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녹림 적미의 난 (적미군, 녹림군), 곤양전투, 왕망의 신나라의 멸망

올드코난 2016. 2. 1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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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위를 찬탈 하고 신 왕조를 세우고, 주(周) 시대의 정치를 이상으로 삼은 왕망의 신나라는 현실을 도외시한 정책으로 민심을 잃고,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또 주변국이었던 흉노(匈奴), 서강(西羌), 고구려(高句麗) 등의 국가들에게도 반감을 샀다. 내부의 혼란과 외교의 고립까지 신나라는 곧 멸망할 운명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데 가장 먼저 세력을 떨친 녹림군과 적미군에 대해 알아 본다.

녹림·적미의 난 (적미군, 녹림군)과 왕망의 신나라의 멸망


1.배경

왕망 이전인 전한시대 후반부터 민란은 계속 있어왔지만, 왕망이 신나라를 건국한 후 백성들의 삶이 더 힘들어지면서 왕망을 타도하겠다는 반란이 전국 각지에서 터져나온다. 이들중 왕망의 신나라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농민 봉기군이 녹림군(綠林軍)과 적미군(赤眉軍)이다.


2. 녹림군

왕망 조정의 군사였던 태사군(太師軍)과 경시군(更始軍)은 무리한 식량 징발 등으로 민심을 잃었는데 ‘차라리 적미군을 만날 망정 태사군과는 만나지 말고, 태사를 만나지 않더라도 경시군이 모두 죽일 것이다’라고 비난을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같은 시기 왕광(王匡)이 빈민들을 모아 녹림산(綠林山)을 거점으로 반역을 일으켰는데 이들을 녹림군(綠林軍)이라고 한다.

녹림군은 천봉 4년(서기 17년)에 호북성 경산현의 녹림산에서 왕광(王匡)과 왕봉(王鳳)을 중심으로 일어나 근처를 약탈하면서 연명하던 세력이었다. 이후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녹림산을 떠나면서 녹림군은 평림군(平林軍), 하강군(下江軍), 신시군(新市軍)으로 나누어지고, 왕광과 신시군은 하남성 남양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남양의 호족 세력인 유연(劉縯), 유수(劉秀 *광무제) 형제들과 연합하면서 왕망 정권을 타도하고 한을 부흥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유씨 중심의 호족 세력에 흡수된다. 이로서 녹림군은 도적에서 반군으로 바뀌게 된 것이며 호적들을 적대시하던 농민들이 호적들과 결탁하게 된 것이다.

23년, 녹림군은 자신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한나라 종실 가운데 한 명을 천자(天子)로 내세우려고 했다. 유현(劉玄)과 유연, 두 사람이 천자로 거론되었고 장수 대부분은 두뇌 회전이 빠르고 배짱이 두둑한 유연을 천자로 세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장수 낙방종(樂放縱)은 유연보다 유약하고 다루기 쉬운 유현이 천자에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녹림군과 호족 유씨 일족의 연합군은 유현을 경시제(更始帝, 재위 23~25)로 추대했으며, 공식적으로 왕망 정권 타도와 한나라 부흥의 기치를 높였다.


3.적미군

한편 호북성에서 녹림군이 생겨날 즈음 천봉 원년(기원후 14년) 산동성에서는 여모(呂母)라는 여인이 현령에게 살해된 자식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리를 모집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18년에 낭사(琅邪) 출신 번숭(樊崇), 역자도(力子都), 봉안(逄安), 서선(徐宣), 사록(謝祿), 양음(楊音) 등 왕망 정권을 전복시킬 뜻을 품은 1만여 명의 무리가 여모의 반란군과 합세해 반(反)왕망 반란군이 되었다. 22년, 왕망은 번숭군의 토벌을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때 번숭군은 왕망의 군대와 대치했을 경우 그들과 자신을 구별 짓기 위해 오행 중 화덕을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눈썹을 붉게 칠했는데, 이때부터 번숭군은 적미군이라 불리게 된다.

적미군은 삼노(三老), 종사(從士), 졸사(卒士), 신인(新人)이라는 계급을 조직하여 조직으로서의 모습을 갖추려 했으나, 수장이었던 번숭조차 문맹에 가까웠기 때문에 제대로 된 법률이나 규정이 없었다. 적미군의 규칙 대부분이 극히 단순했고 문자들을 모르기에 말로만 정하는 무식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왕망이 파견한 왕광(녹림군의 왕광과 동명이인)과 염단(廉丹)을 연이어 무찌르면서 적미군에 대한 백성의 호응은 높아면서 그 수가 크게 늘어 대군으로 성장했다.


4. 곤양전투

녹림군과 유씨 호족과의 연합으로 탄생한 경시제군, 적미군은 왕망 정권 타도를 위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봉기 세력이었으나, 왕망의 신 왕조를 멸망시킨 것은 경시제군이었다.

23년, 왕망은 경시제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왕읍(王邑)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42만에 달하는 군대를 파견한다. 왕읍이 다다른 곳은 바로 유수가 지키고 있던 곤양(昆陽)으로, 곤양성을 지키던 녹림군의 수는 8, 9천에 지나지 않았다. 유수는 왕봉에게 곤양성의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지원군을 모집하기 위해 곤양성을 빠져나갔다. 수적으로 우세했던 왕읍의 군대는 곤양성을 완전히 포위하여 화살을 비처럼 쏘고, 구름사다리차와 쇠말뚝차를 이용해 쉴 새 없이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왕읍의 군대는 지휘 계통의 혼란과 작전 미숙으로 효과적인 공격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신 왕조의 주력 부대가 유수와 3천여 지원군의 공격에 패함으로써 왕읍은 패주했다.


5. 신나라의 멸망

곤양 전투에서 유수가 대승을 거두고 왕망의 군대가 큰 타격을 입자, 경시제는 유연과 유수 형제에게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경시제는 형 유연을 살해하여 스스로 분열을 초래했다. 하지만 유수는 형 유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고 은인자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유수는 경시제의 낙양 천도를 위해 궁전을 정비하라는 명을 받고 하북성으로 떠났다. 한편 경시제는 전의를 상실한 왕망을 총공격하여 왕망을 죽이고 신 왕조를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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