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후한 전성기의 끝 후한 3대 황제 장제 효장황제(孝章皇帝) 시기

올드코난 2016. 6. 27. 19:20
반응형

명제의 뒤를 이어 후한 3대 황제 장제가 즉위한다. 후한 장제의 공식 시호는 한 숙종 효장황제 유달(漢 肅宗 孝章皇帝 劉炟, 57년 ~ 88년, 재위 75년 ~ 88년)로 명제(明帝)의 5남이다. 생모 가귀인(賈貴人)은 명제의 황후 마씨(마원(馬援)의 딸)과 사촌자매처럼 사이가 좋아 황제가 되는 이유가 된다.


장제는 60년(영평 3년) 3살이 되던 해에 황태자가 되고 75년(영평 18년) 아버지 명제가 붕어하여 19세에 황제로 즉위했다. 명제의 부인 마황후는 황태후로 세워 후견을 하였는데 마황후는 훌륭한 여성으로 태후라는 막중한 지위에 있었지만 친가 마씨 일족이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못하게 막아 그녀가 생존했던 장제의 시대도 외척이 등장하지 않았다. 장제 초기 마황후가 살아 있다는 것은 장제는 물론 후한에게는 큰 복이었던 것이다.


장제는 어릴 적부터 유학을 좋아했고 관대한 성격으로, 유학의 덕목에 필적한 너그러운 덕치(徳治)를 이끌었다. 그리고, 장제의 치세에는 큰 내우외환(内憂外患)도 없었기 때문에 후한 명제의 시대부터 이어진 안정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태평성대에는 장제의 능력이 뛰어나서라기 보다는 광무제와 명제의 노력이 더 컸다. 장제는 시기를 잘 타고나 큰 어려움이 없었을 뿐이다.


내정은 잘 다스린 편이라고 하지만 원정에서는 다소 약한 모습을 보였다. 서역에 대한 흉노의 공격이 격렬해져서 일단은 서역지역을 철수하였고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가지만 다행스런 것은 당시 반초(班超)의 활약에 의해, 서역을 되찾아 통치하게 되는데, 이는 반초가 황제의 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소신있게 서역에 남아 그곳을 지휘를 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반초는 명제의 인재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서역에 관한한 장제의 공은 없었다.


무엇보다 장제의 치세부터 보이지 않는 위험들이 드러나는데, 이는 다음 세대에 외척이 등장하는 빌미가 된다. 

그 위험은 바로 장제의 황후 두씨로 황태후 마황후가 죽은후 후궁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그후 태자 유경의 생모 송귀인과 태자 유조를 낳은 양귀인을 죽여 쫓아 보낸후 또 태자 유경을 폐하고 유조를 황태자에게 세웠다. 88년 장제가 32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하여, 불과 10세 유조가 화제로 즉위 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두태후의 외척의 시대가 시작되고, 후한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장제의 시대는 후한의 전성기를 일찍 끝낸 시기라고 생각해 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