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수의 짧은 번영 개황의 치(開皇之治)와 수의 멸망

올드코난 2017. 4. 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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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건국초기 수문제의 개혁에 의해 수나라는 안정과 번영을 누리게 된다. 선비풍으로 회귀하던 북주의 정책을 중지하고 북제의 제도를 참조해 수문제는 새로운 국가에 맞는 개혁을 시작하는데, 581년 개황율령(開皇律令)을 제정해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법을 간소화해 백성들이 고통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개황율령은 이후 당나라의 율령으로 이어진다. 


남북조 시대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에 의해 관리 임명권이 귀족 세력의 손에 있던 폐단을 없애기 위해 과거(科挙)제도를 실시하는데 지방호족의 세습적인 임관이 아니고 실력시험의 결과로 관리의 임용을 결정하면서 실력 있는 인재가 나랏일을 하게 되었고 관리 임명권이 황제에게 돌아옴으로서 중앙정부의 힘이 강화된다.


수나라의 관리제도는 상서성(尚書省), 문하성(門下省), 내사성(内史省)의 3성을 최고 기관으로 설치하고 상서성 아래에 문서행정기관인 6부(六部)를 두었는데 인사담당 이부(吏部), 재정담당 도지부(度支部), 의례(儀禮)담당 예부(禮部), 군사담당 병부(兵部), 법무담당 도관부(都官部), 토목담당 공부(工部) 등이다. 그 아래에 실무기관인 9시(寺)를 두고 이를 별도로 감찰하고 감독하는 기관인 어사대(御史台)를 설치했다. 지방에 대해서도 이때까지 쓰여오던 주(州), 군(郡), 현(縣)이란 3단계 구분을 없애고, 주, 현의 2단계 구분으로 재편성하였다. 수나라에 의해 정비된 이런 제도 대부분을 당나라가 그래도 물려받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제도들로 수나라는 안정되고 재정은 넉적해지면서 백성들은 오랜 전란에서 벗어나 평화의 시기를 맛보게 된다. 수나라 번영기였던 문제의 치세를 개황의 치라고 부른다. 하지만, 개황의 치는 오래가지 못한다. 수문제 말년은 폭군이었고 무엇보다 뒤를 이은 수나라 2대 황제 양제가 문제였다.


수문제의 황후이며 양제의 어머니 독고황후는 강한 여성이며 질투심도 많아 남편 문제에게 자신 이외의 여성에게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라는 당시 황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서약을 맺게 한다. 이런 독고황후가 맏아들 양용이 놀기를 좋아하고 여색을 즐기는 것을 싫었했던 것은 당연할 것이다. 결국 양용은 폐태자가 되고 차남 양광이 뒤를 이어 황태자가 되고 수문제 사후 수나라 2대황제 수양제가 된다.


수양제는 황제가 되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사치와 여색을 탐하고, 잔인한 형벌을 가한다. 대규모의 토목사업을 벌였는데 수도 대흥성 건설과 대운하를 대폭으로 연장해 하북에서 강남에까지 서로 연결하게 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대운하를 백성들이 쓸 수 있도록했다면 국가에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대운하를 수양제는 유람선을 타고 다니면서 유흥지처럼 활용했다는게 문제였다. 그리고, 운하 곳곳에 궁궐을 세워 나랏돈을 낭비하게 된다.

블로그 올드코난 갈대의 지혜와 나무의 의지를 갖고 글을 쓰겠습니다. 



무엇보다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게 한 중요한 원인은 고구려 원정이었다. 수문제에 있었던 첫 원정을 포함 무려 3번에 걸쳐 진행된 고구려 원정 중 2차 원정이었던 수양제의 고구려의 원정은 무려 2백만명이 동원되었는데 이로 인해 국가적으로 엄청난 예산을 써야 했고 전쟁에 패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으며 전쟁의 후유증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수양제는 민심을 외면하고 자신의 향락만을 추구한다. 


수양제는 재위 12년 동안 장안에 거주한 기간은 1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 11년은 강도 유람을 다녔는데, 강도유람은 큰 비용이 들어간다. 더구나 고구려 원정의 패배로 큰 시련을 겪고 있던 시기에 떠난 그의 세 번째이며 마지막 강도 유람은 백성들은 물론 신료들도 참기 어려웠다. 결국 분노한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양현감의 반란을 기점으로 수나라 전국적으로 반란이 확대된다. 


이때 여러 군웅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중 양현감의 참모를 맡았던 이밀은 북주의 8주국(八柱國) 이필(李弼)의 손자로 양현감의 전사후 수나라의 거대 식량저장기지 낙구창(洛口倉)을 차지하며 많은 백성을 모아 큰 세력을 형성한다.

이런 이밀과 격렬하게 항쟁한 사람은 서역 출신의 수나라 장군 왕세충, 고구려 2차 원정군에서 탈주해 탈주병들을 모아 하북에서 세력을 키운 인물 두건덕 등이 등장하고, 수나라의 태원태수 당국공 이연(당고조)은 대흥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양제의 손자인 대왕 양유를 옹립하는데 수나라는 사실상 멸망의 길을 걷는다.


이런 보고에도 불구하고 양제는 술에 취해 듣지 않고 완전히 판단력을 잃고 만다. 그리고 수양제는 난징(남경)으로 피신하려 하는데 병사들은 고향을 떠나 남경으로 가는게 싫어 탈영을 하는 병사들이 줄을 이었고 결국 근위군들에게 살해당한다. 근위군들은 우문화급의 주도하에 진왕 양호를 옹립하고 북쪽으로 귀환하려했지만 도중에 두건덕의 군에게 패하고 한다.


한편, 수양제의 죽음을 들은 이연은 양유로부터 선양을 받아 618년 당나라를 건국하고 같은 시기 낙양에 있던 월왕 양동은 왕세충에 의해 황제가 되지만 619년 왕세충에게 찬탈되면서 수나라는 3대 38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여기서 수나라의 멸망의 시기는 양제의 죽음(618년)으로 볼 것인지, 공제 양유가 이연에게 선양할때로 볼 것인지, 공제 양동이 왕세충에게 선양한 619년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 견해 차이가 있는데 문헌으로는 618년, 당나라가 편찬한 정사 ‘수서 등에서는 공제 양유가 이연에게 선양 받은 시기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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