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한무성세(漢武盛世)의 시대

올드코난 2015. 12. 25.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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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가 즉위할 무렵 한나라는 이미 개국한 지 70년이 지났다. 천하는 이미 태평해졌고 식량과 물자도 풍족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들이 남아 있었다. 안으로는 각 지방 제후들의 저항을 누르고 중앙집권을 강화해 황실의 안녕을 보장하는 문제가 있었고, 밖으로는 국경을 위협하는 흉노의 문제를 해결하고 잃어버린 진(秦)나라 때의 옛 영토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두태후의 죽음으로 황제로서의 진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 무제는 본격적인 성과를 거두며 전한 시대의 전성기를 열게 된다.


우선 할머니 두태후가 죽자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최초의 유교식 학교인 명당(明堂)과 태학(太學)을 건립하는 등 자신의 뜻을 거침없이 실행에 옮기고 두태후의 일족을 숙청해버렸다. 전대의 권신들과 외척들을 숙청, 면직시키고 실력과 능력으로 어질고 겸손한 인재를 채용해 관료의 자질을 향상시켰다. 그리고 이복 형제와 귀족을 제거해 황제권을 강화시켜나가는데 경제의 서자이자 무제의 이복형이었던 중산정왕 유승은 일부러 주색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여 한무제의 칼날을 피해갔다. 이제 한무제에게 걸림돌은 거의 사라지고 한무제는 거침없이 정력적으로 내정과 정벌 사업을 벌이게 된다.


운하를 굴착해 농지의 관개와 운송을 도우고 대외적으로는 장건(張騫)을 대월지국(大月氏國)으로 파견하고, 장군 위청, 곽거병, 이광(李廣) 등에게 흉노를 토벌시켜 흉노족 선우를 사살하고 다수 흉노족을 포로로 잡아왔다. 기원전 119년에는 위청을 시켜 흉노를 외(外)몽골로 내쫓고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여 2군을 두었다. 하서(河西)에 있던 흉노 혼야왕(渾邪王)도 항복했으므로, 그 곳에 무위·장액·주천·돈황 4군(하서사군)을 두어 중앙아시아와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서역 제국의 입공(入貢)이 계속되었으나, 기원전 104년에는 이광리(李廣利)에게 명해 파미르 고원 북서에 있는 대완국(大宛國:페르가나)을 정벌하게 했다. 흉노의 방위와 서역 유지를 위해 요지로 한인을 이주시키고, 또 둔전(屯田)을 두었다.


남방으로는 푸젠성[福建省]에 있던 민월과 동월(東越) 두 왕국을 병탄·흡수하고, 기원전 111년에는 번우(番:廣東)에 도읍한 남월국을 멸망시켜 9군을 두고, 쓰촨성[四川省] 변경에서 윈난[雲南]·구이저우[貴州] 방면에 이르는 염(冉)·방(駹)·수(嶲)·작(莋)·야랑(夜郞)·전(滇) 등의 종족을 귀순시켜, 그곳에 6군을 두었다.


기원전 112년부터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진국(辰國)과의 직접 교역을 반대하고 한나라에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는 고조선으로의 침략을 단행한다. 무제는 여러 차례 육로와 해로로 육군과 수군 군사를 파견하였으나 모두 패하였다. 그러나 고조선은 내부의 분열이 생기고 무제는 그 틈을 노려 기원전 108년 왕검성을 함락시키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자리에 낙랑·임둔·진번·현도의 한사군을 설치한다.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한 무제는 재정이 궁핍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소금과 철과 황, 술의 전매제를 시행하여 경제적 재력 확충을 시도하였다. 토지분배 정책에서는 둔전제를 강력히 시행·추진하였고, 둔전제의 일부를 개정하여 정복한 북방지역에 주민의 이주를 적극 장려하면서 북방으로 이주한 백성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한다. (대전법 代田法)


상홍양은 증세·신세(新稅)에다 소금[鹽]·철(鐵)을 전매하고 균수법(均輸法)·평준법(平準法)을 제정하였다. 균수는 관청에서 상업활동을 하는 것이고 평준은 물가를 조절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정책을 통해 부유한 상인의 매점매석을 근절해서 물가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무제의 지나친 업적 만들기와 대규모 공사 등으로 한나라의 위기가 있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궁전과 이궁을 짓고, 불로장생을 믿어 방사(方士)를 모아, 태산(泰山)에서 봉선의식(封禪儀式)을 치르고 각지를 순행했으므로 백성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고 군사비를 압박했다. 무공작(武功爵)을 팔기도 하여, 관리의 부정이 심해지고, 국민의 생활도 궁핍해져 각종 반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들 뒤늦게 깨달은 무제는 만년에는 외정을 중지하고, 내치에 치중해 세금감면 정책을 추진 다시 먼 거리에 있는 윤대(輪臺: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둔전(屯田)을 폐지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힘썼다.


무제 때의 특색은 중앙집권화와, 밖으로 지역이 확대되고, 특히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교섭이 왕성하게 되는 기틀을 열어놓았다. 권신이나 외척을 배제하고 실력에 따른 인재등용을 하였다. 출신 배경이 한미한 관료들을 등용했고, 흉노족 원정시 포로로 잡혀온 김일제 등 이민족 포로 중에서도 능력이 되는 인재를 채용하였다. 54년가 재위에 있던 무제는 곽광(霍光)과 김일제를 불러 아들(전한 소제)의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을 유언하고 71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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