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도덕 군주 전한 문제 유항

올드코난 2015. 12. 2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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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후가 죽자 유씨들이 들고 일어난다. 결국 여씨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고 여태후의 후손은 대가 끊긴다. 여태후의 욕심에 결국은 유방의 다른 부인이었던 박씨의 후손들이 대대로 한나라의 황제가 된다. 여씨 시대를 종식하고 한나라를 안정시킨 도덕 군주이며 문경의 치(文景之治)의 시작이었던 한문제에 대해 정리해 본다.

전한시대 증흥기를 이끈 도덕 군주 전한 문제 유항


1.개요

한 태종 효문황제 유항(漢 太宗 孝文皇帝 劉恆,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57년 6월)은 전한의 제5대 황제(재위 : 기원전 180년 ~ 기원전 157년)로 한 고조 유방의 4남이며 혜제(惠帝)의 이복동생으로, 어머니는 효문태후 박씨(孝文太后 薄氏)다. 대(代)나라 왕이었으며,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형제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아들 경제와 함께 유교를 통치 철학으로 확립하고, 소모적인 대외원정을 피하는 한편, 경제를 안정시켜 문경의 치(文景之治)를 이룩한다.


2.황제가 된 이유

여씨들을 처형하고 허수아비 황제를 몰아낸 후 신료들은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기 위해 회의를 벌이고 대왕 유항과 제왕 유양 중에서 유항을 선택한다. 이유는 그의 어머니 박씨가 어질고 착한 장자의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여태후로 홍역을 치른 신료들은 외척을 걱정했기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3. 한 첫 명군 문제

황제가 된 문제는 안정과 검약을 실천하였다. 후세의 황제가 자신의 통치를 자랑하려 할 때, '나의 정치가 과연 한의 문제만 한가'라고 자문할 정도로 근검절약을 실천에 옮긴 현군이다. 특히 문제의 통치철학은 한 초에 유행하였던 황로학의 영향을 받아 무위자연사상이 정치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이리하여 진의 시황제(始皇帝)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인위적인 무리한 정치를 피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순리에 따라 정사를 펴나갔기 때문에 진시황제 이래 혹독하게 시달려 오던 백성들이 안정을 취할 수가 있었다.

특히 유교주의 정치가인 가의(賈誼)가 건의한 치안책(治安策)은 문제의 통치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경제정책면에서는 고조(高祖) 시대의 지조인 15분의 1세를 30분의 1로 감축하였고, 만년에는 토지세를 폐지하였다. 또한 백성의 요역을 경감하고 진 이래의 악법인 연좌제와 신체에 고문을 가하는 육형(肉刑)을 폐지하였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이를 통해 문제 시대에는 이전과는 다른 보다 민본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다.


문제의 통치는 중국 역대의 절대군주가 자신의 치적을 내세우기 위하여 대외원정이나 대토목 사업을 일으킨 것과 같은 인위적인 정치가 아니라 무위의 정치로 백성을 쉬게 한 안정화 정책이었다. 일례로 BC. 174년에 있었던 회남왕 유장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박사인 가의나 조조(鼂錯)는 중앙정부를 강화하고 지방세력을 약화시키는 강간약지정책(强幹弱枝政策)을 내세워 제후왕의 영지를 삭감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제후국과의 힘 겨루기로 이어져 애써 이룩한 민생의 안정을 흔들 것으로 판단하여 제후왕과의 대결을 피하고 종래의 군국제(郡國制)를 유지하였다.


문제의 뒤를 이은 경제(景帝) 역시 훌륭한 임금이 된 것도 바로 문제에게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문제ㆍ경제 재위 40년간(BC.180 - BC.141)의 안정화 정책으로 황폐한 농촌사회는 휴식을 취하면서 생산력을 증가시켜 국력이 회복되어 번영을 누리게 된다. 한문제가 있었기에 한제국 400년이 있었다는 말은 근거가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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