일권 총리의 해임 선에서 사건을 종결시켰다.

정인숙은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용미리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일 그의 부모 역시 그의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4.사건의 파장

정인숙 사건은 당시 지도층의 타락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정인숙의 수첩에는그녀가 생전에 알고 지내던 사회 저명인사 26명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이 사건은 고위층의 부도덕한 타락상을 세상 밖으로 노출시켰다.



5.뒷이야기

사건 직후 "강변 3로, 오빠 조심, 명함 조심"이라는 유행어가 돌았고, 나훈아의 노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개사한 노래가 확산되었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만약에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영원히 우리만이 알았을 걸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성일이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고관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렇게 모두가 밉지는 않았을 걸

죽고 나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이 개사한 노래 때문에 육영수 여사가 박정희에게 재떨이를 던졌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결국 〈사랑은 눈물의 씨앗〉은 금지곡이 되기도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변 사람들의 여자문제에는 관대했다. 심지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직원을 시켜 정적이었던 김대중, 김영삼 등의 사생활을 캐서 보고서로 제출하자 화를 내며 찢어버렸다. 하지만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 했던 정인숙이 정일권의 자식을 두었다는 사실에는 분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살 사건후 정인숙 문제로 박정희에게 무릎을 꿇기까지 한 정일권은 정종욱이 구속된 이후 잠잠해질 무렵 정일권은 국무총리에서 해임되고 바로 미국으로 가 하와이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낸다.


정종욱은 사건 직후 "당시 셋째, 넷째 가라면 분해할 정도의 권력을 휘둘렀던 P씨"를 불러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수감과 출소 이후에도 정종욱은 억울함을 하소하고, 정일권과 여러 번 만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런 정종욱에 대해선 권세가들에게 희생된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라는 설이 돌았다.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은 1991년 6월 5일 서울가정법원에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소송을 제기한다. 정성일은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와 외삼촌으로부터 정일권이 1967년 어머니와 교제해 자신을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지만 6월 27일 외삼촌 정종구의 권유로 소송을 취하하고 다음날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다. 정성일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정 전 총리와 만나지는 못했지만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눈물의 부자상봉을 했으며, 외삼촌 등의 만류로 친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해 소 취하를 스스로 했다’고 밝혔다. (정일권의 한 측근은 '91년 한국에 와서 친자확인소송을 한다고 했을 때 정 전 총리 측에서 거액을 주고 일단 무마시켰다.'고 진술했지만 진실은 모른다.)

이후 1993년 3월 ‘저는 당신의 아들이었습니다’란 책을 낸 정성일은 1993년 5월, 서울가정법원에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소송을 다시 제기했지만 다음해인 1994년 1월 정일권이 죽고만다.



6.진범은 누구?

사건에 대한 의혹은 지난 40년간 계속됐다. 오빠 정종욱의 범행동기가 석연치 않았으며 중요한 범행현장인 사고차량은 사건발생 몇시간만에 다른 곳으로 치워버렸다. 무엇보다 범행도구인 권총은 발견되지 않았다.

정종욱은 19년형을 마치고 교도소에서 출감한 뒤 기자 인터뷰에서 자신은 범인이 동생과 관계했던 고위층이 뒤를 봐준다고 했다는 아버지(정도환)의 회유로 거짓 자백을 했을 뿐, 집앞에 있던 괴한들이 동생을 살해했다, 동생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은 정일권 전 국무총리의 아들이 확실하다고 밝혔다.

정계의 유력자가 은폐하려 했다는 설과 정적관계에 있던 자의 소행이라는 의견등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2010년 3월 20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나는 여동생을 쏘지 않았다 - 정인숙 피살 사건 미스터리'편에서전 정인숙 사건의 실체를 다시 추적하기도 했다.

현재로서는 오빠 정종욱은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의견이 대체적으로 많다. 


그리고 권총으로 암살을 감행할 정도면 당시 시대 분위기를 감안해 보면 중앙정보부의 개입을 충분히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다. 중앙정보부를 움직일수 있는 사람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과 대통령 박정희 단 두사람뿐이다. 

김계원 부장은 박정희에게 충성했던 사람이다.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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