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세상

1972년 검은 9월단 뮌헨 올림픽 인질극, 뮌헨 올림픽 참사 (뮌헨 학살) 설명

올드코난 2016. 9. 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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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9월 5일, 뮌헨 올림픽이 열리던 그곳에서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인질 테러 사건이 발생한다. 일명 ‘검은 9월단, 뮌헨 올림픽 인질극’으로 공식 명칭은 ‘뮌헨 올림픽 참사’다. 인질들은 결국 모두 목숨을 잃은 최악의 사건이다. 정리해 본다.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사건, 1972년 검은 9월단 뮌헨 올림픽 인질극 뮌헨 올림픽 참사(뮌헨 학살 Munich massacre) 설명


1. 개요

뮌헨 올림픽 참사 혹은 뮌헨 학살(Munich massacre)사건으로 불리며 1972년 9월 5일 독일(당시 서독)의 도시 뮌헨에서 개최된 1972년 하계 올림픽 기간에 일어난 테러사건이다. 팔레스타인의 테러 단체인 검은 9월단이 11명의 이스라엘 올림픽 팀을 인질로 잡고 협상을 시도했으나, 경찰의 테러 진압 미비로 인해 대표팀 전원이 살해된 사건이다.

2. 검은 9월단

검은 9월단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내 알파타에서 분리된 민족주의 게릴라 조직이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단을 상대로 테러를 일으켰던 단체다. “검은 9월”이란 이름은 아랍계 게릴라가 요르단 정부군의 토벌작전으로 큰 타격을 받은 1970년 9월을 의미한다. 아랍게릴라 4명이 같은 해 11월 탈 당시 요르단 총리를 카이로의 호텔에서 보복-암살하면서 자기들 조직을 스스로 '검은 9월단'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표적이 됐던 과격 무장조직으로 지도자나 조직원 등의 신원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외치며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테러와 요인암살, 항공기 납치사건 등을 저질렀다


3. 사건 배경과 발생

당시 요르단이 팔레스타인들을 추방하고 이집트가 대미 접근을 시도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된 팔레스타인 과격단체가 자기들의 존재를 과시, 세계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됐다.

1972년 9월 5일 새벽 4시, 운동선수 복장을 한 검은9월단 8명이 서독 뮌헨의 올림픽 선수촌 담장을 넘었다. 자동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이들 괴한들은 곧바로 28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이 묵고 있던 숙소로 침입했다. 총성과 비명에 갑자기 놀란 이스라엘 선수들은 재빨리 창문을 통해 몸을 피했지만 이미 2명(코치1 선수1)은 죽고 9명은 인질로 붙잡히고 올림픽 경기는 중단이 된다.


4. 협상

복면을 한 괴한들은 자신들을 팔레스타인 무장저항단체 ‘검은 9월단’ 소속이라고 밝히며 이스라엘이 억류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포로(양심수)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스라엘 수상 골다 메이어는 이 요구를 거절하고 이스라엘 군대를 통한 사태 해결을 위해 서독에게 양해를 구했으나, 서독의 법률은 외국군의 국내 활동을 제한했기 때문에 서독측은 자신들이 대응할 것이라며 거부했다. 그리고 서독 경찰은 이들과 수차례의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강경책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한다.


5. 구조계획

서독 경찰과 검은9월단은 비행기로 이집트 수도 카이로로 탈출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선수촌에서 비행기가 준비된 뮌헨 국제공항까지 2대의 헬리콥터로 이동하고, 그 후 준비된 비행기에 탑승하여 국외로 탈출하는 것으로 타결하는데 이는 서독측의 계략이었다. 공군기지로 이동한 상태에서 경찰특공대와 저격수들이 범행 단체를 사살하고 인질을 구출한다는 계획이었다.


6. 구조 작전 실패

헬리콥터가 퓌어슈텐펠트브루크(Fürstenfeldbruck) 공군 기지에 착륙하고, 범행 단체중 2명이 준비된 비행기를 확인하고 비행기에서 물러날 때쯤 서독 경찰의 저격수가 발포하지만 총탄은 범행단체 전원을 쓰러뜨리지 못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응전을 시작하면서 총격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범인들은 헬리콥터 1대를 수류탄으로 파괴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총격전은 장시간에 걸쳐 벌어진다. 인질 9명 전원 및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범인측은 8명 중 5명이 사살당하고, 남은 3명은 도주를 기도하다 체포되면서 사건은 종결된다. 그러나 이 3명은 그해 1972년 10월 29일 루프트한자기 공중 납치 사건으로 석방되었다.


7. 실패 이유

사건 당시 독일 경찰에는 대테러 부대가 없었기 때문에, 올림픽 선수촌에서의 진압 작전에는 별다른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 경찰을 투입했다. 올림픽 선수촌에서의 진압 시도는 언론에 의해 생중계 되었고, 검은 9월단은 TV를 통해 이를 파악하는 지경에 이르고 진압 작전이 노출되었다는 것을 알아챈 독일 경찰은 작전을 취소한다.

그리고, 사건 초기 서독 측은 테러리스트들의 숫자를 5명으로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8명이었다. 테러리스트 수가 8명이라는 것을 나중에 파악했지만 이 정보는 공항의 저격팀에 전달되지 않았다.

공항에서의 진압 작전에서도 수많은 실수들이 대참사를 초래하였다. 저격 실패가 피해를 키웠고 보잉 727 기에서 대기 중이던 경찰들은 비행기에 들어오는 테러리스트를 진압해야 했지만 테러리스트들이 수류탄으로 비행기를 폭파시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다.

공항에 착륙하는 헬리콥터들은 관제탑 저격수들에게 좋은 시야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착륙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관제탑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착륙하여 저격수들의 작전 수행에 지장을 주었다. 저격수들은 스코프나 야시경이 없는 헤클러&코흐 G3로 무장하고 있었고, 이는 저격용으로 부적합하였다. 또한, 저격수 2명은 관제탑 저격수들의 사선 상에 있었다. 이 외에도 많지만 생략.


8.사건 결과

이스라엘에서는 올림픽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고 다음날 이스라엘 선수단의 추모식이 진행되도 중단되었던 올림픽은 34시간 만에 재개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올림픽기가 처음으로 조기로 계양된다.

당시 올림픽 사상 최대규모인 122개국 7,147명의 선수가 참가 가장 화려한 대회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뮌헨 올림픽은 유혈 대회로 얼룩지고 말았다.


9. 이스라엘의 보복

이스라엘 정부가 분노를 하는 것은 단연했다. 이스라엘은 보복을 하는데 첩보기관 모사드를 중심으로 검은9월단 조직원들을 추적해 암살(제거)하는데 일명 ‘신의 분노 작전’. 뮌헨 사건에 대한 보복작전으로 모사드가 제거한 자들을 살펴 보면.

- 아부 다우드 : 검은 9월단의 수장. 바르샤바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

- 바엘 즈바이터 : 로마의 자택에서 12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

- 마흐무드 함쉬리 : 파리의 자택에서 전화에 설치된 폭탄공격으로 사망.

- 후세인 아바드 알 치크 & 자이아드 무차시 : 키프로스의 자택에서 침대밑에 설치된 폭탄공격으로 사망.

- 바실 알 쿠바시 : 파리에서 12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

- 아부 유세프 & 카멜 애드완 & 카말 나세르: 이스라엘 코만도의 공격으로 베이루트에서 사망.

- 아드벨 하미드 쉬비 & 아드벨 하디 나카 : 차량이 폭발하여 사망.

- 모하메드 부디아 : 운전석밑에 설치된 폭탄공격으로 프랑스에서 사망.

- 알리 하산 살라메 : 베이루트에서 폭탄차량공격으로 사망.

- 아드난 알 가세이 : 뮌헨 공격에 직접 참가한 자, 서독에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다. 긴 도피생활 중 한 걸프 국가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 모하메드 사파디 : 뮌헨 공격에 직접 참가한 자, 서독에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다. 긴 도피생활 중 레바논에서 의문사했다. 이 역시 모사드의 소행으로 추정.

*주)작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차후 정리


10. 영향

이 테러사건은 그 후 테러의 악순환 곧 보복의 악순환을 낳았고 그 여파는 오늘날에도 중동에 남아 분쟁을 부르고 있으며, 제대로 된 대테러 전문부대가 없어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는 반성으로 세계 각국은 이 사건 이후 대테러전문 특수부대를 양성하여 유지하고 있다.

특히, 사건이후 독일은 대테러 특수부대 국경경비대 제9그룹(GSG-9)을 창설하였고, KSK라는 특수부대를 창설하여 현재도 운용하고 있다. 저격 실패의 교훈을 본받아, 총기 메이커들에 반자동 저격소총 설계를 의뢰했다. 발터(Walther)에서는 이에 대응해 WA2000을 개발했지만 이것은 채용되지는 못했다. 그 대신 헤클러&코흐가 개발한 PSG-1이 독일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채용되고 있다.

2005년 공개된 스티븐 스필버그감독의 영화 〈뮌헨〉은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가 주도한 보복작전 "신의 분노 작전"에 관련된 "아부나(가명)"(Avner)란 원 공작원의 실화를 기초로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 및 모사드의 옛 고위관리 등은 이 사실을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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