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후한 시대(동한) 혼란 상태를 정상으로 돌린 광무제 유수의 선정

올드코난 2016. 6. 20.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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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가 건국한 후한은 고조 유방이 세운 전한 시대의 연장선에 있다. 유방의 후손인 광무제는 이를 분명히 해 후한 창업을 한왕조 부흥(한의 재건)임을 분명히 했다.


우선 광무제는 낙양을 첫 도읍으로 정하고, 장안을 함락시킨 뒤에도 황폐한 장안으로 천도하는 대신 낙양을 그대로 도성으로 유지했다. 낙양이 장안의 동쪽에 있기때문에 전한을 서한, 후한을 동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왕조를 화덕(火德)이라 여겼던 광무제는 낙양의 「낙(洛)」에 들어간 수(水)자 변을 싫어해서 낙양의 이름을 낙양(雒陽)으로 바꾸었다.


무엇보다 광무제 유수의 훌륭한 점은 백성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황제였다는 점이다.

전한 말과 왕망의 신나라를 거치며 중국 전역이 피폐해져 전한 전성기에는 약 6천만 명에 달하던 인구가 광무제 시대에는 2천만 명 정도로 감소해 있었다. 광무제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노비 해방 및 대사면령을 몇 차례에 걸쳐 실시하고 자유민을 늘려 농촌 생산력 향상과 민심 확보에 힘썼다. 징병제를 폐지하고, 평소에는 농업 생산에 종사시키다가 유사시에 군사로 동원하는 둔전병(屯田兵)을 운용해, 생산과 수요의 균형이 무너짐으로서 발생한 기근이나 변경으로의 식량 수송 문제를 완화시켰다.


건무 7년(31년)에는 매인법(売人法), 13년(37년)에는 약인법(略人法)을 공포하여 인신매매를 규제하였고 건무 11년(35년)에는 하늘과 땅의 존재 중에 인간이 가장 귀하다(天地之性、人爲貴)는 문구로 시작하는 조(詔)를 내려, 노비와 양민의 형법상 평등을 선언하였다. 조세에 대해서는 여지껏 왕조의 군사 재정 부족을 이유로 수확량의 1/10을 거두던 것을 건무 6년(30년)에 전한의 제도와 같은 1/30로 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준다.


징병된 병사들을 귀농시켰고, 건무 15년(39년)에는 경지 면적과 호적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를 시행하여 인민 통치의 기초를 다지고 국가 재정을 확립했다. 신의 왕망이 혼란시킨 화폐 제도는 건무 16년(40년)에 전한 무제 이후의 오수전(五銖錢) 주조가 시작되어 화폐 제도도 정비되었다.


그리고 전한의 창업자 유방 보다 광무제 유수에 대해 더 좋은 평가를 받는 점 중에 하나는 창업 공신들에 대한 적절한 배려에 있다.

흔히 토사구팽이라하여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거나, 반대로 공신들을 지나치게 우대해 왕권이 약화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악순환이 있고하는 하는데 광문제 유수는 공신들을 죽이지 않았다. 공에 따라 토지와 식읍을 하사하는 큰 상을 내려 자신의 봉지로 내려가 편한 여생을 살도록 배려를 해주었고 대신 조정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해주었다. 공신도 살리고 왕권도 강화시킨 매우 적절한 조치로 광무제 유수의 이런 현명한 정책은 공신들을 희생시키지도 않은 현명한 황제라는 평가를 받게 해주었다. 


애민정신과 군왕의 자실에 성실함까지 매우 보기 드문 훌륭한 황제 광무제의 치적으로 후한 초기 내부 혼란도 없었고, 사회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을 하게 된다.


간혹 역사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이는 전한 시대 한무제를 더 높이 평가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한 멸망의 시작은 한무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만심과 과시욕이 강했던 한무제의 겉으로 강한 제국주의는 전한 시대의 전성기를 일찍 끝나게 만들었다. 반면 후한 광무제 유수는 후한을 창업한 정도를 넘어 백성들을 진심으로 보살피려 한 성군이었다는 점에서 한무제 보다는 광무제 유수가 더 훌륭한 황제라고 할 것이다. (차후 광무제에 대해 더 자세히 정리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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