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수의 창업자 수문제 양견 (隋文帝 楊堅) 설명 평가

올드코난 2017. 4. 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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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난으로 시잔된 분열 그리고, 한나라의 멸망과 삼국시대 위진남북조대 (오후십육국 남북조 시대)까지 무려 405년간이라는 기나긴 분열된 중원을 통일한 이가 바로 수문제 양견이다. 한국인들에게는 그의 아들 수양제보다 덜 유명하고 관심 밖의 인물이지만 중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중요한 인물이었다. 정리해 본다.


1. 개요

수 문황제 양견(隋 文皇帝 楊堅, 541년 ~ 604년) 중국 수나라의 초대 황제로 자(字)는 나라연(那羅延) 묘호는 고조(高祖)이고 시호는 문황제(文皇帝)이며 능호는 태릉(太陵)이다. 400여 년간의 중국의 혼란기에 종지부를 찍고 명군으로 평가를 받는다.


2. 초기 출생

양견은 581년 서위의 수국공(隨國公)이며 대사공 양충과 여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홍농의 화음 출신으로 스스로를 후한의 태위였던 양진의 14세손이라 칭했다. 13살까지 비구니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하며 이후 당시 귀족 자식들을 위한 학교에 다녔다. 14살에 북주의 세력가문인 우문씨의 문하에서 군인의 삶을 시작했고 16세 때 2살 연하인 대장군 독고신의 딸이며 훗날 여장부라 일컬어지는 독고황후 독고가라와 결혼했다.


3. 북주 권력 장악

양견은 유능한 군인으로 능력을 인정을 받았고 우문씨 가문의 배경 덕분에 소궁백(小宮伯)·대흥군공(大興郡公)에 봉해졌고, 수주자사(隋州刺使)·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었고 아버지 양충이 죽자 수국공도 습작했다. 양견은 북쪽 평원을 장악하고 있던 북제(北齊)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이후 북제를 복속시킨 뒤 그 지역의 총관(總管)을 맡아 군정을 담당하고 양견의 장녀 여화를 북주 황태자 우문윤(훗날 선제)와 결혼하면서 양견은 황제의 장인이 된다. 사위 북주 선제가 보위에 오른후 양견의 권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정제는 정신상태가 이상했는데 양견은 이런 정제에게서 황위를 빼앗을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에 정제 편에선 신료들과 충돌이 있었지만, 내분으로 결국 양견에게 패하고 만다. 이에 사실상 북주의 실권은 양견에게 가고 580년 북주 선제가 36세로 병사하자, 선제의 아들이며 양견의 외손자 우문연 (정제 靜帝)가 뒤를 이으면서 북주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승상이 되고 수왕(隋王)에 책봉되면서 사실상 북주는 양견이 다스리게 된다.


4. 수의 건국

581년 3월4일 우문연은 양견에게 제위를 선양하는 형식으로 양견에게 황제를 물려주면서 북주는 멸망하게 된다. 양견은 황제로 즉위해 국호는 수로 하고 연호는 개황(開皇)으로 정했다. 수도는 본래 낙양을 염두에 두었지만 서방 진출을 위해 장안을 수도로 삼아 새롭게 건설하게 된다.


5. 남북조의 통일

황제가 된 수문제 양견은 남북조의 통일 사업에 주력했다. 남조 진나라의 황제 진숙보가 사치와 방종에 빠졌고 간신들의 참소만 들어 나라가 크게 피폐해져 있었고 이에 양견은 차남 진왕 양광(수양제)에게 군사를 내주어 진나라를 공격하라 명했고 589년에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405년간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중원을 통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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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치

수문제는 9품중정제를 완전히 폐지하고 과거제를 실시해 유능한 인재들에게 기회를 주고 귀족세력을 억제해 세습적으로 지방관직을 장악하던 이들의 세력온상이었던 향관과 주관을 폐지하고 중앙에서 관리를 임명하는 등 강력한 중앙정부 체제를 마련한다. 또 세금을 적게 걷어 백성들을 달래고 백성들에게 균등히 토지를 지급하는 균전제를 실시한다. 양견은 궁정의 소비를 줄이고 근검절약했는데 이런 노력으로 수나라는 크게 안정된다. 수문제가 기틀을 다잡은 이런 수나라의 제도는 훗날 당나라가 그대로 계승을 하게된다. 그런 점에서 수와 당은 같이 묶어서 보는게 옳을 것이다.


7. 외치

중국의 오랜 골칫거리이기도 돌궐을 강함과 부드러움 두 방법으로 압박해 다루었는데, 돌궐의 분열로 동서로 나뉘고 세력이 약화되자 수는 투르키스탄과 몽골 지방을 공격해 돌궐의 세력을 약화시킨다. 그리고 고구려에는 30만의 원정군을 보냈지만 모조리 전멸하고 이후 수문제는 고구려 원정을 단념한다. 베트남 공략도 실패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수나라가 흔들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수문제는 나라의 기반이 잘 잡았던 것이다.


8. 후계자 문제

황태자는 장남 양용으로 능력이 있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차남 양광(수양제)이 황태자 양용이 여색에 빠지고 사치스런 생활을 즐겨 행실이 문란하다고 이간질하고 태자비가 죽었는데도 수수방관했다는 말이 나돌자 양용을 싫어했던 독고황후는 양견에게 태자를 바꿀 것을 종용하고 600년에 양용은 황태자에서 폐위되고 차남 양광이 황태자에 오른다. 602년 독고황후가 죽자 양견은 다시 양용을 황태자로 세우려 하지만 양광의 측근 양소와 우문술 등이 극구 만류하면서 그만둔다.


9. 말년과 최후

나이를 먹어가면서 충신들이 조금씩 죽어가고 지난 일들에 대한 죄의식 등과 불안감 등에 빠지면서 정신적으로 약해지면서 실정을 하게 되고 불교에 심취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던 수문제는 독고황후 사후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극단적으로 생각하게된 수문제는 충신을 죽이고, 잔혹한 처벌을 내리며 거의 매일 형틀에서 사람을 친히 매질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후궁을 여럿 들이며 쾌락에 빠지는 등 수문제의 말년은 더 이상 명군의 모습은 없었다. 이렇게 갈수록 정신적으로 유체적으로 망가지면서 병이 위중해진 수문제가 병석에 누운 사이 양광은 자신이 사모하던 과거 진의 공주 선화부인 진씨를 범하는데 선화부인 진씨는 양견의 후궁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후궁을 범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양견은 분노하고 폐황태자 양용을 다시 황태자에 앉힌다는 교서를 내리지만 이 소식을 들은 양광은 장형과 모의해 반란을 일으키고 그날 밤 양견은 양광의 심복이자 자신의 근위장 장형에게 처형당한다. 향년 64세. 양용은 양광의 근위장 우문지급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10. 평가

수문제에 대해서는 위선적인 인물이라는 평가가 있다. 수나라를 개국한후 사치를 엄격하게 하면서 솔선수범해 반찬 하나뿐인 식사를 했다고 백성들에게 알리며, 정작 사찰 수천 곳을 건립하면서 국고를 낭비한 점을 든다. 타당한 평가지만, 그 시대 수많은 군주들 특히, 위진남북조 시대 혼돈의 시대 군주들과 비교를 한다면 수문제는 성군의 칭송을 받을 정도로 명군이었다는 시각이 대체적이다. 법을 엄하게만 한 것이 아니라 황족도 처벌하는 등 원칙을 지키려 한 점과 수문제를 모독했다고 함부로 처벌하지 않았다는 점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말년에서의 그의 행동을 보면 잔인하고 위선적인 인물이라는 평가가 맞았다. 죽기전까지 수문제는 폭군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아들 양광에 비해 덜 잔인했을 뿐이다. 어쩌면 수양제 양광은 아버지 수문제의 잔인성만을 이어받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의 부인인 독고황후와 사실상 공동정치를 한 것에 대해 성리학자들이 비판하지만, 그녀는 매우 유능한 조력자였었다. 그녀의 사후 수문제가 무능한 면을 보인 점은 다시말해 수문제에게 독고황후가 있었기에 명군이 칭호를 받게 된 주요한 이유가 아니었까 생각해 보게 된다. 표독스런 이미지는 유학자들이 여성 폄하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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