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세상

성인 추대 테레사 수녀 (Mother Teresa) 비판 받았던 이유.

올드코난 2016. 9. 5.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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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9월4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례로 시성식이 열렸고 10만 명이 넘는 신자가 몰렸다. 테레사 수녀를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해 일련의 과정이며 성인이 된다면 이례적일 정도로 매우 빠르다. 1997년 87세로 선종한지 6년만인 2003년 성인의아래 단계인 복자품을 받았다. 그리고 교황청은 테레사 수녀의 기도로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났다며 성인으로 추대했다. 현재로서는 테레사 수녀가 공식 수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녀에 대해 비판의 시각도 있지만, 가난한 자를 위해 살았다는 훌륭한 인품을 가진데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를 한다. 테레사 수녀에 대해 정리해 본다.

가톨릭의 성인 반열에 오른 캘커타의 복녀 (Saint Teresa of Calcutta) 테레사 수녀 (Mother Teresa) 삶에 대한 설명과 비판


1. 출생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 1910년 8월 26일 ~ 1997년 9월 5일)는 1910년당시 오스만 제국령 마케도니아의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계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아녜저 곤제 보야지우(Anjezë Gonxhe Bojaxhiu). 아버지 니콜 보야지우는 1919년 시 의원 자격으로 정치 행사에 참가했다가 의문사한다.


2. 수녀가 되다

1928년에 아일랜드의 라스판햄으로 이주하여,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이때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녀가 되었고, 테레사로 개명하였다. 그 이후 인도로 선교 활동과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당시 영국의 식민지이던 인도로 이주하였다.


3. 인도에서의 활동

1947년 인도 자치령이 독립하고 1950년 인도 공화국으로 국호가 결정되고 테레사 수녀는 이때 인도에 귀화한다. 이 시기 로마 가톨릭 계열의 선교 단체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하였다. 1952년에 8월 22일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Home for Sick and Dying Destitutes) 또는 순결한 마음의 장소(Place of Pure Heart)로 불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개설한다.

이때 테레사 수녀는 콜카타 시청 측에서 제공한 건물을 사용하는데 그 건물은 칼리 신전 뒤에 있는 건물로 순례자들의 숙소로 쓰였다. 당시 힌두교도들은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선교활동을 위해 건물을 이용할 것이라고 의심하여 시위를 벌였으나,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이 종교에 구애없이 복지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받아들인다.

1955년에는 9월 23일 "때의 집"(시슈 브하반)이란 이름의 어린이 보호시설을 개설하고, 1958년 이 시설에 90명의 어린이들이 살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경찰과 공무원들은 고아와 버려진 어린이들을 보냈으며, 어린이들의 집에서는 이들을 먹이고 병도 고쳐주었다. 어린이들은 교육도 받았으며, 해외로 입양되었다. 갓난 아기는 로마 가톨릭 교도인 것을 알 수 있을 때만 세례를 주었다. 1968년에는 한센병 환자들의 커뮤니티인 평화의 마을(Shanti Nagar)을 개설하고, 1975년에는 회복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선물"(Prem Dan)이란 이름의 장기 요양소를 개설한다.


4. 노벨평화상

인도에서의 봉사활동은 전세계적으로 테레사 수녀의 이름을 알리게 되고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는 인도주의자로 존경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카톨릭 종교인이며 수녀로서 노벨상을 받은 의미는 매우 컸다. 대부분 정치인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상을 받았던 사례들을 보면 순수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위한 사람에 주었으며, 카톨릭이라는 보수적인 종교에서 여성인 수녀에게 상을 줌으로서 카콜릭의 여권에 대한 인식을 높여준 계기도 되었다. 1980년 인도의 가장 높은 시민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수여받았고 1983년 영국 명예 오더 오브 메리트(honorary Order of Merit, honorary OM)을 수훈했다.

“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벌거벗고 집이 없으며 신체에 장애가 있고 눈이 멀고 병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 받지 못하며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들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 노벨상 수상 소감 중

이후에도 테레사 수녀의 사랑의 선교회는 계속 확장하고 사망할 즈음에는 나병과 결핵, 에이즈 환자를 위한 요양원과 거처, 무료 급식소, 상담소, 고아원, 학교 등을 포함해 123개 국가에 610개의 선교 단체가 있었다.


5. 사후

1983년 당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절 로마를 방문하는 동안 심장마비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이후 1989년 2번째 심장마비로 인공 심장 박동기를 착용했고, 1991년에는 폐렴 등을 앓았고, 1996년 4월 바닥에 떨어지는 부상으로 쇄골이 부러지는 사고를 겪었고 그래 8월에는 말라리아, 심장 수술 등 건강에 문제를 겪는다. 결국 1997년 3월 13일 자리에서 물러나고 몇 개월 후인 1997년 9월 5일 선종했다. 사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어 "캘커타의 복녀 테레사"라는 호칭을 받았다. 2003년 성인 아래 단계 복자품을 받았고 2016년 9월 4일 성인에 시복되었다.


6. 평가

그녀의 삶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있다. 부자들의 성녀라는 비판이 있는데 이는 ‘가난은 하늘의 뜻’이라는 말을 근거로 삼았다. 하지만 이는 가난을 하늘의 책임으로 돌린 것이 아니며, 세상을 증오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이 되는 말이다. 

테레사 수녀가 사회적인 약자를 위해 살다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녀는 부자들을 대변한 적이 없고, 가난을 하느님 탓으로 돌린 것도 아니다. 

단지 테레사 수녀가 정치에 무지했다는 평가는 일리가 있다. 테레사 수녀가 가장 큰 비난을 받았던 것은 아이티의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그의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와 함께 사진을 찍어 많은 비판을 받았었다. 

하지만, 이때 사진을 같이 찍은 것은 정말 몰랐다는 점이다. 인도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신했고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릴세가 없었던 테레사 수녀가 아이티의 독재자에 대해 알 리가 있었겠는가. 오히려 이런 테레사 수녀를 이용하려든 자들이 비난 받아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사례가 있지만 이정도로 하고 마무리하자면 테레사 수녀에 대한 비판은 그녀를 이용한 정치인과 카톨릭에 돌려야지 그녀의 삶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그녀의 삶은 카톨릭 신도 여부를 떠나 약자를 위해 헌신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며 한 인간으로서 위대한 삶을 살다간 성인으로 불린 자격이 있는 분이셨다는 말로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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