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적장자가 아닌 유철(한무제)이 황제가 되었던 이유

올드코난 2015. 12. 25. 12:01
반응형

유철(劉徹)은 기원전 156년에 태어났는데 바로 그 해에 부친 한 경제(景帝)가 제위에 올랐다. 그가 출생하기 전 경제는 꿈에 한 마리 붉은 돼지가 구름 속에서 내려와 곧장 궁궐 내 숭방각(崇芳閣)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전한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경제가 점괘에 능한 요옹(姚翁)을 불러 이 일에 대해 묻자 요옹은 “이것은 아주 상서롭고 유리한 징조입니다. 숭방각에서 장차 나라의 운명을 주재할 사람이 태어날 것입니다. 그는 북방의 오랑캐들을 평정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여 유 씨 왕조가 가장 흥성한 시기의 영명한 군주가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한다.


경제에게는 부인으로 박황후가 있었는데 어찌된 것인지 적자를 낳지 못했다. 이에 두태후는 넌지시 경제의 동생인 양왕 유무를 다음 황제로 정할것을 권했으나 경제는 거절하였다. 박태황태후가 죽자, 경제는 태황태후의 조카였던 박황후를 황실을 번성치 못한 죄로 폐하였고 새로운 황후를 정하려고 했다. 본래 가장 유력하던건 귀여움을 많이 받던 후궁 율씨(栗氏)였는데 그는 장남 유영을 낳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황후가 된건 왕씨였다. 그리고 이 왕씨의 아들이 바로 무제 유철이었다.


왕씨의 이름은 '왕지(王娡)'로 그의 어머니는 고조 시기에 연왕으로 있다가 반란을 일으켜 죽은 장도의 손녀 장씨(이름은 장아)였다. 장씨는 왕중의 처가 되어 아들 왕신과 딸 왕지, 왕식구 자매를 낳았는데 왕중이 요절했다. 그래서 전씨에게 재가하여 전분과 전승 형제를 낳았다. 그의 딸 왕지가 김왕손의 부인이 되어 김속을 낳았는데 장씨는 점을 쳤더니 두 딸이 모두 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마침 황궁에서 후궁을 뽑았는데 장씨는 왕지(王娡)를 데리고 와서 그대로 입궁시켜 버렸다. 그리고 김왕손은 자신의 부인이 돌아오지 않자 처갓집으로 갔더니 입궁시켰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지만 결국 포기해야 했다. 장모가 뒤통수 결국 왕지는 당시 태자였던 유계의 후궁이 되어 아들 유철을 낳았다.


 나중에 유계가 경제로 즉위하자 장남 유영이 황태자가 되었다. 그런데 경제의 유일한 친누이이자 큰누나였던 관도장공주(유표)는 자신의 딸를 진아교를 유영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관도장공주는 남동생에 대한 영향력이 상당하였고, 당연히 권세는 막강해서 여러 후궁들이 경제를 만나려면 장공주의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유영의 어머니 율씨는 이를 거절했지만 왕지는 이를 허락하여 관도장공주에게 호의를 얻게 된다.

이에 관도장공주는 경제에게 매일 율씨를 참소하고 왕지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경제도 유철이 똑똑하다고 여겼고 상서로운 징조도 있어서 결국 유영을 태자에서 폐하여 임강왕으로 삼고 유철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에 율씨는 한스러워하다가 분사했다. 나중에 왕지의 친여동생 왕식구가 경제의 후궁으로 들어왔다.


당시 태자였던 유영의 생모 율희가 실수를 한 것은 장공주는 자신의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어 권력을 강화하려 하였고, 황태자 유영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 하였지만 율희가 이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는 경제에게 많은 후궁들을 보내던 장공주에 대한 반감과, 자신이 이미 황태자의 어머니이니 황후 자리는 결정된 것이라 자만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경제는 자신이 죽으면 율희에게 자신의 자식들을 잘 부탁한다고 하였을 때 도리어 황제에게 화를 내기도 해 경제는 율희에 대한 마음이 떠나 버린다.

이 기회를 이용한 왕 미인과 장공주에 의해 황태자 유영은 폐위당하게 되고 유철이 뒤를 잇게 된 것이다.


하지만, 유철이 황태자가 된 더 중요한 이유는 경제의 아들 중에서 가장 총명했기 때문이다.

유철이 3살 때 있었던 일이다. 경제가 그를 안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어린 아들에게 황제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유철은 “이런 일은 하늘에서 안배하시는 것으로 제가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소자는 매일 황궁에 머물면서 아바마마께 재롱을 부리고 싶습니다. 절대 함부로 하며 불경한 짓을 하거나 아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경제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경제는 유철의 교육에 대해 다른 황자(皇子)들보다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며칠 후 경제는 다시 유철을 불러 책상 앞에 안고는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자세히 물어보았다. 그러자 유철은 복희(伏羲)씨 이후 여러 성현(聖賢)들의 저작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국책(國策)을 논한 역대의 저명한 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수만 자에 달하는 문장을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외울 수 있었다


태평어람’ 「한무제고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성(城)안 백성 중에 후처(後妻)가 남편을 죽이자 전처(前妻)의 아들이 계모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인륜 중에서 특히 효(孝)를 가장 중시했던 당시 상황에서 자식이 부모를 죽인 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에 해당했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른 아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계모가 부친의 원수에 해당하는 까닭에 정상을 참작할 여지가 있었다. 어쨌든 계모를 죽인 아들이 ‘모친 살해죄’(殺母罪)로 기소되어 황제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부황(父皇) 옆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황태자 유철이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지아비에게 충실하지 않은 부인은 더 이상 지아비의 아내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아들의 어머니라 할 수 없기 때문에 모친 살해죄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남다른 비범함과 총명함이 있었기 때문에 유철은 겨우 일곱살 때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황태자로 간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