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폭군 수양제 양광(隋煬帝 楊廣) 설명

올드코난 2017. 4. 3. 18:41
반응형

수나라를 건군한 문제가 죽자 황태자 양광이 수나라 2대 황제로 즉위한다. 훗날의 수양제로 불리는 양광의 폭정은 수나라를 단명 제국으로 만들고 만다. 고구려 원정으로 우리들에게 익숙한 수양제에 대해 정리해 본다.


1.개요

수나라의 제2대 황제 수 명황제 양광(隋 明皇帝 楊廣, 569년 ~ 618년 3월 11일) 은 수문제와 문헌황후 독고씨 사이의 차남으로 장남 양용이 폐위된후 황태자가 되고 황제에 올랐다. 본래 수나라에서 올린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명(明)황제이지만 당나라에서 비하의 의미로 양(煬)을 대신 붙여 현재 주로 양제(煬帝)로 불린다.


2. 양제의 양(煬)의 의미

양(煬)은 시법(*시호(諡號)나 묘호(廟號), 존호 등을 붙이는데 쓰는 법칙)에서 여자를 좋아하고 예를 멀리함(好内遠禮), 예를 내치고 중신을 멀리함(去禮遠衆), 여자를 좋아하고 정사를 위태롭게 함(好内怠政), 예를 내치고 올바름을 멀리함(去禮遠正), 하늘을 거스르고 백성을 해침(逆天虐民)이란 뜻을 가진 시호다. 아버지와 형제를 해치는 패륜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늘을 거슬렀다고 본 것이다.


3. 초기 생애

569년 태어나 581년 12세에 아버지 양견이 북주 정제로부터 선양받고 즉위해 수나라를 건국하자 진왕(晉王)의 작위를 받았다. 이후 남조 진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공이 있다하여 태위의 벼슬을 받았다. 양광은 양주총관을 맡아 후방에서 동생인 한왕 양량을 도왔다. 598년 2월에 양량과 함께 고구려 원정을 나갔는데 크게 패하고 수나라대군이 전멸한다. 이에 양견이 분노해 양광과 양량에게 자결을 명하지만 독고황후가 말렸다.


4. 황태자가 된 양광

문제의 부인이며 양광의 어머니 독고황후 (문헌황후 독고씨 文獻皇后 獨孤氏)는 흔히 악처로 잘 알려졌다. 남편 문제가 후궁을 들이는 것을 막을 정도였는데 당시 태자였던 장남 양용이 여색을 밝히고 사치를 밝히는 양용을 싫어하게 된다. 특히 모후가 좋아했던 태자비가 죽었는데도 슬퍼하지 않고 다른 여자를 탐하며 가정을 돌보지 않자 독고황후는 양용을 황제 자격이 없다 여기게 되고 반면 양광은 청렴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누추한 의관을 입고 다녔고 여자를 범했다는 말조차 들리지 않았다. 물론 양광은 실상 아주 방탕한 인물이었지만 양용과의 차이점은 부모 앞에서는 자신을 속이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겉으로는 효자이며 여자를 멀리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독고황후의 마음을 얻었던 것이고 결국 양용을 태자에서 폐위하고 양광을 황태자로 임명하게 된다. 양광의 태자 책봉식은 매우 성대하게 치러졌는데 이때 엄청난 바람이 불고 지진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수나라가 기울어져 결국 멸망하기에 이른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전한다.

블로그 올드코난 갈대의 지혜와 나무의 의지를 갖고 글을 쓰겠습니다. 



5. 반란으로 황제가 되다.

태자에 오른 양광은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특히 여색을 밝혔는데, 602년 8월 모후 독고황후가 죽자 여색을 탐하는 것을 숨기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더구나 양광은 아버지 수문제의 후궁 선화부인 진씨를 사모했는데, 수문제 24년 604년 수문제가 병으로 위중해 몸져 누웠을 때 진씨를 범하려 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수문제는 살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위독했는데 문제는 장안의 인수궁 대보전에 누워있었고 월국공 양소, 병부상서 유술 등이 대보전을 지키며 수문제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양광은 양소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서 황제 사후의 일을 상의한다.

양소는 양광을 황제로 옹립하기 위한 대비책이 담긴 서찰을 양광에게 보내는데 궁인의 실수로 양소의 서찰이 수문제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만다. 서찰 내용에는 문제가 죽기전 양광이 양소와 짜고서 제위에 오를 방도가 적혀 있었고 문제는 큰 충격을 받게 되고 마침 선화부인 진씨가 헝클어진 옷차림으로 문제를 찾아와 울며 양광이 자신을 겁찰하려 했다는 말을 하자 문제는 분노하고 양광을 소환한다. 그리고 태자를 다시 양용으로 교체하려 한다.

하지만 수족들을 통해 이 사실을 먼저 알게 된 양광은 상서우복야 월국공 양소, 시종무관장 장형과 장군 우문술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대신들과 궁녀들을 죽이고 그날 밤에 장안 인수궁 대보전에서 양견을 처형했고 형 양용에게 조작된 유언장을 보내어 자결을 명하지만 자결하지 않자 자신의 근위장 우문지급을 보내 처형했다. 문제가 죽은 그 날 양광은 선화부인 진씨를 강제로 범한다. 그리고 곧 제위에 오르니 수의 제2대 황제 수 명황제 양광(隋 明皇帝 楊廣)으로 훗날의 양제(煬帝)다.


6. 폭정

폭군들이 늘 그랬듯이 양제는 즉위하자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일으켰다. 만리장성과 중단된 대운하 공사가 대표적이다. 특히 대운하 공사는 북경에서 항주까지 짓는 대공사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사업이었다. 여기에 수도 장안 대신 낙양에 동경(東京)을 쌓게했는데, 이로 인해 국가의 재정도 낭비되었지만 문제는 부역의무를 진 백성들의 엄청난 고통이었다. 동원된 백성들은 엄청난 노동과 굶주림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죽어갔고, 부역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팔다리를 자를 정도였다고 전한다. 이렇게 건설된 대운하는 이후 남쪽의 장강과 북쪽의 황하를 연결시켜 남북 융합에 크게 이바지 했다고 하지만, 이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갔다.

이런 토목공사 외에도 온갖 사치를 즐겼고 특히 백성들을 학살하기까지 했다. 예를 들면 양광은 대운하를 건설할 당시 40여개의 행궁을 지었고 운하 옆에 대로를 건설해 그 옆에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게 했는데, 당시 중장비가 없던 시기 큰나무를 심는 작업은 작은 일이 아니다. 잠시 보고 즐기기 위한 나무들을 심기 위해 역시나 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어 고통을 겪었고, 운하에서 얕은 지대가 발견되자 관리 책임자와 인부들을 강가에 생매장하는 짓을 벌이기도했다. 이 외에도 많은 폭정 사례가 있지만 생략한다.

블로그 올드코난 갈대의 지혜와 나무의 의지를 갖고 글을 쓰겠습니다. 



7. 수양제를 몰락시킨 고구려 원정

수양제를 직접적으로 몰락시킨 것은 2번에 걸친 고구려 원정이었다. 수문제가 중원을 통일한 이후 수나라는 대외적으로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북방의 돌궐과 토욕혼을 공략해 성공을 거둔다. 수양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요구했으나 고구려의 영양왕은 거절하고 수양제는 이후에도 수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과 입조를 요구하지만 고구려는 분명하게 거절한다. 이에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을 결심한다.

612년 정월 수양제는 113만 3800명의 군사에 거기다 병참지원까지 약 300만명에 이르는 엄청난 병력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 하지만 고구려군의 거센 저항과 을지문덕같은 유능한 장수들에 의해 수양제의 1차 원정은 수나라의 대패로 끝나고 만다. 만일, 여기서 그만두었다면 수나라가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패배의 후유증이 가시지않은 다음해 613년 3월 양제는 35만 대군을 동원 고구려 2차 원정을 강행한다. 공격 초기 수나라가 우세한 상황에서 자칫 고구려의 큰 위기 될 수 있던상황에 수나라 예부상서 양현감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다. 여기에 양현감의 친구 곡사정이 고구려에 투항하자 양광은 급히 퇴각을 하고 고구려는 뒤를 공격해 이번에도 수나라는 패하고 만다. 양현감의 반란을 진입한 양제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려 한다. 614년 3월 3번째 고구려 원저에 나서는데 수나라 군사들은 계속된 전쟁의 패배로 싸울 의지가 없었고 탈영병이 늘어가기만 했다. 이런 상황을 눈치채 고구려는 사신을 통해 항복할 것이니 군사를 철수시키라 말한다. 이는 양제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후퇴할 명분을 준 것으로 봐야 한다. 이에 양광은 신하들에게 못이기는 척 군사를 철수시킨다. 이렇게 3번에 걸치 고구려 원정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된다.


8. 죽음

토목공사와 그의 사치로 인해 안으로 국정이 문란해지고 있던 시기 고구려 원정으로 많은 병사들과 백성들이 희생되었고, 백성들은 분노하고 전국에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귀족들도 들고 일어났는데 120여 건이 넘는다고 하며 규모도 컸다. 수나라는 사실상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양제도 그걸 알았는지 장강 이남의 강도로 피난을 간 이후 술로 나날을 보내다. 의녕 2년 618년 3월 11일 자신의 근신이자 고구려의 원정군 사령관이었던 우문술의 아들 근위장 우문화급에 의해 죽는다. 묘는 양저우 근교의 레이탕(雷塘)이라는 곳에서 황릉으로 불리지 않은 채 양광지묘(楊廣之墓)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다 2013년 양저우에서 수양제의 진짜 무덤이 발굴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