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黃巾賊亂) 봉기 배경과 의의

올드코난 2016. 7. 1.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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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황색 띄를 써 황건적(黃巾賊)이라고 불리었던 황건적의 난(黃巾賊亂)에 대해 정리해 본다.


1.배경

외척과 환관들의 전횡과 부패에 관직을 매관매직하면서 전국 각처에서 탐관오리들에 의해 백성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이런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백성들은 미신적인 민간신앙 등 현세구제(現世救濟)의 종교를 찾게 된다.

또 조정을 불신하게 된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이중 가장 컸던 반란이며 후한시대에서 삼국시대로 넘어가게 만든 황건적의 난(黃巾賊亂)이 일어난다.


2. 장각 태평도(太平道) 창시

후한 영제 때 거록(鋸鹿)의 장각(張角)은 스스로 대현량사(大賢良師)라 호를 짓고 황천(黃天)의 신의 사자라고 일컬으며 병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치료를 하기 시작했고 아홉 마디(九節)가 나 있는 지팡이를 짚고 설교하고 다녔다. 170년대 초 무렵부터 제자를 사방에 파견해 포교에 힘썼다. 당시 극심한 빈곤과 질병에 공포와 불안을 품고 있던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장각의 태평도(太平道)는 10여 년 사이에 화북(華北)의 동반부로부터 양쯔강(揚子江) 유역에 걸쳐 수십만 명의 신도를 얻어 최대 교단으로 성장한다.

태평도는 주술(呪術)에 의한 요병(療病)을 중심으로 하고, 한대(漢代)에 유행한 참위설(讖緯說)·음양오행설 등과 잡다한 민간 신앙을 가미하고 다시 도가(道家)의 설로 윤색한 것이다.

장각은 이 신도들을 36개의 방(方)으로 조직했는데 군사적인 조직이 되었다.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을 2명의 동생 중 장보(張寶)는 지공장군(地公將軍), 장량(張梁)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일컬었으며, 1만 명 전후의 신도로 이루어지는 방(方)의 책임자로는 장각의 제자가 선출되었고 그들은 신도로부터는 사(師)라 불리며 동시에 방은 그대로 장군 이름으로 불렸다.


3. 황건적의 봉기

종교집단이 아닌 군사조직이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이런 태평도는 후한 조정에는 커다란 위협이 된다. 정부는 탄압책을 쓰며 해산명령을 내렸으나, 이는 오히려 신도의 단결과 교단의 조직을 강화시키고, 결국에는 봉기를 하게 만든다.

장각은 한제국(漢帝國)의 창천(蒼天) 대신 황천(黃天)의 세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하면서 민중을 선동하여 60년 주기(周期)가 새로이 시작되는 갑자년(甲子年)인 184년의 음력 3월 5일을 기해서 봉기하려고 했지만 계획이 누설되고 장각의 심복 마원의와 환관 봉서가 처형되고 관련자 1000명이 옥에 갇히자 장각은 예정을 앞당겨 음력 2월 봉기한다. 황건적의 난이 시작된 것이다. 황건적의 난은 이후 조조에 의해 진압될때까지 10여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4. 진압 과정

황건적의 난은 후한 전국 13곳에서 일어나고 후한 황제 영제는 외척이자 대장군 하진과 대책을 의논한다. 이리하여 옛 유비의 스승이었던 노식과 황보숭, 주준 등 3명의 장수가 황건적과의 전투 부대로 편성되고 조조도 기도위에 임명되어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한편 강동의 손견도 하비에서 부하 황개, 한당, 정보, 조무와 함께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참여한다. 그리고 유주의 탁현에서는 유비가 장비, 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집해 모집한 용사 500명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유주성 전투, 청주성 전투에서는 유비 삼형제가 활약하는 등 관군에 의해 황건적들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고 곡양 전투 중 장각이 병으로 사망한후 장량이 뒤를 잇지만 곡양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양성 전투, 완성 전투 등에서 관군이 잇따른 승리로 사실상 황건적의 난이 와해가 된 듯 했지만 완전히 소통되지는 못했다.

이후 잔당들이 다시 일어나는데, 이 기간 동안 권력을 잡았던 동탁이 죽고 조조가 권력을 잡은 이후 황건적 잔당들은 모두 토벌되게 된다.


5. 의미

황건적의 난은 후한 말기 천하가 어지러울때 종교를 매개로 한 반정부집단의 성장과 궐기의 대표적인 예로 초기에는 종교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역할을 하는 듯 했지만 이후 교세의 성장으로 큰 규모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이 힘을 바탕으로 제국과 대항을 한 사건으로 훗날 원나라 말 주원장의 홍건적의 난과 더불어 중대한 사건으로 다뤄지고 있다.

황건적의 난은 후한시대 황제의 권위를 떨어뜨려 이후 삼국지 위진 남북조 시대를 이어 수나라가 다시 중원을 통일할때까지 혼란기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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