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실크로드의 개척자 장건(張騫)의 서역여행 의의 설명

올드코난 2016. 1. 1. 21:02
반응형

장건은 기원 전 2세기 한 무제 당시 서역으로 가는 남북의 도로 실크로드를 개척한 인물로 중국의 문물과 서양의 본격적인 교류를 하는게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장건에 대해 설명해 본다.

실크로드의 개척자 한나라 장건(張騫)의 서역여행 의의 설명


장건(張騫, ? ~ 기원전 114년) 자는 자문(子文), 지금의 산시 성 성고현(城固縣) 출신이다.

기원전 139년 한나라 건원 4년, 당시 한나라는 변방을 어지럽히는 흉노에 대항하기 위해 대월지에 대한 동맹을 맺으려 사자를 모집한다. 장건이 지원을 해 지원자 100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역으로 가서 대월지국으로 향했는데 대월지는 월지라고 불리었었다. 흉노의 묵돌 선우와 그 아들 노상 선우에게 패한 후, 서쪽으로 옮겨 이름을 대월지로 바꾸었다. 노상 선우는 월지 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고 전하며 이로 인해 월지는 흉노를 원망하고 있었고, 한나라는 흉노 서방의 대월지와의 협공을 위해 장건을 대월지로 파견한 것이다.



장건은 백명의 수행원과 함께 장안을 출발해 황하 서쩍으로 가던 중 흉노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흉노는 수행원들을 심문하다 장건이 월지로 가는 사신 임을 알아 내고 장건을 억류하게 되는데, 무려 10년 동안이나 억류를 당하게 된다. 이 기간동안 장건은 흉노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 자식까지 낳으며 흉노 족이 된 것처럼 생활하자 장건에 대한 감시사 소홀해 진다. 그 틈을 노려 장건은 흉노에게서 탈출에 성공한다. 


정건은 이후 흉노 서쪽에 있는 대완에 이르렀다. 대완은 익히 한나라의 강성함을 알고 있었기에 장건을 환대하고 대월지까지 길을 안내해 주었다. 대월지는 흉노에게 패배한 연후에, 오손에 쫓겨서 더욱 서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장건은 강거(康居)국을 지나 월지에 도착해 월지 왕을 설득하지만, 월지왕은 한나라와의 동맹을 거부한다. 당시 월지는 새로운 땅에 정착하여 풍부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동쪽으로 돌아가 흉노와 싸울 이유가 없었고 흉노에 대한 복수심도 많이 희석된 때였던 것이다.



동맹을 맺는데 실패한 장건은 한나라로 귀국을 결심한다. 흉노를 피해 귀향 노선을 돈황 대신 곤륜산맥을 타서, 야강 족의 땅으로 가는 데 이미 이 곳은 흉노에게 복속되어 있었다. 결국 장건은 다시 흉노에게 붙잡히고 만다. 다시 일 년 남짓 억류가되었다가 군신 선우가 사망한 틈을 타 탈출해 기원전 126년에 한나라로 돌아왔다. 무려 13년만의 귀환으로 출발할 때에 100명 남짓 있던 수행원은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긴 억류기간 동안 장건은 흉노에 대한 내부 문제와 지역과 서역의 주변 정세를 모두 파악하게 되는데 이런 정보들이 이후 한나라가 흉노를 토벌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기원 전 123년, 무제는 대장군 위청으로 하여금 흉노 정벌 원정군을 출발시킨다. 여기서 장건은 경험과 지리 지식을 활용하여 크게 공헌하였고, 위위(衛尉) 박망후(博望侯)로 제수받게 된다. 그러나 기원전 121년의 원정에서 기일을 맞추지 못한 것을 문책받아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2년 뒤 다시 중랑장이 된다.


과거 장건이 서역을 여행하는 도중에 촉(사천) 명산의 대나무와 옷감을 현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손에 넣었는 지 묻자, 인도의 상인으로부터 샀다고 했다. 이것에 의해 촉으로부터 윈난과 미얀마를 통하는 인도로 연결된 루트가 있는 것을 알게된 장건은 한무제에게 윈난을 한에 복속시키라는 건의를 한다. 한무제는 흉노에 대항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오손(烏孫)과의 동맹을 생각하게 되고 기원 전 119년에 장건을 오손의 사자로 보낸다. 이때 서역으로 연결된 루트를 개척하게 된다.


이후 기원 전 114년 장건은 사망한다. 장건이 사후에 서역 여러 나라는 한과 교역을 하게 되었고 이 무역로를 실크로드(비단길)으로 부른다. 또한 한은 흉노에 대해 유리한 입장을 가지게 되고 이후 흉노를 정발하는데 장건이 큰 공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장건은 당시 힘이 세고 마음(도량)이 넓고 사람들 사이에 신망이 있았다고 전한다. 당시 한나라의 적이었던 흉노를 포함한 서역의 여러 국가를 거치면서 장건이 살아 남을 수 있던 것도 장건은 강한 의지와 체력과 인내심과 뛰어난 두뇌를 가진 최고의 인재라는 것을 알게된다.

장건이 없었다면, 한무제의 흉노 정벌은 어려웠을 것이고, 오늘날 비단길로 알려진 한나라와 서역의 교역로는 후대의 일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