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2월 24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JSA 241 GP 3번 벙커에서 경비소대장 김훈(육사 52기) 중위가 사망한 채 발견된다. 김훈 중위의 아버지는 예비역 육군 중장 김척(육사 21기) 장군이었다. 장교가 사망한 사건임에도 수사 과정을 보면 의문 투성이다. 정리해 본다. (출처/참고 자료: 나무 위키, SBS 그것이 알고싶다)
대표적 군 의문사 일명 '아버지의 전쟁' 김척 장군의 아들 김훈 중위 사건. 국방부의 무조건 자살 결론 장군 아들도 예외가 없다? 사건의 문제점과 타살 의혹들 정리.
1. 사건 발생 (공식 발표 내용)
1998년 2월 24일 오전 9시 경 당시 예정에 없던 부대 내 VIP (미군 장성 진급자 10명) 방문 일정이 잡혀 해당 부대는 한창 분주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1시간 뒤 일정이 취소되고 이때 김훈 중위는 식당에 들어가 물을 마신 후, 소대 사병 모임에서 돌아온 소대원들의 귀대 보고를 받았다. 오전 10시 30분경, 김 중위는 식당에 잠시 들러 라면을 먹고 있던 소대원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라면을 몇 젓가락 먹고 식당을 떠났다.
소대장실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었다던 부소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오전 11시 45분 근무복장을 갖춰 입고 정찰을 나간다며 소대장실을 나선다. 그리고 오전 11시 50분경 상황실에 들른 것이 생전의 마지막 목격이다. 오후 12시 20분경, 식사인사를 하러 돌아다니던 소대원에 의해 GP 지하벙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2. 사건 현장
현장에는 김 중위의 오른발로부터 50cm정도 떨어진 곳에 베레타 M9 9mm 권총이 떨어져 있었고 그의 오른쪽 머리에 직접적 사망원인이 된 총상이 있었다.
3. 군 수사 1차 결과는 자살?
사건을 조사한 한미합동수사팀은 사건 발생 2개월 후 1998년 4월 28일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이라는 1차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소대원들의 알리바이가 모두 확인되었고 살해 동기를 가진 사람이 없으며 원인은 확인되지 않아 타살의 증거가 없으므로 자살로 판정했다는 것이다.
4. 타살 가능성 제기
타살의 증거가 없을 경우 자살로 추정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1차 조사 이후 타살로 의심될만한 정황과 증거가 계속해서 드러난다. 특히, 자살을 했다고 보기에 부자연스러운 격발자세와 총을 잡고 격발했을 오른손에서 화약흔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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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재조사 결과도 자살?
부실수사 여론이 높아지자 국방부는 1998년 12월 양인목 중장을 단장으로 하는 특별합동조사단을 조직 재수사를 한다. 조사단은 JSA경비소대원 재소환, 거짓말탐지기, 법의학자 공개토론회를 거치고 1999년 4월 다시 한번 자살로 발표했는데 근거는 법의학자 공개토론회에서 참석한 8명의 법의학자 가운데 재미 법의학자 노여수 박사를 제외한 전원이 자살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는 점이다.
6. 자살 동기 없었다.
자살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하지만 김훈 중위는 자살을 할 동기와 이유가 없었다는게 문제다. 육사 출신 김척 장군의 아들인 김훈 중위는 자발적으로 군 입대를 한 사람이었다. 국방부 특조단이 '김훈 중위가 부모에 의해 원치 않았던 적성을 강요받았고 이는 자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밝혔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가족들은 육사 진학을 반대했었다고 주장한다. 일반대학에 진학해 국제변호사가 되길 바랐다는 것이다.
또 육사 졸업후 소위로 임관한 후 사단장 표창을 받았고 사건 발생 1달 전에는 육군정보학교 군사영어 교육반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으며 당시 소대원들과 지인들은 김훈 중위가 자살할 인물은 아니었다 증언한다. 군 수사팀도 자살 동기에 대해 밝혀내지 못했다.
7. 타살 의혹들
1)총이 발사된 거리
보통 권총 자살을 하는 경우엔 격발 시 총이 흔들려 빗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몸에 꽉 대고 쏘는 '접사'를 하지만 김훈 중위는 '근접사'였다. 참고로 미국의 전체 총기자살 중 접사가 아닌 근접사로 자살하는 경우는 약 3%에 불과하다.
2) 손에서 화약흔이 발견되지 않았다?
가장 큰 의문이 남는 대목. 맨손으로 총을 쐈다면 반드시 화약 잔여물이 발견되어야하지만 오른손잡이였던 김훈 중위 오른손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왼손에서 화상 및 잔여물이 발견되었다.
3) 총에 지문이 없었다.
김훈 중위는 당시 맨손이었다. 하지만 총에서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다. 재조사에서 감식관이 확인한 결과 부분적으로 지문이 나오기는 했지만 누구의 것인지 확인이 불가능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4)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된 제3자의 지문
당시 김훈 중위 사건에 사용된 권총에 장전된 탄환에서 발견된 지문을 유가족은 경찰청에 감식을 의뢰한 결과 김훈 중위의 지문이 아닌 제3자의 지문이었다.
5) 김훈 중위의 권총이 바뀌었다?
김훈 중위의 주변에 떨어진 권총이 김훈 중위의 것이 아니라는 문서상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2014년 4월 5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이 사실은 김훈 중위의 유가족이 김훈 중위의 총기 소지증 상의 총번과 실제 현장에서 발견된 권총의 총번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해 의혹을 제기, 사건 6개월 후에야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현장에 발견된 총기 김상병의 것으로 국방부는 당시 김훈 중위의 총이 고장 나 다른 사람의 총을 가져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수불증(受拂證)이 위조된 서류라는 증언이 나왔다. 권총 수불증은 미군이 관리.
6) 현장 격투 흔적들
사건 현장 241 GP 3번 벙커는 북쪽과 가장 근접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벙커에 설치된 크레모아 격발스위치를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 중에 하나로 하루 두 번 실시되는 전원투입 근무 때마다 소속 부대는 스위치를 감싸고 있는 나무박스의 상태를 점검하고 문제가 생길 경우 부사관에게 보고한 뒤 곧장 고치도록 되어 있다. 사건 당시에는 이 3번 벙커 안의 크레모아 박스 뚜껑은 부서져 있었다. 또 김 중위 왼손 손목시계 유리가 깨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누군가와 격투를 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드는 대목
7) 시신 옆 의문의 헬멧
당시 현장 사진을 보면 총기 옆에 헬멧이 놓여 있는데 그 후 사라졌다. 미군 군의관은 이것은 자신의 것으로 검안 당시 자신의 방탄 헬멧을 총기 옆에 벗어 두었다가 사진을 찍고 나온 후에 헬멧을 두고 온 것을 알고 운전병을 시켜 가지고 오게 했다고 진술했다. 다만 당시 사건현장을 경비하던 한국군 병사들의 증언도, 사건 현장 촬영을 위해 미군 하사가 계속 들락날락 했지만 미군의관은 더 나중에 왔다고 하여 사진에 군의관의 방탄 헬멧이 찍힐 수 없다는 의문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이 헬멧이 둔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제기했다.
8) 김훈 중위의 몸에서 발견된 부상 흔적들
김 중위의 오른쪽 손에서 2.5cm x 1.5cm 크기의 찰과상이 발견되었고 두정부의 상반부 가운데 피하조직에서 방사선 골절 및 4.8cm 크기의 혈종이 발견되었다.
9) 김훈 중위 시체를 닦은 미군 군의관
2014년 4월 5일자 그것이 알고싶다 편에서 사건 당시 시체를 최초로 검안한 미군 군의관이 총상 부위를 포함한 시체의 전신을 닦아 냈다. 군의관과 동행한 한국군 의무병도 증언했다. 부검 전의 시체를 닦아내는 것은 증거의 심각한 훼손 행위로 간주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8. 김영훈 중사
김훈 중위 소대의 부소대장 김영훈 중사가 북한군 병사와 불법적으로 접촉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호기심 때문으로 야간을 이용해 20, 30차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군 초소를 찾아갔던 것으로 드러났다. 군당국은 이 사실을 적발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했다. 이에 대해 김영훈 중사가 북한군에 포섭되어 김훈 중위를 살해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무혐의 처리되었다. 이후 김영훈 중사와 가족이 범행의혹을 제시한 3개 언론사에 대해 명예훼손에 대해 일부 승소를 거두고 손해배상을 받았다. 덧붙여 김영훈 중사에 대해서는 국가보안법이 아니라 군형법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뒷말이 나온다.
9.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다.
2009년 군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와 2012년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재차 조사를 벌였지만 자살 타살 어느 쪽으로도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이유로 진상규명 불능결정이 나왔다. 이는 사건이 발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고, 국방부는 제대로 된 수사보다는 사건을 축소 은폐를 하려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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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SBS 그것이 알고싶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1998년 사건 최초 발생 시점에 이 문제를 방송했고 당시 군의문사 사건을 언론에서 공개적으로 검증한 것은 처음이라 많은 관심을 모았고, 결국 재수사 결정까지 이끌어 내게 된다. 2010년 6월 5일 759회 아버지의 끝나지 않은 전쟁-JSA 김훈 중위 죽음의 미스터리 편 2014년 4월 5일 934회 JSA 김훈 중위, 오른손의 미스터리 편이 방송되었고 큰 화제가 되었다.
11. 뒷이야기
김훈 중위 사망 원인이 자살로 판명나자 육사 52기 33명이 5년차 전역을 선택하고 말았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중 평균 10명 내외 정도만 5년차 전역을 했던 다른 기수들에 비해 많은 인원으로 이를 두고 집단 전역이라는 말이 나왔다.
2012년 7월 공무로 정신질환 치료를 받았거나 구타·폭언 등으로 자살한 군인도 순직으로 인정하기로 국방부 훈령이 개정되었으나, 김훈 중위는 자살이든 타살이든 순직 사유에 해당하지만 사망 원인이 확실하지 않아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2012년 국민권익위원회는 사망 원인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경우에도 순직으로 인정할 것을 권고했고 2013년 3월 군의 '전공사상자 처리 훈령' 개정으로 김훈 중위는 순직 처리와 국가유공자 자격을 인정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12. 김훈 중위 사건의 의미
대한민국 건군이래 수 많은 군 의문사가 있었다. 의문사라 부르는 이유는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타살인데, 자살이라고 주장한다. 김훈 중위 사건 같은 경우도 자살의 의견도 있지만, 타살 의견이 더 많다. 그럼에도 국방부는 이 사건을 제대로 수사를 하는 대신 서둘러 축소 및 은폐를 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김훈 중위의 아버지는 육군 중장 출신이었음에도 이런 태도를 보이니, 일반 국민들의 자녀들은 제대로 된 수사를 하겠는가.
이 사건이 중요한 것은 바로 장성의 아들의 죽음 조차도 제대로 진상규명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김훈 중위 사건을 대표적인 군 의문사로 규정하는 것이다. 장군의 아들이 죽어도 자살이라는 말부터 하는 국방부를 신뢰 할 수 있겠는가.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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