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중국 한나라 후한 (동한) 역대 황제 계보

올드코난 2015. 12. 26.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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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後漢, 25년~220년)은 전한이 신나라의 왕망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한 왕조의 일족인 광무제 유수가 한 왕조를 부흥시킨 나라이다. 수도를 낙양에 두었는데 그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기에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후한이라고 부르며 후한 시대 황제를 간략히 정리해 본다.


제1대 후한 광무제

한 세조 광무황제 유수(漢 世祖 光武皇帝 劉秀, 기원전 6년 ~ 57년; 재위25년 ~ 57년)는 중국 후한 황조의 초대 황제로, 이름은 유수(劉秀), 자는 문숙(文叔)이며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채양현(蔡陽縣) 출신으로 전한의 초대 황제 고제(高帝)의 9세손으로, 왕망(王莽)에 의한 찬탈 이후 신(新) 말기의 혼란을 통일하고 한 왕조의 재흥으로서 후한 왕조를 선포하였다. 시호인 '광무'는 한 왕조를 중흥시켰다는 뜻에서 광(光), 화란을 평정하였다는 뜻에서 무(武)의 문자를 사용한 것이다.

묘호 한 세조 (漢世祖), 시호 광무황제(光武皇帝), 연호 건무(建武) 25년 ~ 56년/건무중원(建武中元) 56년 ~ 57년, 능호 원릉(原陵)


제2대 후한 명제

한 현종 효명황제 유장(漢 顯宗 孝明皇帝 劉莊, 28년 ~ 75년)은 후한의 제2대 황제(재위 : 57년 ~ 75년)로, 다른 이름으로는 양(陽)이 있으며 자는 자려(子麗)이다. 광무제(光武帝)의 아들이다. 그의 치세는 광무제, 장제와 대등하고, 약 200년 지속된 후한을 안정된 전성기를 만들었다.

묘호 한 현종(漢顯宗), 시호 효명황제(孝明皇帝), 연호 영평(永平) 58년 ~ 75년, 능호 현절릉(顯節陵)


제3대 후한 장제

한 숙종 효장황제 유달(漢 肅宗 孝章皇帝 劉炟, 57년 ~ 88년, 재위 75년 ~ 88년) 후한의 3대 황제로, 명제(明帝)의 아들이다. 외척 문제과 원정 등 후한 쇠퇴의 조짐이 보였던 시대

묘호 한 숙종(漢肅宗), 시호 효장황제(孝章皇帝), 연호 건초(建初) 76년 ~ 84년/ 원화(元和) 84년 ~ 87년/ 장화(章和) 87년 ~ 88년, 능호 경릉(敬陵)


제4대 후한 화제

한 효화황제 유조(漢 孝和皇帝 劉肇, 79년 ~ 106년, 재위 88년 ~ 106년) 후한의 제4대 황제로, 아버지는 장제(章帝). 본래 묘호로 목종(穆宗)이 올려졌었으나, 초평(初平) 원년(190) 좌중랑장(左中郞將) 채옹(蔡邕)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환관의 횡포의 효시가 되어 훗날 후한은 화제의 시대부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평가를 듣게 된다.

묘호 한 목종 (漢穆宗), 시호 효화황제 (孝和皇帝), 연호 영원(永元) 89년 ~ 105년/ 원흥(元興) 105년, 능호 순릉(順陵)


제5대 후한 상제

한 효상황제 유융(漢 孝殤皇帝 劉隆, 105년 ~ 106년, 재위 106년) 후한의 제5대 황제로, 화제(和帝) 유조(劉肇)의 차남이다.

화제는 여러 아들을 두었으나 대부분이 요절했고, 외척 등의 모살을 의심했던 화제는 아들들을 민간에 위탁하여 양육하기에 이른다. 화제의 사후, 태후 등씨는 맏아들 유승이 지병이 있음을 이유로 삼아 당시 백일이 갓 지난 상제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유아인 상제가 정치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실권은 등태후를 비롯한 외척에게 쥐어져 있었다. 즉위한 이듬해에 병으로 죽어 요절했다는 의미의 殤이 시호로 부여되었다.

묘호 없음, 시호 효상황제 (孝殤皇帝), 연호 연평(延平) 106년, 능호 강릉(康陵)


제 6대 후한 안제

한 효안황제 유호(漢 孝安皇帝 劉祜, 94년 ~ 125년, 재위 106년 ~ 125년) 후한의 6대 황제로, 장제(章帝)의 손자.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모후(母后)가 수렴청정하고 모후의 오빠 등즐(鄧騭)은 대장군에 올라 병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등 태후가 죽자 안제는 환관과 연합하여 등씨 일가를 축출,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후 환관이 득세하자 나라가 혼란해졌다.

본래 묘호로 공종(恭宗)이 올려졌었으나, 초평(初平) 원년(190) 좌중랑장(左中郞將) 채옹(蔡邕)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묘호 한 공종 (漢恭宗), 시호 효안황제 (孝安皇帝), 연호 영초(永初) 107년 ~ 113년/ 원초(元初) 114년 ~ 119년/ 영녕(永寧) 120년 ~ 121년/ 건광(建光) 121년 ~ 122년/ 연광(延光) 122년 ~ 125년, 능호 공릉(恭陵)


제 7대 후한 소제

한 소황제 유의(漢 少皇帝 劉懿, ? ~ 125년) 후한의 제7대 황제(재위:125년)이다. 아버지는 제북혜왕 유수(濟北惠王 劉壽). 제3대 황제 장제의 손자이다. 제6대 황제 안제의 사후, 황후 염씨(閻氏)에 의해서 옹립 된다. 그러나 즉위 후 200일 쯤에 병에 걸려, 곧 사망한다. 그 후, 환관 손정에 의해 염씨 일족은 살해당하여 유의는 황제의 지위가 박탈되어 왕의 예를 가지고 매장했다. 묘호, 시호, 능호, 연호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 8대 후한 순제

한 효순황제 유보(漢 孝順皇帝 劉保, 115년 ~ 144년, 재위 125년 ~ 144년) 후한의 8대 황제. 125년부터 144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25년부터 이듬해 126년까지 안사황태후 염씨(安思皇太后 安氏)가 섭정하였고 126년부터 132년까지 손정(孫程)이 섭정하였으며 132년부터 144년까지 친정하였다.

본래 묘호로는 경종(敬宗)이 올려졌으나, 붕어한 이후 초평(初平) 원년(190) 좌중랑장(左中郞將) 채옹(蔡邕)의 건의로 취소되어 경종(敬宗)이라는 묘호는 추탈되었다.

묘호 한 경종 (漢敬宗), 시호 효순황제 (孝順皇帝), 연호 영건(永建) 126년 ~ 132년/ 양가(陽嘉) 132년 ~ 135년/ 영화(永和) 136년 ~ 141년/ 한안(漢安) 141년 ~ 144년/ 건강(建康) 144년, 능호 헌릉(憲陵)


제 9대 후한 충제

한 효충황제 유병(漢 孝沖皇帝 劉炳, 143년 ~ 145년, 재위 144년 ~ 145년)은 후한의 9대 황제로 2살에 황위에 올라 얼마 안가 죽었다. 묘호 없음, 시호 효충황제 (孝沖皇帝), 연호 영희(永憙) 145년, 능호 회릉(懷陵)


제 10대 후한 질제

한 효질황제 유찬(漢 孝質皇帝 劉纘, 138년 ~ 146년, 재위 145년 ~ 146년) 후한의 10대 황제. 후한 장제의 현손으로, 장제의 서자 천승정왕의 증손이며 낙안이왕의 손자이고 발해효왕의 아들이다. 충제가 위독해지자 대장군 양기(梁冀)가 낙양으로 불러왔으며, 충제가 죽자 양기와 양황후가 황제로 세웠다. 질제는 양기에게 지절을 주고 건평후로 봉했다. 총명하여, 양기의 전횡을 알고 조회에서 양기를 바라보고 “그대는 발호장군이로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양기에게 짐살당했다.

묘호 없음, 시호 효질황제 (孝質皇帝), 연호 본초(本初) 146년, 능호 정릉(靜陵)


제11대 후한 환제

한 효환황제 유지(漢 孝桓皇帝 劉志, 132년 ~ 168년) 후한의 11대 황제. 하간효왕 유개(河間孝王 劉開)의 손자이며 여오후 유익(蠡吾侯 劉翼)의 아들이다. 본래 묘호로 위종(威宗)이 올려졌었으나, 초평(初平) 원년(190) 좌중랑장(左中郞將) 채옹(蔡邕)의 건의로 취소되었다.

묘호 한 위종 (漢威宗), 시호 효환황제 (孝桓皇帝), 연호 건화(建和) 147년 ~ 149년/ 화평(和平) 150년/ 원가(元嘉) 151년 ~ 152년/ 영흥(永興) 153년 ~ 154년/ 영수(永壽) 155년 ~ 158년/ 연희(延熹) 158년 ~ 167년/ 영강(永康) 167년, 능호 선릉(宣陵)


제 12대 후한 영제

한 효령황제 유굉(漢 孝靈皇帝 劉宏, 156년 ~ 189년, 재위 168년 ~ 189년)은 중국 후한의 제12대 황제로, 장제(章帝)의 고손자이다. 할아버지는 해독정후(解瀆亭侯) 유숙(劉淑), 아버지는 해독정후(解瀆亭侯) 유장이며, 어머니는 후한 환제의 5촌 조카인 동태후이다. 재위 중의 잇따른 재해와 소규모 반란, 그리고 황건의 난 등으로 그의 사후, 군웅할거 시대가 열리게 되고, 이는 삼국 시대로 이어진다.

묘호 없음, 시호 효령황제 (孝靈皇帝), 연호 건녕(建寧) 168년 ~ 172년/희평(熹平) 172년 ~ 178년/광화(光和) 178년 ~ 184년/중평(中平) 184년 ~ 189년, 능호 문릉(文陵)


제 13대 후한 소제 유변

한 소황제 유변(漢 少皇帝 劉辯, 173년 또는 176년 ~ 190년 1월(음력))은 후한의 제13대 황제이다. 189년 영제를 이어서 황제에 올랐으나 동탁에 의해 폐위되어 홍농왕(弘農王)으로 강등당하고 이듬해에 살해당했다. 시호는 회(懷)여서 홍농회왕(弘農懷王)으로도 불린다. 묘호와 능호는 없다. 연호 광희(光熹) 189년/ 소녕(昭寧) 189년


제 14대 후한 헌제

한 효헌황제 유협(漢 孝獻皇帝 劉協, 181년 ~ 234년) 후한(後漢)의 제14대이자 마지막 황제로 자는 백화(伯和)이다. 휘는 아버지 영제(靈帝)와 모습이 닮았기 때문에 지은 것이다. 삼국지의 시대로 조조 사후 아들 조비에 의해 폐위된다.

선양한 이후 산양공으로 격하되었다. 폐위된 후 유비는 그가 죽은 것으로 오해하여 제사 지내고 시호를 효민황제라 하였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조비가 선양을 받자마자 자객을 보내 헌제를 암살한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실제로 천수를 누리다 제갈량이 죽은 해에 죽었다. 실제로 조비는 헌제 유협에게 황제 시절의 복식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허락했으며 선배로서 대우했다. 이에 헌제 유협은 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지만 일신은 편안하게 보냈으며 헌제 유협은 제갈량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제갈량과 같은 나이에 같은 해에 죽었다.

묘호 없음, 시호 효헌황제 (孝獻皇帝), 연호 영한(永漢) 189년/중평(中平) 189년/초평(初平) 190년 ~ 193년/흥평(興平) 194년 ~ 195년/건안(建安) 196년 ~ 220년/연강(延康) 220년, 능호 선릉(禪陵)


이상 후한(後漢, 25년~220년) 14명의 황제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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