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는 여러 아들을 두었으나 대부분이 요절했다. 외척 등의 모살을 의심했던 화제는 아들들을 민간에 위탁하여 양육한다. 화제의 사후, 태후 등씨는 맏아들 유승이 지병이 있음을 이유로 삼아 당시 백일이 갓 지난 상제를 즉위시켰다. 실권은 등태후를 비롯한 외척들이 쥐게 되는데 즉위한 이듬해 상제는 병으로 죽어 요절해 상(殤)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이다.
상제가 죽자 실권을 쥐고 있던 등태후는 청하왕 유경의 아들 유고를 황제로 옹립하는데 이가 바로 후한 6대 황제 한 효안황제 유호(漢 孝安皇帝 劉祜, 94년 ~ 125년, 재위 106년 ~ 125년)다. 장제(章帝)의 손자로 본래 묘호로 공종(恭宗)이 올려졌지만 초평(初平) 원년(190) 좌중랑장(左中郞將) 채옹(蔡邕)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안제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를 하게 되고 실권은 당연히 등태후를 비롯한 등씨 일가들이 갖게 된다. 등태후의 오빠 등즐(鄧騭)은 대장군에 올라 병권을 장악한다.
이때, 안제의 즉위에 대해 주장이 불만을 일으키는데, 화제의 장자 유승이 살아 있고, 당연히 그가 황제가 되어야 하는데, 등태후가 상제를 황제로 즉위를 시켰고, 죽은 후 다시 안제를 즉위시키자 이에 불만을 품었던 것이다. 당시 환관의 우두머리인 정중과 채륜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사전에 발각되고 주장은 자살하고 만다.
안제는 18년간 재위했는데 14년간 등태후가 실권을 쥐고 있었다. 등 태후가 죽자 안제는 환관과 연합해 등씨 일가를 축출,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후 환관이 득세하자 나라가 혼란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등태후가 실권을 잡아 권력을 장악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키려는 자세를 보였다. 등태후는 등씨 일족을 중용하면서도 요직을 완전히 독점하지는 않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했다는 것을 놓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해서 후한의 위기를 막지는 못했지만.
대표적으로 이 시기 양진이라는 명신이 있었다.
양진은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관서공자(關西孔子)라 불리었고 형주자사, 탁군태수, 사도, 태위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가 태위로 있을때 안제의 유모인 왕성(王聖) 및 중상시 번풍(樊豊)등의 세력이 강하여 조정의 부패가 만연하였으므로 양진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간절이 간언하지만, 번풍의 모함으로 파면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다.
이런 양진에게 왕밀이라는 사람이 황금으로 뇌물을 주려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하는 일화가 후한서, 자치통감 등에 전해져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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