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세상

우장춘 씨없는 수박 최초는 아니다. 하지만 우장춘 업적은 그 이상이었다.

올드코난 2016. 8. 10.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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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생물학자, 식물학자, 원예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 1898년 4월 8일 ~ 1959년 8월 10일) 박사는 1945년 8·15 광복 이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의 식물학과 농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부산광역시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박물관(우장춘 기념관)이 있다. 우장춘 하면 씨없는 수박만을 떠 올린다. 하지만 그 이상의 업적에 대해서는 모르는 분들이 많아 정리해 본다.

우장춘 하면 떠 오르는 씨없는 수박, 하지만 그가 처음 만든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장춘 박사의 업적은 그 이상이었다. 


1. 출생 및 가계

본관은 단양(丹陽). 일본 도쿄에서 아버지 우범선(禹範善)과 어머니 사카이 나카[酒井仲]의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범선은 대한 제국 말 별기군 2대장 출신으로, 1895년 을미사변에서 명성 황후의 살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문에 1896년 아관 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903년 히로시마[廣島] 현 구레[吳] 시에서 前 만민공동회 회장 고영근에 의해 살해되었다. 1926년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고, 그의 자녀도 스나가 성을 따랐다. 일본인 와타나베 고하루(渡邊小春: 한국 이름 우소춘(禹小春)과 결혼 6명의 자녀를 두었다.


2. 일제 강점기

우장춘 박사는 아버지 우범선이 살해된 뒤 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는 우장춘을 일본 도쿄의 사찰 희운사(喜運寺)에 맡기는데 희운사의 주지 아라이[新井慈剛]가 우범선이 결혼할 때 중매를 섰던 인연으로 우장춘의 양육을 자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얼마 뒤 어머니를 따라 구레 시로 돌아간 뒤 구레중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3월 19일 졸업한다.

1916년 4월 1일 동경제국대학 농학실과에 입학 1919년 8월 9일 졸업하하는데 우장춘은 이때 매우 곤궁한 상황이라 뒤에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미노루(齋藤實)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1920년 6월 7일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의 고원으로 취직했고 데라오 박사의 도움으로 기수(技手)가 되어 1937년까지 재직하였다. 1936년 5월 4일 ‘종(種)의 합성’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 받았고 1937년 8월 25일 농사 시험장 기수에서 기사(技師)로 승진하였다. 1937년 8월 26일 농사 시험장을 퇴사하고 1937년 9월 11일 교토(京都)의 다키이(瀧井) 종묘 회사의 초대 연구 농장장으로 취업하였다.


3. 해방후

일제 패망직후인 1945년 9월 3일 다키이 연구 농장의 농장장직을 사임하고, 교토 인근의 장법사(藏法寺)에 머물렀다.

1947년 한국에서 우장춘 환국 추진 운동이 시작되고, 1949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창설한 이승만 정부는 우장춘에게 연구소의 운영을 부탁하고 1950년 3월 8일 귀국한다. 이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으로, 1953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가 중앙원예기술원으로 개편되자 중앙원예기술원장으로, 1958년 다시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원예 시험장으로 바뀌자 1959년까지 원예 시험장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 농업재건임시위원회 위원, 1953년 임시농업지도요원양성소 부소장을 겸임하였고,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 시기 우장춘은 일본인 부인과 자녀들을 일본에 남겨두었는데 이승만 정부는 우장춘을 믿지 못했는지 출국을 금지시켜 버린다. 모친상 때 도 일본에 돌아가지 못했고 원예시험장의 강당에서 어머니의 위령제를 지내기도 했고 원예 시험장 앞의 우물에 자유천(慈乳泉: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이 솟는 샘)이라는 이름을 붙여 어머니를 기렸다.

그리고 아버지 우범선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우장춘 박사는 일본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살았기에 한국말을 하지 못했는데 이 점 또한 비난의 이유가 되었었다.


4. 최후

한국에 돌아와 종자 개발에 몰두한 지 10년 되던해 우장춘은 당뇨병과 십이지 궤양 등 합병증이 겹치면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1959년 8월 10일 서울메디컬센터에서 사망한다. 일본에서 급거 입국한 부인이 임종을 지켰고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엄수되었다.


5. 채소 종자 국산화

우장춘 박사는 조국과 굶주린 국민들을 위해 한국적 토양에 맞는 농법 개발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 결과 무와 배추를 비롯하여 그간 일본에 의존하고 있던 채소 종자의 국산화에 성공하고 채소 종자의 독립을 이루게 된다. 이 외에도 화훼 원예의 발전과 많은 분야에서 품종을 개량하고 기술을 개발하고 재배 방식을 개선한다.


6. 씨없는 수박의 진실

우장춘 하면 잘 알려진 그리고 가장 먼저 떠 오르는 ‘씨 없는 수박’은 일본의 기하라(木原)연구소에서 개발한 것이고, 우장춘은 이를 실현해 보인 것인데 이는 농업 신기술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서 씨 없는 수박 종자를 직접 만들어 재배하여 보여 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는 매우 좋은 방법이었다. 씨없는 수박으로 우장춘 박사는 대중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고 육종하게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7. 주요 성과

바이러스 감염에 취약한 강원도 감자 개량, 일본 재래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 한국 환경에 맞는 배추 개발, 제주도 환경에 적합한 감귤 재배 권하다. 페튜니아를 화초로 가꿀 수 있도록 겹꽃 개량종을 개발, 종의 합성이론을 제창하여 진화론의 새지평을 이루었고, 유채를 일본으로부터 도입하여 제주도에서 재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8. 평가

우장춘 박사는 한국 육종학의 선구자였고, 오늘날 한국 농업의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10년간 해낸 그의 연구 성과는 이후 대한민국의 보릿고개를 사라지게 한 절대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그리고, 우장춘 박사를 보면 매국노 후손들 중에도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그는 비록 한국말을 못했지만,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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