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백성을 이해했던 현실적이고 법가적인 황제, 전한 선제 평가

올드코난 2015. 12. 25.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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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가 21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당시 권력을 장악한 곽광은 한무제의 아들 광릉왕 유서 대신 무제의 서손자이자 창읍애왕 유박(劉髆)의 아들 창읍왕 유하(昌邑王 劉賀)를 선택한다. 전한의 제9대 황제 한 폐제(漢廢帝)였다. 하지만, 황위에 오르자 마자 폭국처럼 행동을 하고 결국 27일 만에 곽광(霍光)에 의해 폐위되고 작위를 강등당하여 해혼후(海昏侯)가 되었다. 사마광은 그가 소제(昭帝)의 빈소에 가면서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길위에서 고기 반찬을 먹으니, 곽광(霍光)이 그 죄를 묻고 폐했다고 주장하였다. (소학의 외편에 고사로 인용되었다.) 폐제의 뒤를 이어 전한의 10대 황제에 오른 이가 바로 선제였다. 전한시대 현군으로 꼽히는 선제에 대해 정리해 본다.

백성을 이해했던 현실적이고 법가적인 황제, 전한 선제 평가


1.가계

한 중종 효선황제 유순(漢 中宗 孝宣皇帝 劉詢, 기원전 91년 ~ 기원전 49년) 전한의 제 10대 황제(재위 : 기원전 73년 ~ 기원전 49년)로, 자는 차경(次卿). 본래 휘는 병이(病已)였으나, 피휘의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즉위할 때 순(詢)으로 바꾸었다.

전한 무제의 증손자로 여태자 유거(戾太子 劉據)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여태자의 아들인 사황손(史皇孫) 유진(劉進)이다. 어머니는 왕씨(王氏)이다.


2. 성장과정

기원전 91년 무고의 옥에 의해, 증조모 황후 위자부(衛子夫), 조부 유거, 조모 사씨(史氏), 아버지 유진, 어머니 왕씨, 형과 누나가 처형되었다. 갓난 아이인 유병(劉病)은 투옥되었지만 병길(丙吉)에 의해 양육되어 은사에 의해 석방되어 민간에서 자랐다. 액정령(掖廷令)의 장하(張賀, 장안세(張安世)의 형)가 유병의 후견인이 되어, 장안세의 아들 장팽조(張彭祖)와 학우가 되어, 장안 교외의 상관리에 주거하였다.


3.즉위

기원전 74년 소제(昭帝)가 붕어하자, 창읍왕 유하(昌邑王 劉賀)가 즉위하지만 품행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폐위되어, 곽광 등의 추천에 의해 상관황태후(上官皇太后)의 조를 받아, 양무후(陽武侯)에 봉작되었고 얼마후 즉위하였다.

소제의 사망으로부터 창읍왕의 폐위를 거쳐 선제의 즉위에 이르는 일련의 움직임은 곽광이 주도한 것이어서, 정권은 계속되어 대사마 대장군 곽광이 권력을 차지하였다.


4. 친정의 시작

즉위 초에는 곽광과 곽씨들이 실권을 갖고 있었고, 민간에서 자랐기에 정치 경험도 없던 선제는 곽광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선제의 부인인 허황후가 독살을 당하는데, 곽광의 아내가 배후였다. 그리고 곽광의 막내딸 성군이 황후로 세워지는데 선제는 겉으로는 참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복수심을 키웠다는 점은 충분히 짐작된다.

기원전 69년 곽광이 사망하자, 선제는 곽씨 일족의 권력을, 특히 군사의 지휘권을 서서히 박탈하여, 외척인 허씨(許氏) 등의 자제에게 주었다. 이것에 반발한 곽광의 유아가 반란을 계획하였고, 그것을 이유로 곽씨 일족은 처형되었다. 이 외, 반란 성공 후에 제위를 찬탈할 예정인 대사마 곽우(霍禹)는 요참형에 처했고, 황후 곽씨(곽광의 딸)도 폐위하여 유폐하였고, 곽광의 죽음으로부터 2년 후에 친정을 개시하였다.


5. 현명한 군주

선제는 18살에 즉위해 43살에 죽을때까지 25년간 제위를 했는데, 이시기의 한나라는 매우 평화로웠다. 무제가 국력을 낭비해 흔들거렸던 한 제국을 안정시킨 인물이 선제였던 것이다. 선제가 친정을 한 시기는 제위 6년이 되는 시점인데, 곽광이 죽은 후 2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이 기간동안 선제는 정치적인 역량을 길렀고, 실천할 의지 또한 갖추게 된다.

선제는 법가 주의적 정치 신조에 준거하여, 감세나 상평창을 설치하고, 국민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중앙과 지방에서 행정을 개혁하고, 범죄 예방을 위해 형벌을 강화하고, 국민의 경제력을 휴양하면서 중앙정부의 권력 강화를 도모하는 내정 중시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무제 이후의 국내의 피폐한 경제를 완화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외교면에서는 오손과 제휴해 서역에 진출, 흉노를 약체화, 분열화해, 기원전 51년에는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를 항복시키는 등, 약체화되고 있던 한왕조의 국력을 부흥시키는 것에 노력했다. 이 외에 내외 정치에 있어서의 성과로부터, 선제는 한나라 중흥의 선조라고 하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중서(中書)를 통한 직접적인 통치는 중서의 역할에 해당한 환관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원인이 되어, 원제의 시대에 환관과 외척이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된다.


6. 백성을 이해한 황제

선제는 어려서부터 백성의 고통과 애환을 직접 보고 자랐기에 실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한시대 가장 백성을 이해했고 백성을 위해 살다간 황제였다. 선제는 패도와 왕도를 섞어서 펴야만 한다는 현실론자였고 당시 이론에만 집착하던 유교를 싫어했다. 또 선제는 법을 엄격히 했는데 이는 무제와 소제의 시기를 거치면서 치안이 흐트러졌고 변경의 방어 체계도 약화되었고 관료들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제의 법치주의는 백성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질서유지와 공직기강 확립을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제의 법가주의적 통치방식은 무제 시대부터 비롯된 사회 혼란을 줄이고, 백성들에게 휴식을 제공해 주게 된다.


7. 최후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이상주의, 회고주의인 유교를 싫어하여, 유교에 심취하는 황태자(후의 원제)와는 뜻이 맞지 못하고 폐위도 생각했지만, 원제에게 후손이 태어난 것을 이유로 폐위을 보류했다.

그 자신이 할아버지 여태자 유거를 무제가 폐하고 유거의 반란이 실패하면서 유거의 친족이 모두 죽고 당시 테어난 자신만 살아남아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는데 그러한 패륜은 한번이면 족하므로 조서에서 이러한 이유로 조상과 같은 전철을 밟지않겠노라고 공언하고 유후의 태자 자리를 보전해준다. 사망 후 두릉(杜陵)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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