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외척과 환관의 득세, 후한 멸망의 시작 후한 4대황제 화제 (효화황제 유조) 시대

올드코난 2016. 6. 27.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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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제4대 황제 한 효화황제 유조(漢 孝和皇帝 劉肇, 79년 ~ 106년, 재위 88년 ~ 106년) 3대 황제 장제(章帝)의 아들로 본래 묘호로 목종(穆宗)이 올려졌었으나, 초평(初平) 원년(190) 좌중랑장(左中郞將) 채옹(蔡邕)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따라소 공식 묘호는 없다.


화제는 장제(章帝)의 서자로 넷째아들이다. 어머니는 귀인 양씨(貴人梁氏). 생모인 양귀인(梁貴人)은 궁정내의 다툼속에서 장제의 황후 두씨(竇氏)에게 살해당했다. 폐위된 이복형 청하효왕(유경)을 대신해 태자가 되고 88년 9살로 즉위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를 해 결국 황태후가 된 두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하며 황태후의 오빠 두헌(竇憲)이 외척으로 정권을 장악하는데, 두헌은 흉노토벌에서도 전공을 세우게 되어 대장군이 되었다. 두태후의 지나친 권력 욕심에 두씨 일가는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화제도 나이가 먹어가면서 이에 반감을 품게 되었고, 실권을 자신에게 되돌리길 바랐다. 이는 두헌 측에게도 알려져, 두헌은 화제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화제도 그 움직임을 알아채고, 두씨를 토벌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화제가 모신으로 선택한 이가 환관 정중(鄭衆)이었다. 정중을 선택한 이유는 환관이기에 비밀리에 모의를 할 수 있고 환관 정중은 뛰어난 인물이며 눈썰미도 있었고, 두뇌가 명석해 행동력도 있었다. 


92년 두헌을 궁정내에 불러들여 대장군의 인수(印綬)을 되찾고 실권을 빼앗은 뒤, 영지에 보내 자살을 명했다. 이로 인해 두씨일족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실권을 되돌리게 되었다. 정중은 공적이 커서 단향후(鄲郷侯)에 봉해지고, 대장추(大長秋)의 직책을 받았다. 


그후에도 정중을 신임해 화제의 정치는 측근정치의 색을 띠었고 이것이 후한에서 환관의 횡포의 효시가 되었다. 문제는 화제 이후 계속해서 어린 황제가 계속해서 황제가 되면서 외척세력과 환관세력간의 격렬한 다툼이 계속되게 된다. 후세에 후한은 화제의 시대부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라고 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외정면에서는 후한의 시대에서 가장 활발한 시대여서 서역의 50여개국이 후한에게 복종했다. 이러한 성공은 반초(班超)의 역량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가 커서, 반초의 사후 서역에서 후한의 영향력은 일거에 약해졌다. 이 시대 반고(班固), 반소(班昭)에 의해 『한서』(漢書)가 편찬(92년)되고 채륜(蔡倫)에 의해 지법이 개량(105년)된다.


[참고]

채륜(蔡倫, 50년? ~ 121년?) 중국 후한시기 환관이자 종이 발명가. 자는 경중(敬仲). 후난성 계양현(桂陽縣) 출생. 명제 때부터 환관으로 조정에 들어간 후 화제(和帝) 때 궁중의 공방 장관인 상방령에 취임해 궁중의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었다. 또한 나무껍질, 삼베 조각, 헌 헝겊, 낡은 그물 따위를 사용하여 종이를 만들고, 105년에 이것을 황제에게 바쳐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이 종이를 '채후지(蔡厚紙)'라고 했다. 이것이 식물 섬유를 사용해서 만든 종이의 기원이며, 후세의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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