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세상

일본 관동대지진 (간토 대지진) 설명

올드코난 2016. 8. 3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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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32초(일본 표준시)에 발생한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간토 대지진(関東大震災)은 일본 가나가와 현 사가미 만을 진앙지로 발생했던 큰 지진이다. 1855년에도 대지진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칸토 대지진은 1923년 일어난 대지진을 말한다. 그만큼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인들이 억울하게 희생되는 일이 있었다. 정리해 본다.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일본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간토 대지진) 설명


1. 발생

간토 지진은 5분 간격으로 발생한 세 차례 발생한다. 최초에 발생한 M 7.8의 진원은 거의 동시에 11시 58분에 오다와라와 미우라 반도의 지하에서 약 15초 간 일어났다. 계속하여 M 7.3의 첫 번째 여진이 12시 1분에 일어나고, 두 번째 M 7.2의 여진이 12시 3분에 발생하였다. 이 세개의 지진은 모두 약 5분이상 계속되었다.


2. 피해

간토 대지진이 일어난 시간 11시 58분은 점심시간이 임박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각 가정집과 요식 업소에서 불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지진이 발생하면서 불이 대부분 목재 건물인 피해 지역 건물들을 불태우며 퍼져나가며 도쿄를 비롯한 지진 피해 지역에 화재가 발생한다. 리히터 규모 7.9에서 8.4 사이로 추정되며 4 ~ 10분 정도 지속되었다. 도쿄 지역과 요코하마 지역, 지바 현, 가나가와 현, 시즈오카 현 등에서 10만 명에서 14만 2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 7천 명이 실종되었다. 10만 9천여 채의 건물이 전부 파괴되고 10만 2천여 채는 반파 되었다.


3. 조선인 학살

지진 후 간토 지방은 대혼 혼란에 빠진다. 정부 조직이 마비되고 계엄령이 선포되지만, 사태는 악화되고 이에 일본정부는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일본 내무성은 각 경찰서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명령을 하달하는데 이 내용이 일부 신문에 보도되고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 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 라는 헛소문이 나돌기 시작한다.

이러한 소문은 일본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유발시키고 자경단들이 조직되면서 조선인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다.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조선 복장을 한 사람과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 (*예: 十五円五十銭, 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을 시켜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는 식이었다.

일본 경찰은 학살사실을 알면서도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조선인 학살을 방조한 것이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살해된 조선인들 상당수는 암매장되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 강과 아라카와 강은 시체의 피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전한다.


4. 진압

치안 당국은 자경단들의 조선인 학살을 외면하다 점차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고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자 진압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자경단 조사는 형식적으로 이뤄졌고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되었으며 피해자의 수를 축소 발표한다. 그리고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다.


5. 조선인 피해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는 그의 저서 『압박과 학살』에서 2534명으로, 김승학은 『한국독립운동사』에 피해자가 6066명이라고 적었지만, 그에 비해 당시 일본정부의 추산은 233명이었다.


6. 복구

대지진 이후 수도를 히메지,경성으로 이전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지만 그냥 넘어간다. 지진 패해 복구를 하면서 현재의 도쿄의 기틀을 구성하는 도로와 철도 그리고 공원 등이 계획되어 보다 근대적 모습으로 도시가 재건되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다시 파괴되고 재 복구를 거치며 오늘날 도쿄가 된다. 이 사건은 일본에게는 안전 불감증의 심각함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이후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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