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세상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 (Robert Capa) 설명

올드코난 2016. 5. 25.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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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기자의 전설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년 10월 22일 ~ 1954년 5월 25일)는 헝가리계 유태인 혈통의 미국인 종군 기자로 에스파냐 내전, 중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유럽전선, 제1차 중동 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등 현대사 최대 전쟁들을 취재했다. 전쟁 규모만 봐도 카파의 명성은 대단한 것인데, 그의 사진들은 역사적인 가치도 매우 높다. 카파에 대해 정리해 본다.


1. 카파 개요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은 미국 영화감독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의 이름을 본따 지었다고 한다. '카파'라는 말은 헝가리어 '차퍼(Cápa)'에서 유래한 말로, 상어를 의미한다. 로버트 카파의 동생 코넬 카파도 사진작가였다.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은 그의 연인 게르다와 함께 일할때 가공의 고용인의 이름이었지만 실제로는 앙드레(카파 자신)가 카파의 노릇을 했던 것이다.


2. 작가 초기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프리드먼 엔드레 에르뇌(Friedmann Endre Ernő)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1931년 좌익학생운동을 하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섭정이던 호르티 미클로시의 정치를 피해 독일의 베를린으로 망명한다. 이때 레프 트로츠키의 연설장면을 촬영했는데, 공식적인 첫 작품이다.

1933년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자 유태인이었던 카파는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다.


3. 스페인 내전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에스파냐 내전을 취재하는데, 이때인 1936년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대에 맞서 투쟁한 공화파 알코이 민병대원 페데레코 보렐 가르시아(Federico Borrell García)의 전사장면을 촬영해 유명해졌고, 이 사진은 에스파냐 내전을 대표하는 사진이 되었다. (조작 논란도 있지만 사진의 진실여부는 아직 모른다.)

1938년, 중국 국민정부측의 선전영화 '4억의 민중' 촬영을 위하여 중국 한커우로 가 '4억의 민중' 촬영과 중일전쟁을 취재하고, 다시 에스파냐에서 취재를 계속한다.


4. 2차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가족이 있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멕시코 대통령 선거를 취재하고(1940년), 1941년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미국 잡지 '콜리어스'의 요청을 받고 영국으로 갔다. 영국으로 가는 도중에도 대서양 선단을 취재하고, 북아프리카 전역을 취재하고 연합군이 이탈리아로 전선을 확대하자, 이탈리아에서도 취재하였다.

그리고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의 오마하 해변에서 두 대의 콘탁스 카메라를 들고 106여장의 사진을 촬영하는데, 필름을 받은 라이프(Life)지의 암실 담당자가 흥분한 나머지 건조도중 필름의 감광유제가 녹아버려 8장의 사진만 남았다. 라이프(Life)지는 이 사진을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Slightly out of Focus)' 라는 캡션을 달았다. 이때 사진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도 쓰여진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샤르트르 시에서의 부역자에 대한 프랑스 군중의 조롱, 파리의 해방, 미군의 독일 낙하산 투하작전등을 취재하는데 샤르트르 시와 파리에서 촬영한 사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독일군 저격수의 총에 맞아 전사한 미군 병사의 사진은 지금도 많이 알려진 사진이다.


5. 종전후

1946년, 당시의 애인이었던 잉그리드 버그만의 제의로 할리우드에서 영화에 손을 대지만 곧 포기하고 터키에서 냉전의 긴장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이 시기 정식으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 미국인이 된다.

1948년 존 스타인벡과 함께 소비에트 연방의 모스크바,키예프,트빌리시,바투미,스탈린그라드의 폐허를 취재하고 러시아 저널(A Russian Journal)을 존 스타인백 이름으로 냈고, 제1차 중동 전쟁을 취재한다.

1947년에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침 시모어, 조지 로저와 함께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 포토스를 설립하고 1951년, 회장에 취임했다.

1952년 미국의 매카시즘의 영향으로 여권의 효력이 일시 중지되고, 1953년에는 미국 FBI의 감시를 받는다. 1954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해 취재했다.


6.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최후

《라이프》지의 요청을 받고 베트남으로 건너가, '쓰디쓴 쌀'이라는 제목으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기를 쓰려던 중 1954년 5월 25일 오후 2시 55분, 프랑스 군의 행군을 취재하다 지뢰를 밟아 사망했다. 죽는 순간에도 카메라를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고 전한다.


7.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와 연인

파리에서 '앙드레 프리드만(André Friedman)'으로 지내던 1934년, 독일계 유태인 게르다 포호릴레스(Gerda Pohorylle)와 교제를 하면서 사진을 가르쳤고, 에스파냐 내전당시에 함께 취재를 하기도 한다. 카파가 잠시 파리로 가 있는 동안 게르다는 브루네테 전투에서 공화파 군대의 전차에 깔려 죽고 만다. 카파는 게르다 포호릴레스와 결혼하려 했었던 것으로 전하는데 그녀가 죽고 난 뒤 이후 여러 여자들과 교제는 했지만 죽는 순간까지 미혼이었다.

1943년에는 전선 후방이었던 영국에서 일레인 저스틴(Elaine Justin)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의 책 《Slightly out of Focus》에서 자신은 일레인을 "핑키(Pinky)"라 불렀고, 그녀의 불그스름한 금발때문이었다고 적었다. 카파와 일레인 관계는 일레인이 그녀의 친구 척 로마인(Chuck Romine)과 결혼하면서 끝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이 끝날 무렵, 그는 연합군 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파리를 방문한 스웨덴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의 제의로 할리우드에서 잠시 일했다. 잉그리드도 카파와의 결혼을 생각하였으나, 카파는 잉그리드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잉그리드와 카파의 관계는 1946년 여름에 끝났다.


8. 뒷이야기

카파는 도박을 즐겼는데 특히 포커를 좋아했고 사교적이었다. 그래서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블로 피카소, 존 휴스턴, 험프리 보가트, 존 스타인벡 등과 친하게 지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에서 오마하 해변 장면 일부가 흐리게 나온것은 카파의 사진을 참고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가수 Falco의 1986년의 앨범 중 '가미가제 카파(Kamikaze Cappa)'는 카파를 기리기 위해 작곡한 것이다.


9. 남긴 말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If your picture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

"진실이야말로 최고의 사진이며 최대의 프로파간다(선전선동)이다. (The truth is the best picture, the best propaganda.)"

"전쟁은 나이 들어가는 여배우 같다. 사진은 점점 잘 안 받으면서, 점점 더 위험해진다. (This war is like an actress who is getting old. It is less and less photogenic and more and more dangerous.)"

"재능이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헝가리인이 되기도 해야한다. (It's not enough to have talent, you also have to be Hunga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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