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시제 유현의 무능함에 많은 이들이 반발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전한과 신나라의 멸망후 여전히 혼란은 수습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시기 유수(광무제)는 많은 제장들과 민심을 얻어 드디어 천자에 오른다.
이때가 서기 25년 6월로 호남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연호를 건무(建武)로 고치고 낙양을 수도로 정했다. 건무 2년에 고조묘를 세워 자신의 창업이 한나라를 계승했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광무제는 장안의 경시제와 적미군 등과의 일전을 치르게 된다.
이 시기 적미군은 한고조의 손자 유장(성양경왕)을 신으로 숭앙하고 있었는데, 유장의 후손 중인 유분자를 천자로 옹립한다. 유분자는 당시 15세였고, 황족임에도 불우해 글조차 배우지 못한 무식한 인물이었다. 이 외에도 반란군과 군벌들이 난립해 매우 어지러운 상황에서 백성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었는데, 광무제 유수는 이때부터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시작해 천하의 민심은 광무제를 향하게 된다.
이런 때 적미군은 장안을 공격하고 경시제는 투앙해 황제에서 ‘장사왕’으로 봉해진다. 문제는 적미군 역시 통치 능력이 없었다는데에 있다. 장안은 갈수록 황폐해지고, 식략도 다 떨어지고 경시제는 사록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등 최악의 상황에서 적미군은 장안을 버리고 나갔다 농의 외효 군대에 패해 다시 장안으로 돌아왔지만, 먹을 것이 없었다. 결국 다시 동쪽으로 행했는데, 이들이 광무제 유수와 마주치자 싸움 대신 항복을 선택한다. 이들 적미군을 이끌었던 당시 황제 유분자와 승상 서선에 광무제는 전답을 하사하는 등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이때가 건무 3년으로 아직 통일까지는 시간이 더 소요가 되는데 진정왕 유양을 모반죄로 처형하고, 적미군의 번숭과 봉안도 모반죄로 주살하는데 이는 이들이 황권을 위협할 수 있는 인물들로 여겨진다.
건무 9년 서기 32년 농(감숙성)의 외효를 공략 하던중 외효가 병사하고 다음해 외효의 아들 외순이 항복해 농은 평정된다. 이후 촉의 공손술 마저 주살하면서 난을 평정 신나라 멸망후 중국을 다시 재 통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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