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문경지치의 완성 전한 경제 시대

올드코난 2015. 12. 23.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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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황제 문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경제 역시 훌륭한 임금이었다. 이 두 황제의 시기를 문경지치라고 부른다. 한 무제이 아버지이기도 한 경제에 대해 정리해 본다.

문경지치의 완성 전한 경제 시대


1.개요

한 효경황제 유계(漢 孝景皇帝 劉啓, 기원전 188년 ~ 기원전 141년)는 전한의 제6대 황제로, 문제(文帝)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효문황후(孝文皇后)이다. 외척세가(外戚世家)에 따르면 경제는 문제의 제5황자로 태어났는데, 형 네 사람이 모두 문제가 대나라 왕으로 있을 때에 일찍 사망하고 기원전 179년 아버지가 황제에 올라 생모 두씨가 무제의 정실로 승격되면서 문제의 적자(嫡子)가 되었다. 아버지 문제와 더불어 선정을 배풀어 「문경지치(文景之治)」라 불리는 성세를 닦았다. 한무제의 아버지이며 훗날 후한의 창시자인 광무제와 삼국 시대의 촉의 창시자 유비는 경제의 먼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2. 문제의 계승자.

기원전 157년 46세였던 문제가 재위 23년만에 죽고 장남 경제가 즉위를 한다. 경제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아버지 문제의 “백성에게 휴식을 제공한다”는 정치를 이어받아 소극적인 외교정책과 검약에 힘쓴다는 것이었다. 또한 중농 정책을 펼치고 세금을 줄이는 등 사회 안정을 실현시켰다.

경제는 유학을 배우면서도 한편으로 어머니 두씨로부터 도교를 배웠다.


3. 오초칠국의 난

황태자 시절 오왕(吳王) 비(濞)의 세자 현(賢)과 바둑을 두다가 자신이 지게 되자 한 수 물러달라고 했다가 세자가 거절하자, 홧김에 바둑판을 집어던져 그를 죽여버리고 말았다. 이 문제로 한과 오의 관계가 냉랭해졌는데 문제의 정치적 배려로 사태는 겨우 수습되었지만 이때의 앙금이 훗날 오초칠국의 난의 한 원인이 되었다.


경제가 즉위를 하던 유씨의 제후왕(諸侯王)이 그 영내의 징세와 관리 임명권 등을 장악하여 그들의 분국(分國)은 거의 반(半) 독립국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조정은 단지 제후국의 승상(丞相)만을 임명할 뿐이었다. 문제 때부터 그들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기 시작했지만 대응은 소극적인 데에 그쳤고 근본적인 대책은 미루어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아버지 문제의 방침을 이어받으면서도 분국 문제에 대해서만은 어사대부 조조(晁錯)의 헌책을 받아들여 제후왕의 권력을 줄이는데 착수했고, 제후왕의 사소한 과실을 이유로 그들의 영지를 몰수하는 등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이에 반발한 제후왕이 몰래 연계, 기원전 154년 오왕 비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을 오초칠국의 난이라고 부른다. 초기에는 반군이 우세했으나, 주아부(周亞夫)의 활약으로 반란은 진압되었다.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한 뒤부터 중앙 정부의 힘이 막강해지고 문경지치 시대의 안정기를 치며 뒤를 이은 한무제 시대에 한의 국력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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