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당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 평가

올드코난 2017. 4. 5.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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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의 제2대 황제 당태종 이세민(唐 太宗 李世民, 599년 1월 23일 ~ 649년 7월 10일)은 당 고조 이연의 둘째 아들로 '세민'의 본래 뜻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다. 뛰어난 장군이자 전략가이며 정치인으로 청나라의 강희제와 더불어 중국인들이 꼽는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며 세계사를 통틀어서도 유능했던 황제로 꼽힌다. 정리해 본다.


최고의 성군 당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 평가

1. 초기

수나라 시기 599년 개황 19년 당국공 이연과 부인 두씨 사이에서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비족 출신으로 보이며 아버지 이연의 어머니 동생이며 이연의 이모가 수문제 양견의 아내 독고황후로 이연은 수양제 양광의 이종 사촌형이 된다. 614년장손씨와 혼인을 올렸다.


2. 건국의 공신

617년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의 실패와 폭정으로 수나라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아버지 이연도 반란을 일으키고, 이세민은 아버지와 함께 수나라 수도 장안을 차지한다. 이때 수양제가 강도에서 시위장이자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과 우문지급(宇文智及) 형제에게 암살되자, 이연은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당으로 하고,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봉했다. 이세민은 당의 건국초기 반란군을 진압하고 큰 공을 세워 당 고조 이연으로부터 천책상장(天策上將 즉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별호를 얻었다. 이는 장남 이건성이 황태자로 있었기에 이세민을 달래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다.


3. 현무문의 변과 황제 즉위

이세민은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갖고 형이자 황태자 이건성은 그를 견제한다. 626년 7월 2일 이세민은 고조를 알현해 형제들이 자기를 죽이려 모함한다고 아뢰고, 당고조는 황태자와 이원길을 황궁으로 부르는데 이들이 황궁의 현무문으로 들어온 순간, 매복한 이세민의 군사들이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인다. (현무문의변)

3일 뒤 이연은 할 수 없이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고, 2개월 뒤 이세민에게 양위하고 이세민이 9월 4일 즉위해 황제가 된다. 이듬해에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정한다.


4. 정관의 치

이세민은 유능한 황제였고, 당나라 내부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농민들에게토지를 나누어 주어 조용조 제도 등으로 민생을 안정시킨다. 이에 당나라는 재정이 풍족해진다. 과거제도를 실시해 유능한 관리를 양성했고 이건성의 편에 있던 위징을 용서해 재상으로 삼는 등 유능한 인재에게 기회를 주었고 이런 당태종의 적절한 인사조치와 유능한 지도력을 당나라는 고대 최강의 제국을 이룩하게 된다.


5. 대외 정복

630년 당태종은 동돌궐을 정벌하여 텡그리카간[天可汗], 즉 천하의 칸 중의 칸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중앙 아시아도 정복해 당의 영토를 배로 넓히는 등 한족 국가로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고 자신만만하던 당태종에게 굴욕을 안겨준 것은 바로 고구려 원정이었다. 집권 후반 당태종은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하고 실권을 잡은 뒤 보장왕을 옹립하자 이를 기회로 보고 보병 7만명, 수병 6만명과 기병 3만명 등을 이끌고 직접 친정해 고구려를 침공한다. 전쟁 초기에는 고구려의 요동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승리를 거두지만 양만춘의 지휘하는 안시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장기전으로 가게 되자 겨울을 앞두고 철수하게 된다. 이후로도 당태종은 고구려에 병력을 파견 하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단, 수나라처럼 나라를 망하게 하지는 않았으니 이 또한 공일 것이다.


5. 최후

649년 당 태종은 이질을 앓고 있었다. 황태자 이승건을 폐하고 4남 복왕 이태를 태자로 삼았지만 행실을 이유로 폐하고 9남 위진왕 이치(당고종)를 황태자에 세웠다. 황태자 이치에게 대리 청정을 맡기다 649년 7월 10일 당 태종은 장안 함풍전에서 51세를 일기로 죽었다. 시호는 태종 문무대성대광효황제(太宗 文武大聖大廣孝皇帝)이며, 능호는 소릉(昭陵)으로 묘는 지금의 섬서성 예천현에서 동북쪽으로 50리 떨어져 있는 산에 묻혔다.


6. 평가

당태종은 분명 유능한 황제이지만, 그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과대 포장되었다는 의견이 많다. 일종의 공작정치의 달인이라고 할까. 고구려 원정은 분명 큰 패배였고, 이에 따른 국가의 손실을 컸을 것이다. 하지만 당태종은 백성과 역사를 속이려했다. 자신의 패배를 숨기로 피해 내용을 대폭 줄인 것이다. 또 정관정요는 후대의 귀감이 되는 중요한 정치 교과서 역할을 했지만, 이 내용이 과연 당태종과 직접한 말들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자치통감의 어록과 인용이 겹친다는 역사 전문가들의 지적이 있다. 그렇다고 정관정요 자체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책이지만 당태종을 너무 성역화 했다. 당태종은 이렇게 정리해 보는게 맞을 것 같다. 당태종은 유능한 황제이며 장군이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여기에 공을 부풀리는 법은 더 잘 아는 사람이었다. 과를 공으로 둔갑시킬 줄 아는 공작정치의 달인이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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