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황위를 찬탈한 신(新)나라 황제 왕망(王莽)의 생애와 평가

올드코난 2015. 12. 26.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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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시대를 끝낸이는 외척 왕망이었다. 불후한 어린 시절을 보낸 왕망은 황제에 대한 야욕을 숨기며 유능하고 청렴한 신료로 포장하며 인심을 얻고 권력을 잡고 결국에는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된다. 신나라는 짦은 시기에 멸명을 했기에 왕망과 신나라는 같이 묶어서 정리해 본다.

전한을 멸망시키고 황위를 찬탈한 신(新)나라 황제 왕망(王莽)의 생애와 평가


1.왕망 개요

왕망(王莽, 기원전 45년 ~ 기원후 25년 10월 6일)은 위군(魏郡) 원성현(元城縣) 사람으로 자는 거군(巨君) 이다. 신(新)나라 황제로, 황제 즉위 전의 전한시대 작위는 안한공(安漢公)이며, 원제(元帝)의 황후 왕정군(王政君, 효원황후)의 조카로 성제(成帝)의 어머니쪽 사촌형제에 해당한다. 왕만(王曼)의 차남으로 왕우(王宇) · 왕획(王獲) · 왕안(王安) · 왕림(王臨) · 왕흥(王興) · 왕광(王匡) 등의 아들을 두었다. 손자(왕우의 아들)는 왕종(王宗)이며, 딸은 평제(平帝)의 황후가 된 왕씨와 함께 왕화(王曄), 왕첩(王捷) 등이 있었다. 본부인은 한의 승상(丞相)을 지낸 왕소(王訢)의 손자 의춘후(宜春侯) 왕함(王咸)의 딸이며, 왕영(王永)의 동생으로서 왕광(王光)의 숙부이다.


2. 어린 시절

황후의 자리에 오른 백모 왕정군에 의해 백부들이 제후에 봉해지고, 고위 관리로서 유복한 생활을 보내던 중 아버지 왕만과 형 왕영(王永)이 일찍 사망하여 왕망은 불우하게 자랐다. 왕망은 공손하고 검소함을 가지고, 패군(沛郡)의 진삼(陳參)을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고, 유생의 복장을 입고, 어머니와 형수를 시중들었다. 또 조카의 왕광(王光)을 양자를 삼아 친자식 이상으로 양육하여(뒤에 살해), 왕망의 아내가 불평을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때부터 왕망은 대중들을 속이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었다고 보여진다.


3. 외척과 권세

백부 대장군 왕봉(王鳳)이 병이 들자, 간병을 하였고, 왕봉의 인정을 받게 되고 왕봉이 죽은 후 왕상(王商)과 왕근(王根)의 추천과 백모인 황태후의 후원으로 왕망은 순조롭게 출세한다. 친척 순우장(淳于長)을 실각시켜, 대사마(大司馬)가 되면서, 왕망의 권세는 막강해진다. 애제(哀帝)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하여 잠시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정계 복귀의 탄원이 계속 올라오자 다시 복귀를 한다.

기원전 1년 한애제가 급사하고, 한 평제(漢平帝)가 즉위하고 왕정군은 이를 기회로 태황태후의 지위를 이용해 한애제의 외척 및 측근 세력을 배제하여, 조카 왕망을 대사마에 임명하였다. 그 무렵 왕망은 찬탈의 의도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눈치 챈 왕정군은 왕망의 제후 임명에 반대를 하는 입장을 취했다. 한 평제가 독살되고 유영(劉嬰)이 황제로 옹립 되자, 왕망이 주나라의 성왕 (成王)과 주공 단(周公旦)의 고사에 모방하여 가황제(假皇帝)를 자칭하였다. 왕망은 왕정군에게 전국옥새를 자신에게 인도하도록 요구했을 때, 다툼이 벌어져 옥새는 훼손되었다.

영시 원년(기원전 16년),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다. 애제가 붕어하자 애제로부터 황제의 옥새를 맡고 있던 대사마 동현(董賢)으로부터 옥새를 강탈하여, 중산왕 간(衎)을 옹립하고(평제) 대사마가 되었다. 이어 고문경학의 대가였던 유흠(劉歆)을 비롯한 유학자들을 많이 끌어들여 유학과 서상(瑞祥), 부명(符命, 일종의 예언서)에 근거한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민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차남 왕획(王獲)을 잡아 노복(奴僕)을 죽인 죄를 묻는가 하면 장남 우(宇)의 모략죄를 물어 감옥에 가두었다가 모두 자결하게 했다. 딸을 평제의 황후로 책봉하고, 재형(宰衡), 안한공(安漢公)이 된 후, 5년에 14살이 된 평제가 사망하고(왕망에 의한 독살), 광척후(廣戚侯) 현(顯)의 아들 영(嬰: 유자)을 황태자로 세우고 스스로는 가황제(假皇帝) · 섭황제(攝皇帝)로서 섭정한다.


4.황위찬탈과 신의 건국

왕망은 제위 계승을 정당화하려 하는데 마침 애장(哀章)이라는 인물이 고조(高祖)의 예언이라며 금궤도(金匱圖)와 금책서(金策書)를 위조해 바쳤는데, 이를 전거로 거섭 3년(8년), 왕망은 고조의 영혼에게 선양을 받았다고 하여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신 왕조를 열었다. 이 사건은 역사상 최초의 선양이지만 실상은 찬탈과 다름이 없다. 태황태후로서 전국새(全國璽)를 맡고 있던 효원황태후 왕정군은 사자로서 옥새를 받으러 온 왕망의 사촌형제 순(舜)에게 왕망에 대한 욕설을 퍼붓고, 순이 옥새를 내어줄 것을 재촉하자 옥새를 내던지며 "너희 일족은 모두 멸망할 것이다"라 저주했다고 사서는 전한다.


5.이상주의자의 허상

주 시대의 치세를 이상으로 삼은 왕망은 주관(周官)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국가 정책을 실시하지만 현실성이 결여된 각종 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화폐 유통과 경제 활동도 정지되어 민중의 상활은 한조 말기 이상으로 곤궁해졌다. 외교적으로도 마찰이 심해졌는데 고구려왕의 칭호를 중화사상에 근거하는 모멸적인 명칭인 하구려후(下句麗侯)로 부르게 해 고구려와 충돌을 하게된다. 다른 이민족들의 관계 또한 악화되어 이를 토벌하고자 했지만 실패한다. 또한 전매제 강화도 실패하여 신의 재정은 빈곤해졌다. 신라라 시기는 전한 말기 이상의 고통을 백성들에게 안겨준 시대였다.


6.왕망의 최후와 신의 멸망

배고픔과 차별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결국 왕망의 신나라에 맞서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18년에 적미의 난이 일어났고, 남양군(南陽郡)에서 옹립된 유현(劉玄)을 토벌하러 보낸 신의 100만 군대도 곤양(昆陽)전투에서 경시제 휘하의 유수(劉秀)에게 패배하하고 전국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며 신라라는 대혼란에 빠진다. 그의 신하도 배신하고, 장안에는 경시제의 군대가 입성, 왕망은 그 혼란 중에서 두오(杜吳)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수급은 경시제가 있던 성으로 보내졌으며, 몸은 공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마구 찢어지고 흩어졌다고 한다. 왕망의 죽음으로 신은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7.왕망에 대한 평가

(1) 중국

중국 역사상 최초의 '찬탈'을 저지른 인물로 왕망은 중국 역대 황조에서 정치면에서뿐 아니라 인간성까지 포함해 비판적인 평가를 많이 받는다. 왕망은 외모나 대인관계에 특히 집착을 보여, 의식 때에는 수염이나 머리를 검게 물들여 좀 더 젊게 보이려 한 반면, 부명이나 서상 같은 신비주의적인 도참설을 이용해 자신의 등용과 즉위를 정당화시키려 했고, 그때에도 자신이 주위의 추천에 못 이겨 마지못해 받는 시늉을 하는 등 간계와 지모에도 능했다고 한다.

명대의 오승은(吳承恩)은 《서유기(西遊記)》에서 손오공(孫悟空)이 날뛰던 시기(오행산에 갇힐 때까지)를 왕망 시대로 정했는데, 이것은 「폭군 · 왕위 찬탈자 · 거짓 천자가 황위에 있으면 천재지변이 일어난다」는 전승을 왕망의 찬탈과 겹쳐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2) 한국

고려의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에게 보낸 답서에서 「기회를 엿보아 한(漢)을 도모하였으니 왕망·동탁(董卓)의 간계(姦計)만 보일 뿐이었다」고 하여, 견훤이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 쳐들어가 약탈을 저지르고 경애왕을 죽게 한 행동을 한 조정을 어지럽히고 애제를 독살한 왕망의 전적에 빗대어 비난하고 있고 《중종실록》에도 조광조의 정책에 반대하는 훈구파들이 「주초(走肖)의 무리가 저지른 간사함이 왕망이나 동탁 같아 온 나라의 인심을 얻고 백료들이 우러러보는 바가 되었다.」며 조광조를 왕망에 빗대고 있다.

(3)일본

일본에서도 《도지가전(藤氏家傳)》 대직관전(大織冠傳)에서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의 정치를 「안한의 궤휼(安漢の詭譎)」이라 비판하였으며,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도 조고(趙高) · 안록산(安祿山) 등과 함께 조정을 어지럽힌 조적(朝敵)으로서 왕망의 이름을 거론하였으며, 기소 요시나카(木曾義仲)의 난폭한 행동을 왕망에 비유하기도 하는 등 간신의 대표격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4) 근대

반면 한국의 사학자 신채호는 왕조 교체가 빈번했던 중국의 역사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왕조가 이전 왕조를 대신할 때마다 일시적으로 요역을 면제하고 부세를 감해주는 고식적인 시혜를 베푸는 척하다가 다시 옛 왕조의 규정을 되살려서 폭(暴)으로 폭을 대신하는 무의식한 내란만 되풀이되었을 뿐 진정한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왕망만은 고대 사회주의적인 정전법(井田法)을 실행하고 한문화(漢文化)로 세계를 통일한다는 일종의 공산주의적 국가의 건설을 시도하여 토지를 평균하게 나누어 빈부의 계급을 없애자는 생각을 대담하게 실행하려고 했다며 왕망의 찬탈을 「동양 고대의 유일한 혁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신채호 선생의 평가는 왕망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중국의 역대 창업 황제들의 내건 혁명을 비꼰 측면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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