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초(班超, 32년 - 102년)는 서안 근처 샨시성 함양(咸陽)출신으로 역사가 반표(班彪)의 아들이며 한서(漢書)의 저자 반고(班固)의 아우로 이 세 사람을 삼반(三班)이라 칭한다. 자는 중승(仲升)이다.
광무제의 통치 기간 기마부대를 이끌고 흉노를 격퇴하고 서역(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해 전한의 장건의 활약 이후 끊겼던 실크로드를 다시 개척하여 후한과 서역의 교역길을 열었다. 그의 원정대는 파르티아와 카스피 해까지 이르렀다. 정리해 본다.
후한시대 반초의 서역 개척
광무제가 후한을 창업하고 나라가 안정이 되자 오랫동안 방치했던 서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서역에 원정군을 파견한다. 반초는 이 시기의 사람으로 한서의 저자 반고의 동생으로 어려서 책을 좋아했다. 그리고 포부가 커 제2의 장건을 꿈꾸었다는 포부와 야망을 갖고 있었다.
후한 2대 황제 명제 영평16년(서기 73년) 왕망의 난 이후 65년만인 이때 흉노가 자주 변경에 침범해 주민을 살상하는 바람에 가곡관의 성문을 밤낮없이 폐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반초는 분연히 일어나 붓을 버리고 무장을 갖추고 원정군에 가담한다. 이때 나온 고사성어가 투필종군(投筆從軍)이다.
당시 원정군 사령관은 ‘두고’로 두고는 반초를 부사마로 삼아 서역의 사자로 파견하는데, 수행원 36명을 데리고 선선국에 도착한 반초 일행은 처음에는 극진한 대우를 받아 차츰 대접이 소홀해지자 흉노의 사자가 와 압박을 가한다는 것을 눈치챈다. 반초는 가만히 있으면 모두 죽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날밤 수행원들과 흉노 사자를 급습해 사자와 그들의 일행 30명의 목을 베어 버리고, 이를 본 선선국 왕은 한나라에 복종을 맹세한다. 그후 우전과 소륵을 평정하고 서역 남도 제국을 모두 한의 세력권에 넣어 왕망 이후의 서역과의 교통을 부활시키게 된다.
이후 후한 3대 황제 장제는 서역에 대해 소극적인 정책을 펼치는데 반초에게 귀환 명령을 내린다. 황제의 명이라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반초가 소륵을 떠나면 소륵은 다시 흉노에 의해 점령이 되고 반초를 도왔던 소륵의 친한 세력들은 모두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귀국중 조정에 탄원서를 올리고 서역으로 돌아가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다.
북흉노에게 주도권이 넘어갈 뻔했던 서역을 다시 한이 주도권을 잡게 되고 한의 영역이 넓어지게 된다.
반초는 91년 서역도호부의 도호가 되었고, 구자(쿠차)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했다. 97년에는 톈산 산맥과 파미르고원을 7만명의 경기갑 군사로 횡단하여 실크로드를 어지럽히던 흉노나 훈족을 토벌했다. 파르티아의 파코루스 2세와 동맹을 맺어 동쪽으로는 파르티아,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의 해변과 투르크메니스탄의 메르브까지 그의 기지를 확장했다.
여기서 그의 수하였던 장수 감영이 특사로 로마에까지 파견했다고 전해진다. 감영은 유럽에 중국의 흔적을 남긴 최초의 중국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흑해에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감영은 한나라와 유럽의 직교역에 위기를 느낀 파르티아 상인들의 방해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파르티아와의 동맹으로 설치된 한나라 군대의 기지는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이란)과 며칠 거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바그다드와 52 km 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 한나라 군대는 이 지역을 몇 년간 다스렸다. 116년 로마의 황제 트라이아누스는 파르티아로 진격하여 크테시폰으로 진격을 했는데, 한나라의 요새와는 하루 거리였지만, 직접적인 접촉은 일어나지 않았다.
100년 (영원 12년) 반초는 서역에 31년 동안 머물다가 고향이 그립다고 조정에 귀국 탄원서를 냈다. 102년에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지고, 낙양(洛陽)에 돌아온 반초는 고향에서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반초가 없어지자 서역은 곧 흉노의 세력에 떨어졌다. 그 후 한은 몇 번이나 서역에 군대를 보내지만, 반초가 있던 시절의 영토는 되찾을 수 없었다.
이는 한나라가 군사적인 우위로 서역을 평정한 것이 아니라 반초의 사심없고 올바른 마음과 능력을 갖춘 보기드문 훌륭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반초였기에 서역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서역을 개척한 장건과 반초를 나란히 해 서한에 장건이 있었다면, 동한에는 반초가 있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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